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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대통령 선거가 있을 때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대통령 후보로 나왔다는 이유로 TV에 이름이 나오면서 김대중과 김영삼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TV와는 달리 '김대중은 빨갱이다'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빨갱이가 대통령 되면 곧바로 전쟁이 난다는 말이었다.

92년 대통령 선거가 있을 때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대통령 후보로 나온 사람들이 5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더구나 빨갱이라는 말도 여전했다. 이제 조금 사회를 알아가는 나는 어머니께 왜 빨갱이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재판 이야기를 하며 간첩이라고 말했다. 간첩으로 감옥까지 갔으니 빨갱이가 아니고 뭐냐는 것이다.

그 시절 나는 전남 순천을 자주 갔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경남 하동이다. 어머니의 고향은 전남 광양이고, 아버지의 고향은 경남 하동이다. 당연히 외갓집은 전남이었다. 더구나 누나는 전남 순천에 살고 있다. 두 지역을 가까이 두고 살다보니 말투는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가 않았다. 덕분에 전라도에 가면 경상도에서 왔다고 욕을 들었다. 반대로 부산에 가면 전라도에서 왔다고 욕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나는 두 군데 모두에서 욕을 들어야 했다.

그런 감정이 특히 심했던 것은 당시 인기가 좋았던 야구였다. 롯데와 해태구단만이 아니라 제과에서도 감정의 골은 깊었다. 그 시절 순천 누나집 가까운 곳에 약국이 있었다. 어떤 이유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름이 '롯데약국'이었다. 그리고 선거기간에는 약국 문을 닫았다. 몇 년이 지나자 약국 이름을 아주 바꾸어 버렸다.

97년 대통령 선거가 있을 때는 대학생이었다. 하지만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전쟁이 난다는 말은 여전했다. 그에 박수를 쳐 주는 것처럼 휴전선에서 총을 쏘는 일까지 생겼다. 시골 어른들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망할 거라는 위기가 점점 현실로 다가왔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장면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장면
ⓒ 김대중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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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통령이 되어도 전쟁은 나지 않았다. 김대중이 빨갱이라는 말은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꼬리표처럼 달고 있었다. 시골 마을의 어른들은 '빨갱이가 대통령해도 아무 일 없는 현실'이 실감나지 않는 분위기였다. 전라도 사람이 대통령을 하니 이젠 경상도 사람이 살기가 어려울 거라고 말했다. 엄청난 보복이 있을 거라며 두려움으로 살았다. 하지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통령에 당선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목포 유달산에 갈 일이 있었다. 새벽에 도착하는 경전선 열차를 타고 갔다. 은근히 무섭기도 했다. 어린 시절 경상도 깡패와 전라도 깡패가 싸웠다는 말도 들었다. 심지어는 경상도 번호판을 달고 전라도에 가면 주유소에서 기름조차도 넣어 주지 않는다고 했다.

반대의 소문도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걷기만 했다. 골목마다 대통령 당선을 축하 하는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그 펼침막에서 김대중은 대통령이 아니라 선생님이었다. '김대중 선생님의 당선을 축하합니다' 라는 펼침막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 걸었던 것이다.

대통령 취임식을 하는 날도 시골 마을의 어른들은 불안했다. 빨갱이가 대통령이 되는데, 군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전두환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시골 마을길을 포장하는 비용도 지원되지 않을 거라고 불안해했다. 하지만 모든 것들은 그대로였다. 마을 어른들은 빨갱이가 대통령을 해도 괜찮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2002년에도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이제는 몇 분 남지 않은 마을 어른들이지만, 빨갱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전쟁이 날 거라는 말도 없었다. 전라도 어디를 돌아다녀도, 경상도 어디를 돌아다녀도 자연스럽게 말을 할 수 있다. 이제는 출신 지역 때문에 욕을 듣지도 않는다. 정치인이 만든 지역감정에 아무 것도 모르는 국민들이 이용당했던 것이다.

전 재산이 29만 원 뿐인 전직 대통령이 '김 전 대통령 재임시절에 전직 대통령들이 제일 행복했다"라고 한 말이 뉴스로 나왔다. 어쩌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사형 선고를 내려 주었는데, 받은 것은 특별사면을 받았다. 그러니 제일 행복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자신보다 더 크고 넓은 마음을 가진 분이란 걸 느꼈을 것이다. 

인간 김대중의 삶은 '인동초(忍冬草)'와 같았다. 그리고 그가 애송했다던 사무엘 울만의 시처럼 청춘의 기상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나 불타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깨어있는 시민이 되어 '행동하는 양심'의 표상으로 국민의 삶 속에 뿌리내릴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꿈인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며, 통일의 희망이 무지개처럼 피어오르는 나라"는 우리 모두가 만들어 가야 할 일이다.




태그:#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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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 말이 적어야 하고, 뱃속에 밥이 적어야 하고, 머리에 생각이 적어야 한다. 현주(玄酒)처럼 살고 싶은 '날마다 우는 남자'가 바로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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