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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만화? 잘 안 보게 돼. 정치를 알아야 만화 내용을 알 수 있잖아. 이해하기도 어려운 걸."

신문에서 시사만화를 보느냐는 내 질문에 회사 동료 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름을 잘 모르는 정치인이 등장하거나 시사 상식이 풍부하지 않는 이상 단 한 컷, 때로 4컷의 만화에 담긴 묘미를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물은 나도 시사만화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사람은 아니다.

회사 일 하는 틈틈이(고백하건대 상사의 눈치를 보며) 몰래 뒤적이는 인터넷 기사 보기에도 바쁜 마당에, 메인 면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만평을 일부러 찾는 게 쉬운 일인가. 게다가 웹툰같은 예쁘장한 그림체로 그려진 스토리 만화에 익숙해진 터라 펜선만으로 그린 듯한, 옛날 그림처럼 보이는 시사만화는 '가까이 하기에 너무 까다로운 당신' 같은 존재였다.

내가 좋아하는 몇 개 안 되는 시사만화는 3MB로 유명한 장봉군 화백의 그림, 내게는 이름으로만 유명한 박재동 화백의 '크로키 그림', 정치에 유달리 관심 많은 8살 소녀를 그린 아르헨티나 만화 마팔다, 이 정도였다. 우연히 소식을 듣고 '한국 시사만화 100주년 기념전'을 보러가면서 내 머리 속에서는 궁금한 것이 생겼다. 내가 시사만화도 웹툰이나 출판 만화처럼 재미있게 볼 수 있을까?

시사만화도 웹툰이나 만화처럼 재밌을까

대통령들의 익살스러운 얼굴이 관람객을 맞는다.
▲ 역대 대통령의 특대형 캐리커처 대통령들의 익살스러운 얼굴이 관람객을 맞는다.
ⓒ 이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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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남산에 위치한 서울애니메이션 센터에 도착해 보니 전시장 입구에서 역대 대통령의 대형 캐리커처가 관람객을 반기고 있었다. 대통령 대형 캐리커처 앞에는 사인회 행사장이 조그맣게 마련되어 있었는데 정작 사인회 행렬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한 화백이 사인회장으로 모여든 나이든 어르신들의 캐리커처를 그려주고 있었다. <경향신문> 김용민 화백이었다.

전시회장을 지키고 있던 젊은 여성 화백과도 얘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일반 스토리 만화도 재미있지만 그림을 통해 사회를 비판하고 평소 정치나 시사에 대한 불만을 그려냄으로써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듯한 시원함을 느끼게 하는 만화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으니, 시사만화를 감상하는 기본 포인트라도 잡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전시장에 들어가기 전에 작가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니 몇 번을 기다리다 김용민 화백이 드디어 내 캐리커처를 그려주었다. 캐리커처 그리는 내내 시시콜콜한 말을 건넨 나를 잘 참아준 화백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전시장에 들어갔다. 호기심이 생겼으므로, 만화 내용이 더 잘 이해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두 줄 문장 쓰는데, 5시간 고민한 만평

정치인들을 다양하게 그린 삽화를 보기만 해도 절로 웃음이 납니다.
▲ 전시장 풍경 정치인들을 다양하게 그린 삽화를 보기만 해도 절로 웃음이 납니다.
ⓒ 이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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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은 두 개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국 시사만화 100년을 개괄적으로 보여주는 섹션과 현재 한국의 각 신문에서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는 시사 만화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섹션, 총 2개로 나뉘었다. 먼저 한국 시사만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섹션으로 발길을 향했다.

한국 시사만화는 일제에 대항해 현실을 비유하고 자유를 쟁취하려는 수단이었다. 신문의 태동기와 함께 시사만화도 함께 융성하는 발판을 마련하는 과정을 밟게 된다. 주변 강대국 사이에 껴서 세력 각축장이 되어버린 모습을 풍자하는 삽화가 전시되어 있어 약소국으로서 조선의 위치를 생각하게 했다.

시사만화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공간, 독재 정권을 아우르는 역사의 산 증인 역할을 해온 것이다. 보도기사와 사설은 검열의 대상이 되더라도 풍자와 유머를 바탕으로 하는 만평만큼은 정부의 눈길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목소리를 낸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경무대 똥지게 지는 분이요"라는 대사로 유명한 만화 '고바우 영감'도 그러한 훌륭한 작품 중 하나였다. 자그마치 1만 회를 넘어 연재한 다작이자 걸작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은퇴를 아쉬워하는 만화를 그렸다는 박재동 화백의 그림들도 전시되어 있어, 한국 시사만화에 새 바람을 몰고 온 그의 위치를 짐작해 볼 수 있었다.

현재 활동하는 화백들의 작품을 전시한 섹션에서는 <한겨레>, <경향신문>, <오마이뉴스>, <미디어오늘>에서 볼 수 있었던 다양한 시사만화가의 작품을 전시해 놓았다. 미디어 오늘에 올렸던 '지팡이와 밀짚모자'는 특히 두 대통령을 떠나보낸 직후 내가 본 만평이라 기억에 크게 남아 있는 그림이다. 화백은 만화에 들어갈 단 두 줄의 말을 쓰기 위해 5시간을 고민했다 한다. 그 말의 무게를 언제나 잊지 않고 가슴 깊이 새기고 싶은 마음이다.

정치에 조금 관심 가지면, 보이는 재미가 두 배

제가 인상깊게 봤던 만평입니다.
▲ 지팡이와 밀짚모자 제가 인상깊게 봤던 만평입니다.
ⓒ 이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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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관람의 마무리로 시사만화가의 하루를 다루는 영상물을 봤다. 때로는 사무실에서 사색에 잠겨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현장에 나가서 직접 삶을 관찰하고 그림으로 그려내는 이도 있었다. 한 컷에 삶을 담아내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은 이들, 그들이 한국의 시사만화가들이었다. 그려진 만화뿐만 아니라 화백들에 대한 이야기도 전시 속에 녹여내려는 주최 측의 작은 배려인 듯 했다. 앞으로 신문 면에서 만평도 종종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전시회장을 나섰다.

시사만화가 재미없다던 언니의 말을 다시 생각해본다. 정치와 시사를 논하는 만화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까에 대한 내 대답은 'Yes'다. 나와 상관없는 다른 세계의 정치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바로 이 현실의 정치를 다루는 것이므로. 내가 현실을 알고자 하는 만큼,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만큼 시사만화 속에 담겨진 웃음과 비판의 묘미를 알아가는 재미는 더해질 것이다.

다음주에는 3MB 아빠인 장봉군 화백도 온다 하니 지인들을 꼬여서 함께 사인 받으러 가고 싶다. 업무에 치인 한 주를 보낸 후에도 체력이 남아 있다면(우주에서 제일 싫은 야근만 안한다면) 남산 길을 한 번 더 오르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다.

덧붙이는 글 | '한국 시사만화 100주년 기념전'은 13일까지 서울 중구 예장동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서 열린다.



태그:#시사만화,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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