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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낙안군은 어떤 도시였을까?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오태석, 채동선과 같은 시대를 초월한 걸출한 음악인들이 태어나고 활동했다는 것을 볼 때 음악적 토양과 자양분이 많은 음악의 고장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특히, 낙안군에는 가야금병창의 중시조인 오태석(1895-1953)과 바이올린 연주자이며 작곡가인 채동선(1901-1953)이라는 낙안군 음악계의 양대 산맥이 있다. 그들은 낙안군이 폐군되던 1908년 이전에 낙안군(낙안과 벌교)에서 각각 태어나 1930년 무렵부터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해 20여 년간 한국 음악계에 큰 획을 그어놓고 6·25 전쟁 끝 무렵인 1953년 동시에 생을 마감했다.

 

흔히 이들이 태어나고 활동하고 죽음을 맞이했던 그 시기가 이 지역은 물론 우리 민족에게 있어 가장 큰 아픔의 시절이었다고 회고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지역이 없어지고 갈라졌던 낙안군 폐군이라는 불행한 환경에서 태어나 일제침략을 고향에서 맞이하면서도 음악적 소양을 쌓고 이후 왕성한 음악활동으로 독립정신과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해방과 더불어 국극사와 고려음악협회에 참여해 창극재건운동이나 민족음악부흥을 부르짖다가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 이력을 보면 '암울한 시기였음에도 음악을 통해 민족이 걸어 나가야 할 길을 인도한 선각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릇 예술의 특성이 그렇듯 시대와 역사가 바뀌면 가장 먼저 그들에게 사상 전향을 강요하고 예술을 통해 대중에게 전파할 것을 종용한다. 드러나지 않게 인간의 감성을 빠르게 변화시키는 힘이 예술에는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한마디로 '일순간에 앉은뱅이가 일어서서 전장으로 향하게 할 정도의 마력'이 있는 것이 예술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당시 침략자인 일본인들에게 주시되고 주목 받을 수밖에 없는 예술인 신분이었던 그들이 일제강점기 총칼 앞에서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을 것이란 점은 충분히 짐작이 간다. 더구나 개인의 영달을 목적으로 일본의 앞잡이가 돼 민족과 국민을 팔아먹는 사람들이 주위에서 늘어갈수록 그 심적 고통은 커져만 갔으리라 생각된다.

 

오태석과 채동선은 어떤 음악인이었을까? 창극재건운동을 주도한 국극사와 민족주의 음악인들로 구성된 고려음악협회를 각각 주도적으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민족 음악가였음은 분명하다. 일제침략, 사상대립, 6·25, 미군정 등의 혼탁한 시대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외로운 길을 선택해 매진한 것이다.

 

선택의 폭이 줄어들 수밖에 없던 일제강점기 때 채동선과 같은 양악인들은 일제 찬양의 선두에 내 몰렸고 오태석과 같은 국악인들은 우리음악(국악) 말살정책 때문에 남모르는 고초를 당해야만 했다. 하지만 일제가 국악인들과 양악인 들에게 들이대는 잣대는 다소 차이가 있어 그들의 삶이 동일하지는 않았다.

 

비교적 오태석은 자유로웠다. 기록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때에도 전국을 무대로 공연을 다녔던 것은 물론 수시로 라디오 프로그램에도 출연해 우리가락을 노래하고 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구나 1924년 일본 콜롬비아레코드 회사의 초청으로 일본에서 녹음도 하고 음반을 남겼는데 이는 일본도 무시 못할 일본 국민들의 절대적인 성원 때문이었으리라 짐작된다.

 

해방이후에는 일제 강점기 때 자행된 우리 음악 침탈을 회복하기 위한 창극재건운동을 위해 국극사의 창립회원으로 들어가 활동했고 1947년 미군정과 관계 당국의 국악원에 대한 비 합법화 조치로 위원장이던 함화진이 검거되는 등 시련을 겪는 어려움 속에서도 활동을 계속했다. 또 6·25전쟁이 일어나자 국극사원이었던 임소향·정남희·조상선 등이 월북해 해산됐지만 민족음악을 살리고자 노력한 그의 공로는 큰 업적으로 남는다. 

 

그에 반해 낮에는 농부로 저녁에는 음악인으로 몰래 살아야만 했던 채동선의 삶은 힘겨움 그 자체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때 많은 양악인들이 일제 찬양으로 돌아섰음에도 불구하고 창씨개명도 거부한 채 민족주의적인 신념으로 자신의 음악세계를 구축하면서 100여 편의 악보를 남겼고 양악을 전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라져가는 국악의 채보(곡조를 듣고 악보를 만드는 일)에 전력을 쏟았다는 점은 높이 살만한다.

 

또한, 해방과 함께 고려음악협회를 창설하고 일제 찬양에 몰두했던 음악가, 좌경화 되었던 음악가, 미군에 편승한 음악가들의 반민족적 행태를 바로잡기 위해 민족주의적인 음악인들의 단합을 역설하고 해방의 감격을 담은 입성가, 3·1절 노래, 개천절, 한글노래 등을 통해 애국적 정열을 노래 속에 담았다.

 

당시의 상황을 잡지 객석은 <해방 직후 음악계는 좌익의 음악동맹과 채동선이 이끄는 민족주의 음악가들, 그리고 현제명 등 일제 강점기부터 음악계 중앙을 장악한 관변 음악가들로 크게 나뉘어 의견 대립이 계속되는 양상을 띠고 있었다. 현제명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음악가들은 일제에 협력하고 해방 후에도 주도권 장악 싸움이나 일삼는다 하여 좌익 진영과 민족진영 양측으로부터 크게 비판받고 있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1990년 5월호).

 

하지만 그들의 삶은 길지 않았다. 우리 역사에서 사회 전반적으로 민족주의 노선을 걷는 사람들의 삶이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듯이 오태석, 채동선 두 음악인도 1953년 6·25동난 끝 무렵에 우연찮게도 동시에 생을 마감했고 차츰 잊혀져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최근에 와서 오태석과 채동선의 생가가 각각 복원되고 낙안지역에서는 오태석의 음악과 사상을 이어받아 (사)낙안읍성가야금병창보존회가 매 주말마다 공연을 열고 있으며 채동선 또한 음악당이 개관돼 정기적으로 연주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태석의 가야금은 박귀희, 오갑순, 안숙선, 강정숙 등으로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고 그 전수자인 이영애 씨가 낙안읍성에서 지역민들에게 확산시키는 작업을 벌이고 있는 반면 채동선의 바이올린은 음악적 계보를 잇지 못해 지역에 뿌리를 심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오태석 생가에서 가야금 소리가 울려 퍼지고 5킬로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채동선 생가에서도 바이올린 소리가 울려 퍼지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가슴 벅차다. 그들이 나라와 지역의 격변기에 민족주의적 정신을 가지고 음악인으로서 일관되게 살았던 점을 기리는 뜻에서라도 지역에서 국악과 양악이 만나는 정기 합동공연을 기획해 볼만한 일이다. 아니 후대인들이 해야 할 의무가 아닌가 생각된다.

 

낙안군과 낙안군 폐군(廢郡) 
현재의 순천시 외서면을 비롯해 낙안면, 별량면 일부, 보성군 벌교읍 그리고 고흥군 동강면, 대서면 일부의 땅은 옛 낙안군이었다. 하지만 101년 전인 지난 1908년 10월 15일, 일제는 항일투쟁무력화, 동학혁명진원지분산, 침략거점도시화를 위해 낙안군 자체를 없애버리고 주민들을 인근 지역 세 곳으로 강제 편입시켰다.

덧붙이는 글 | 남도TV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낙안군, #남도TV, #오태석, #채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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