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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군 벌교읍에 있는 태백산맥문학관 벽에 걸린 조정래씨 브로마이드
 보성군 벌교읍에 있는 태백산맥문학관 벽에 걸린 조정래씨 브로마이드
ⓒ 서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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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기록은 누구 편일까? 짧은 생각으로는 산자의 기록이며 좀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승자의 기록이다. 하지만 죽은 자를 기록하고 패자를 기록해 산자와 승자의 그곳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 있다. 바로 소설가 조정래씨다. 벌교는 그를 위한 문학관 하나를 세웠다.

오늘 벌교읍 회정리에 있는 소설가 조정래씨의 태백산맥문학관을 다녀왔다. 건물이 터에 올라서기 전부터 뻔질나게 다니던 곳이며 낙안군 폐군 100년을 맞아 자전거로 지역 100회 답사를 하던 지난해에는 자전거를 끌고 시간 날 때마다 가던 곳이었기에 전혀 낯설지 않는 곳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유난히 생소한 것은 건물을 감상하거나 작품을 논하기 위해 들른 것이 아닌 생각을 나눠보기 위함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조정래씨가 쓴 소설 태백산맥은 일제강점기와 맞물린 지주와 소작인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그 속에서 근본적 이유를 따져보기도 전에 동족간 좌·우익의 이념대립이 덮친다. 그리고 전쟁과 함께 등장한 외세의 개입. 결국 나중에 곰곰이 따져보니 그것은 외세에 의해 짓밟힌 서러운 한의 역사라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었다.

이런 한의 세월에서 그는 소작인에 초점을 맞추고 좌익에 초점을 맞추고 짓밟힌 우리민족에 초점을 맞췄다. 혹자는 그것이 편향된 시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이미 60년 넘게 편향될 대로 편향된 시각으로 쓰인 승자의 기록에서 단지 빠진 부분만 채워 넣어 동등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소설 태백산맥은 60년 전, 여순사건을 배경으로 벌교에서 시작된다. 소설 중간에 일제강점기 끝 무렵도 살짝 보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얘기를 끄집어내기 위한 것이거나 과정상 보이는 장면들이다. 조정래씨가 소설을 6·25끝 무렵까지 끌고 간 것은 외세의 개입이 중요한 부분임을 언급하기 위해서다.

필자는 현재 101년 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군되고 형제가 뿔뿔이 헤어져 생활하고 있는 아픔과 한의 지역 옛 낙안군(외서, 낙안, 벌교, 별량, 동강, 대서 등)을 돌아보면서 '낙안군 이야기'를 엮어 가고 있다. 그런데 그곳이 공교롭게도 조정래씨가 소설 태백산맥에서 출발점과 중심지로 삼은 벌교다.

낙안군 이야기는 소설 태백산맥보다 40여 년이 앞서 이 지역에서 일어났던 일로, 1908년 멀쩡하게 자리하고 있던 낙안군을 외세가 강제로 폐군시키고 한 형제였던 지역민들을 세 곳으로 쪼개서 인근 시·군(현, 순천시, 고흥군, 보성군)에 편입해 버린 사건이 출발점이다.

태백산맥 문학관 관람을 온 학생들
 태백산맥 문학관 관람을 온 학생들
ⓒ 서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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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서울을 10등분해서 서울이라는 지명은 없애버리고 인근 시로 지역민들을 강제로 편입시켜 서울 자체를 말살해 버린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진 곳이 101년 전의 낙안군인데 더욱 가당찮은 것은 외세가 물러났는데도 그대로 고착화시켜버린 불합리가 아직까지도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좀 현실적으로 와 닿게 가정을 해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사당역과 이수역 중간을 시 경계선으로 나누고 서울 사당지역을 과천시로 강제로 편입시켜 과천시 사당동이라고 하면 사당 지역 사람들은 어떤 생활을 하게 될까? 그동안 자전거 타고도 관공서 일을 보러 다녔는데 이제는 모든 일을 보기 위해 날마다 남태령 고개를 넘나들어야 한다.

아이들 학교도 과천으로 다녀야 하고 어른들은 그 지역 사회단체에 들어가야 하는데 전혀 교류관계가 없었기에 끼워줄리 만무하다. 아이들은 왕따를 당할 것이 분명하고 어른들은 단체장이나 시의원에 출마해도 당선은 불가능하다. 학연, 혈연, 지연 등으로 뭉친 사회에서 더구나 수적 열세까지 있는데 당선가능성은 없는 얘기다.

그런 상황에서 사당의 지역발전이나 현안을 과천시에서 귀담아 들어주는 것 또한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다. 예산 편성을 기존의 과천시 별양동 보다 앞서 해 줄 일은 만무하다. 사당에서 이수 가는데도 시외요금을 내야한다. 지금 기준으로 생각하면 웃음밖에 안 나올 일이다. 사당동이 과천시로 간다는 사실 그 자체부터가 가능성이 없는 얘기로 역사 문화 지리적으로 이수와는 한 형제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웃기고 가능성 없다는 얘기가 101년 전 일제에 의해 낙안군에서 자행됐다. 낙안과 벌교는 사당과 이수처럼 평지로 연결되고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한 형제인데 논두렁을 시·군 경계선으로 삼고 심지어 마을길도 나눠 지역을 쪼개고 낙안군을 없애버리면서 지역민들을 인근 지역으로 강제 편입시켜버렸다.

옛 낙안군 주민들은 100년 넘게 남의집살이를 하고 있으며 그것이 3대째 대물림 되고 있다. 이는 평생을 가도 주민들이 일어서지 못하게 하는 구조적 모순을 안고 있다. 그런데 더 큰 문제점은 그런 지역민들의 억울함을 해결해 줘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이기주의와 사리사욕에서 오히려 고착화시키려 한다는 점이다.

태백산맥 문학관에서 관람을 하고 있는 관람객
 태백산맥 문학관에서 관람을 하고 있는 관람객
ⓒ 서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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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문학관 입구에는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고 적혀있다. 이는 평소 조정래씨의 지론이기도 한데 만약 조정래씨가 낙안군의 설움에 대해 알았다면 주제와 벗어나기에 길게 할애하지는 못하지만 소설 마지막에 하대치가 어둠속으로 사라지면서 "부모 잃고 형제가 갈라져 생활하는 이 서러운 땅"이라는 독백이라도 남겨줬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은 낙안군이라는 주제만을 가지고 2년간 집요하게 고민했던 필자만의 시각이며 욕심일지도 모를 일. 태백산맥문학관을 나서며 낙안군에 관해 마음속에 시원한 대답을 듣지는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101년 동안 다양한 방법으로 지역민을 옭아매 고착화시켜왔던 측의 편이 아니라 지역민의 설움과 한에 초점을 맞춰 지역민의 얘기를 옮겨 적어야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은 승자의 기록에 빠진 부분을 내가 넣는 일이 될 것이다.

낙안군과 낙안군 폐군(廢郡)  
현재의 순천시 외서면을 비롯해 낙안면, 별량면 일부, 보성군 벌교읍 그리고 고흥군 동강면, 대서면 일부의 땅은 옛 낙안군이었다. 하지만 101년 전인 지난 1908년 10월 15일, 일제는 항일투쟁무력화, 동학혁명진원지분산, 침략거점도시화를 위해 낙안군 자체를 없애버리고 주민들을 인근 지역 세 곳으로 강제 편입시켰다.

덧붙이는 글 | 남도TV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낙안군, #남도TV, #태백산맥문학관, #낙안, #벌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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