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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꽃 뒤로 바라보이는 황매산
 억새꽃 뒤로 바라보이는 황매산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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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여기도 6·25때 억울한 죽음이 있었던 곳이네."
"그러게 말이야, 이곳도 지리산 자락이잖아?"

서울을 출발한 버스가 대진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산청 나들목에서 빠져 잠깐 달리자 이정표 하나가 눈길을 붙잡았다. '산청 함양사건 추모공원' 이곳은 6·25당시 지리산 일대 공비토벌작전 중에 11사단 9연대 3대대에 의해 가현마을과 방곡마을 양민들이 집단 학살당한 곳이었다.

그렇다 그 날은 시간조차도
갈기갈기 찢겨져 피 흘리고 있었다.
시간을 어찌 깁고 기워
새 시간을 만들 것인가
-거창 출신 신달자 시인의 시 '넋이여 아직도 잠 못 이루고 있는가' 중에서

양민학살의 상흔 짙은 산창 땅에서 만난 첫 풍경

지리산 자락에 있는 거창과 함양, 산청지역은 6·25의 상흔이 유달리 깊게 배어있는 곳이 아니던가. 그런데 지난 9월 25일 주말을 맞아 찾아간 산이 바로 산청군과 합천군 경계지역에 있는 황매산이었다.

신촌 마을에 서있는 거대한 정자나무
 신촌 마을에 서있는 거대한 정자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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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렇게 익어가는 논두렁의 콩
 누렇게 익어가는 논두렁의 콩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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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을 태운 버스는 산골길을 달리다가 중간에서 다른 일행들을 내려주고 조금 더 달려 신촌마을에서 멈췄다. 차에서 내리니 눈앞을 막아선 것은 거대한 정자나무 한 그루였다. 어른 다섯 명이 팔을 벌려야 안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정자나무 아래는 마루를 깔아놓은 마을 사람들의 쉼터였다.

이 마을이 황매산을 오르는 길 가운데 가장 가까운 지점이었다. 이틀 전에 지리산 천왕봉을 오른 피로가 완전히 풀리지 않아 이곳 황매산은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올라가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런데 마을 안길을 걸어 올라가며 눈길은 자꾸 주변 풍경에 머문다.

산골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이 마을이라고 한국전쟁 당시의 상흔이 없을 수가 없겠지만 겉으로 드러난 마을풍경은 평화롭기만 했다. 논두렁의 콩과 함께 황금빛 누런 빛깔로 익어가는 벼이삭이 논에 가득한 풍경이며, 그 벼이삭에 앉아 한낮의 햇볕을 즐기는 여치 한 마리가 느긋한 표정이다.

벼 이삭 위에 앉아 있는 여치 한 마리
 벼 이삭 위에 앉아 있는 여치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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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락해 가는 모습의 영화촬영장
 퇴락해 가는 모습의 영화촬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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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짙푸른 산골짜기에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다랑이논들이 정다운 길을 걸어 산자락에 접어들었다. 숲길엔 여기저기 들국화가 피어 있고 밤나무 밑엔 알밤도 떨어져 있는 모습이 가을다움을 한껏 드러내는 풍경이다.

중턱으로 접어들자 저만큼 오래전에 <단적비연수>를 촬영했던 영화촬영 세트장이 나타난다. 세트장 입구 넓은 마당엔 거대한 나무 밑 둥이 세워져 있었지만 진짜나무가 아니라 가짜나무였다.

가을빛 짙어지는 아름다운 산골마을 풍경

세트장 안으로 들어서자 황량한 느낌이 쏴아 밀려온다. 대부분 나무로 만들어진 촬영 세트는 벌써 몇 년이 지나서인지 썩어가고 퇴락해가는 모습이 역력하다. 영화에서 보았던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 보여 오히려 생경하기까지 하다.

산길은 완만하고 평탄했다. 영화세트장에서부터 오르는 길은 양쪽 고산 평원에 철쭉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있는 모습이 봄철이었다면 철쭉꽃이 매우 화려했을 것 같다. 그러나 철쭉꽃 대신 하얗게 휘날리는 억새꽃들이 조금은 쓸쓸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황매산 정상에 오른 일행들
 황매산 정상에 오른 일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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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길에 바라본 황매산 고원지대
 하산길에 바라본 황매산 고원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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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봉우리 좀 봐? 저 봉우리가 주봉인 것 같지 않아? 억새꽃 뒤로 보이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멋진 모습인 걸."

정말 그랬다. 고원을 뒤덮은 억새꽃이 흐드러진 사이로 바라보이는 바위봉우리가 여간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고원 위에 올라서자 이번엔 주봉 쪽으로 뻗어 올라간 나무 계단길이 또 하나의 장관을 연출한다.

그 계단길을 따라 첫 번째 봉우리에 오르자 황매산 줄기를 따라 펼쳐진 고원지대며 산 아래 풍경이 아름답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 봉우리는 주봉 정상이 아니었다. 첫 번째 봉우리 전망대에서 산 아래 풍경을 조망하고 바위 능선길을 따라 정상으로 향했다.

주봉은 작은 바위봉우리였다. 뾰족뾰족 위험해 보이는 주봉 봉우리 정상엔 '해발 1108미터 황매산'이라 새겨진 작은 표지석 하나가 초라하다. 정상에 오른 일행들 기념사진을 찍고 곧바로 하산길로 나섰다.

등산로에 얼굴 내민 용담 두 송이
 등산로에 얼굴 내민 용담 두 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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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렇게 익어가는 황금빛 벼논
 누렇게 익어가는 황금빛 벼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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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여유가 있을 것 같았지만 느긋하게 내려가며 산과 골짜기, 그리고 가을이 익어가는 논밭 풍경에 젖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리막길에서 바라본 황매산과 주변 산들이 서서히 가을빛에 젖어드는 풍경도 추억처럼 아련하기만 하다.

능선 고원지대와 골짜기 조망이 아름다운 황매산 정상에 오르다

나무계단 길을 내려서자 억새 숲 사이로 뚫린 길이다. 그런데 길을 걷다가 하마터면 발길에 밟힐 뻔했던 보라색 작은 꽃 두 송이를 발견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풀숲에서 산길로 살짝 얼굴을 내민 더덕꽃들이었다.

다시 고원 평원에서 내려오는 길엔 듬성듬성 서있는 산딸나무들이 빨간 열매를 촘촘히 매달고 있는 모습도 이채롭다. 고원 억새숲을 벗어나는 지점에는 물이 졸졸 흘러내린다. '돌팍샘'이었다. 바가지로 물을 받아 한 모금 마시니 가슴 속까지 시원하다.

샘 바로 아래엔 작은 연못이 만들어져 있는데 샘 가운데엔 기묘한 모양의 돌 한 개가 세워져 있었다. 이 연못이 '참샘연못'이었는데 너무 작고 물고기 한 마리 없는 것이 조금은 썰렁한 모습이었다.

층층논 풍경
 층층논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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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숙인 수수이삭
 고개 숙인 수수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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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락을 내려서자 산에 오르느라 자세히 살펴보지 못한 골짜기와 마을 풍경이 정겹게 다가온다. 벌써 추수가 끝난 층층 다랑이 논배미 아래엔 모서리가 둥근 마름모꼴 벼논이 황금빛으로 화려하다.

조금 더 내려가자 골짜기를 타고 오른 십여 층의 층층논들이 위로 올려다 보인다. 작은 개울 건너 밭에는 고개 숙인 수수들이 살랑거리는 가을바람에 흔들리고, 길가에 가꿔놓은 꽃밭엔 하얀 잎들이 꽃보다 더 아름다운 백엽초 뒤로 역시 누렇게 익어가는 벼논이 환상적인 풍경이다.

"우리 서울 생활 청산하고 내려와 이 마을에 자리 잡고 말년을 보내는 게 어때?"

주변 풍경에 흠뻑 취해 내려오던 일행 한 사람이 갑자기 뜬금없는 제안을 한다. 하늘에 두둥실 떠오른 뭉게구름이며, 그 뭉게구름 아래 하얗게 솟아오른 바위봉우리가 한 폭의 풍경화 같은 모습이 이끌어낸 감상이었다.

"어? 저기 빈 집 한 채 보이는 걸, 저런 집 한 채 구입해서 우리 같이 살아볼까?"

일행의 감상이 구체화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들은 어느새 마을에 이르러 있었다. 길가엔 정말 지붕의 추녀마루가 흘러내리고 앞마루에 비료포대가 쌓여 있는 빈집이 나타났다. 창고 앞에는 녹슨 자전거 한 대가 쓸쓸하게 세워져 있었는데 마당에 수북하게 자라있었을 잡초는 누군가 말끔하게 베어낸 모습이었다.

산과 논밭 마을 할머니들의 마음까지 가을빛으로 물들어가고

백엽초와 벼논
 백엽초와 벼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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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락해 가는 빈 집과 창고앞의 쓸쓸한 녹슨 자전거
 퇴락해 가는 빈 집과 창고앞의 쓸쓸한 녹슨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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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야! 이 팥 나무 좀 봐? 콘크리트 사이에서 자라난 팥나무 한 그루가 열매를 주렁주렁 맺었네."

일행이 손짓하는 옛 마당 한구석엔 정말 콘크리트 사이에서 자란 팥이 통통하게 실한 열매를 많이 매달고 있었다.

"아니 그런데 먼저 산에 오른 사람들이 한 사람도 내려오지 않았잖아?"

버스가 서있는 정자나무 앞마당에 이르렀지만 다른 등산객 일행들의 모습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들 세 사람만 가까운 코스로 정상에 올랐다 내려온 것이다.

"이 황매산에 처음 왔능교? 대한민국 사람들이 다 다녀갔는데."

다른 사람들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며 마을회관 옆 그늘에 모여 앉아 고들빼기를 다듬는 할머니들에게 다가가자 할머니 한 분이 대뜸 묻는다. 황매산이 초행이라고 하자 하는 말이었다.

마을회관 그늘 밑에서 추석에 찾아올 자녀들에게 줄 김치를 담그려고 고들빼기를 다듬는 마을 할머니들
 마을회관 그늘 밑에서 추석에 찾아올 자녀들에게 줄 김치를 담그려고 고들빼기를 다듬는 마을 할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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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예. 명절에 내려오는 아들딸들에게 김치 담가서 줄 것잉기라예."

다듬고 있는 고들빼기를 시장에 내다 팔 것이냐고 물으니 추석에 내려올 아들딸들과 손자손녀들 먹이고 손에 들려 보낼 것이라고 한다.

"귀찮기는요, 가끔씩 찾아오는 자식들과 손자손녀들 기다리는 재미로 사는기라예."

김치를 다듬고 있던 할머니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이구동성으로 대답을 하며 눈길이 동구 밖으로 향한다. 우리 민족의 고유명절 추석을 앞둔 황매산과 골짜기 논밭, 그리고 마을 할머니들의 마음도 어느새 가을빛이 짙어가고 있었다.


태그:#황매산, #가을빛, #이승철, #억새꽃, #정자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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