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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은 평화, 문학, 경제학, 의학, 물리학, 화학 등 6개 분야에서 시상을 한다. 2009 노벨상 수상자는 모두 13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9명이 미국인이었다.
 노벨상은 평화, 문학, 경제학, 의학, 물리학, 화학 등 6개 분야에서 시상을 한다. 2009 노벨상 수상자는 모두 13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9명이 미국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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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오늘 아침에 뉴스 들었어요? 아주 놀랄 만한 소식이 있던데."

지난 9일 노벨평화상 수상자 발표가 있던 날, 나는 수업 시작 전에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그날 아침에 발표된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을 아느냐고.

호들갑스럽게 질문하는 나와는 달리 학생들은 그저 무심하게 눈을 깜박거리며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선생이 저렇게 흥분을 하는 걸까 하는표정으로.

노벨이 남긴 유언장 내용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는 노벨상위원회의 노벨 유언.
 노벨이 남긴 유언장 내용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는 노벨상위원회의 노벨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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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에게 우선 내 질문에 대한 힌트를 줬다. 이 소식은 상(prize)과 관련이 있다고. 지금이 바로 이 상의 수상자를 발표하는 시즌이라고. 그러자 미국에 산 지 10년이 넘은 에쿠아도르 출신의 루이스가 이내 내 질문을 알아차리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오바마가 노벨 평화상에 노미네이트 된 소식인가요?"
"네, 맞아요. 노벨상!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후보로 노미네이트 된 게 아니고 실제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이 되었어요."

그러자 맨 앞에 앉은 과테말라 출신의 엘사가 내게 물었다.

"미국 대통령으로 노벨상을 받는 게 이번이 처음인가요?"
"아니요, 벌써 네 번째예요. 오바마에 앞서 루스벨트, 윌슨, 카터 대통령이 받았고, 부통령으로는 엘 고어와 챨스 도우스가 있어요."

사실 남의 나라 대통령, 부통령이 노벨상을 몇 번 받았는지 내가 어찌 알겠는가. 솔직히 내가 아는 미국 대통령, 부통령 수상자는 최근의 지미 카터와 엘 고어뿐이었다. 다른 수상자 이름은 노벨 평화상 수상자 발표가 있던 날 라디오를 통해서 알았다.

그 날 아침, 나는 식사 준비를 하면서 공영방송인 NPR을 들었다. NPR에서는 올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오바마라고 말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는데 라디오에서는 계속해서 역대 미국 대통령, 부통령 가운데 노벨상 수상자들의 이름을 반복해서 들려주었다.

그런 귀동냥으로 얻어 들은 정보였다. 수업 전, 이런 얘기들을 잠시 나눈 뒤 나는 수업을 시작하려고 했다. 그런데 앞에 앉은 엘사가 다시 노벨상 얘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눈을 반짝거리면서.

"우리나라도 노벨상 받은 사람이 두 명 있어요."
"(허걱) 두 명이나?"

오른쪽이 과테말라에서 온 엘사다. 엘사는 두 눈을 반짝거리며 자신의 모국이 노벨상 수상자를 두 명이나 배출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오른쪽이 과테말라에서 온 엘사다. 엘사는 두 눈을 반짝거리며 자신의 모국이 노벨상 수상자를 두 명이나 배출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 한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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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의 조국은 중앙아메리카의 작은 나라인 과테말라다. 커피 전문 매장이나 월마트에 가면 많이 진열되어 있는 과테말라산 커피로 유명한 과테말라. 내가 과테말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질 좋은 커피와 오랜 내전 정도가 전부였다.

아, 하나 더 있다. 축구! 우리나라와도 겨룬 적이 있는 과테말라의 축구. 과테말라를 포함한 중남미 출신의 남학생들은 한결 같이 축구가 취미이거나 특기다. 그만큼 축구에 대해 열광한다.

하여간 이런 정도밖에 알고 있지 못한 내가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되는 경제 수준의 과테말라에 노벨상 수상자가 두 명이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내심 놀랐다.

왜냐하면 노벨상은 부문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서구 문화권의 선진국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계를 보니 1901년부터 시작된 노벨상 시상식에서 미국은 올해까지무려 320명이나 되는 많은 수상자를 배출했다.

사실 노벨상이라는 게 돈과 힘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 어찌 보면 선진국들만이 누리는 '저들만의 잔칫상' 같다는 느낌을 주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특히 연구에 많은 돈이 들어가야 하는 노벨 의학상이나 화학상, 물리학상 등은 후진국으로서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상이고 경제학상이나 문학상 등도 때로 힘의 논리가 지배한다는 말이 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국적별로 본 노벨상 수상자들(1901-2002). 선진국이 압도적으로 많다. 올해 노벨상 수상자까지 합치면 1위 미국은 모두 320명이다.
 국적별로 본 노벨상 수상자들(1901-2002). 선진국이 압도적으로 많다. 올해 노벨상 수상자까지 합치면 1위 미국은 모두 320명이다.
ⓒ NationMas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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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과테말라와 같은 나라에서 이미 노벨상 수상자를 두 명이나 배출했다고 하니 그들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이런 내 궁금증에 엘사는 아주 신이 나서 수상자들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댔다.

"미겔 아스투리아스와 리고베르타 멘추예요."

스페인 억양이 잔뜩 들어간 엘사의 영어 발음으로는 정확하게 수상자들의 이름을 옮겨 적을 수가 없어 다시 인터넷에서 찾아 보았다.


- 1967년 노벨 문학상 :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 중남미문학의 전통 속에서 비유와 환상이 가득한 초현실적인 세계를 그린 작가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 1992년 노벨 평화상 : 리고베르타 멘추. '마야의 여왕'이라는 애칭을 가진 멘추는 33살의 젊은 나이에 과테말라 인디오들의 인권 개선과 인종간 화합에 크게 기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아직 한 명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한 우리나라인데 지금으로부터 무려 42년 전인 1967년에 일찍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했다고 하니 새삼 엘사의 반짝거리는 눈망울이 이해가 되었다.

그렇게 갑작스레 시작된 교실에서의 '노벨상 토크'는 그 후로도 몇 분 더 계속되었다. 노벨상에 관한 자부심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는 엘사가 내게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한국도 노벨상 받은 적 있어요?"
"그럼요. 지난 2000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 분은 지난 8월에 돌아가셨어요."

역대 노벨평화상 수상자의 이름이 적힌 노벨상 위원회 홈페이지. 2000년 수상자 김대중 대통령의 이름도 보인다.
 역대 노벨평화상 수상자의 이름이 적힌 노벨상 위원회 홈페이지. 2000년 수상자 김대중 대통령의 이름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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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김대중: 한국과 동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 특히 북한과의 평화, 화해를 위해 애쓴 공로로 이 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설명이 적혀 있다.
 200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김대중: 한국과 동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 특히 북한과의 평화, 화해를 위해 애쓴 공로로 이 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설명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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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학생들에게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사실을 언급하면서 내 마음 속에 떠오른 생각은 좀 복잡했다. 마냥 기쁘지 않았다. 엘사는 중미의 작은 나라인 과테말라가 두 명이나 되는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고 자랑하고 싶어 어쩔줄 몰라 했는데 나는 그건 아니었다.

왜냐고? "김대중"이라는 이름을 내 입으로 말하면서 내 머릿속에는 김대중 대통령과 관련된 부끄러운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온 국민의 자랑이어야 할 노벨상 수상에 대해 결국 제 얼굴에 침 뱉는 식이 되고 말았던 '노벨상 로비설'을 흘린 언론과 정당, 국민들. 그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고 또한 최근에 벌어진 김대중 대통령 묘비 제막식에서의 부끄러운 퍼포먼스와 격렬한 시위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 저들도 대한민국 국민 맞는가 싶을 정도의 부끄러움과 낯뜨거움. 그런 화끈거림이 내게 있었다. 단 한 명뿐인 노벨상 수상자를 얘기하면서 이런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이 떠올라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우리는 왜 큰 인물을 지켜주지 못하는가.

엘사는 자신의 조국에 영광을 안겨 준 노벨상 수상자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으로 "미겔 아스투리아스와 리고베르타 멘추"를 여러 번 반복해서 말했다. 마치 다른 나라에서 온 학생들에게 그 이름을 각인시키려고 하는 듯 말이다.

나도 그렇게 우리의 노벨상 수상자를 자랑스럽게 말하고 싶었다. 그 이름을 말하고 그가 생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도 자랑스럽게 얘기하고 싶었다. 내 속에 꿈틀거리는 이런 부끄러움 없이 말이다.


태그:#노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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