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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참뜻을 되새기며...

 

오늘은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하얼빈에서 동양의 평화를 저해한 장본인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의로운 거사를 일으킨 지 정확히 100년이 되는 날이다. 내년은 일본이 대한제국(大韓帝國)을 강점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올해도 그러했거니와 내년에도 한일 양국에는 역사를 둘러싼 뜨거운 열기가 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 이후 100년 동안 우리는 참으로 파란만장한 역정을 걸어왔다. 물론 그 역정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2009년 8월 1일, 마침내 광화문광장이 그 장을 열었다. 물론 광화문광장이 말 그대로 '광장'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적지 않은 의문이 든다. 많은 시민들의 휴식과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과연 '광장'의 참뜻에 맞게 만들어졌고 그렇게 쓰이고 있는가에 대해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웬 꽃밭이 그렇게 넓으며, 광장이 왜 그렇게 좁고 복잡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단지 눈으로만 좁게 보이는 것 같지 않다. '광장'이 지니고 있는 참뜻은 소통과 화합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 소통이 이뤄지지도 않고 대립과 갈등만 보인다. 안타까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그랬듯 광화문광장도 이제까지 파란만장한 100년의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광화문광장의 그 역정 또한 진행형이다.

 

아무튼 광화문광장이 생김으로써 이제 우리는 대로의 가장자리에 자리한 인도를 따라갈 필요 없이 경복궁(景福宮)을 정면에서 바라보며 갈 수 있게 되었다. 광화문의 복원이 완료되면 100여 년만에 우리는 광화문을 통해 경복궁에 당당히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경복궁 답사의 참다운 시작

 

오늘날 우리는 경복궁을 답사할 때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아마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내려 국립고궁박물관(國立古宮博物館)이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하거나 경복궁 동쪽 주차장 영역에 차를 대고 현재 실질적인 입장과 퇴장의 장소로 쓰이고 있는 흥례문(興禮門)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물론 그 방법은 매우 편리하다. 그러나 그것이 경복궁을 답사하는 참다운 시작일까?

 

답사의 본질과 목적은 무엇일까? 물론 그 답은 다양할 것이다. 그래도 문화유산을 남긴 우리 선인들의 삶, 정신을 느껴보고 그들과 직접 무언의 대화를 나누어보고 싶은 생각에 답사를 한다는 답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답사의 시작은 문을 통해 도성(都城)을 들어서는 순간으로부터 아니면 적어도 광화문광장-과거 이른바 육조(六曹)거리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야만 조선의 법궁(法宮)이라는 상징을 지니고 있었던 경복궁의 당당하고 웅장한 모습을 대하며 참다운 답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광장'을 잃어버렸던 지난 100년은 경복궁의 그러한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제 우리는 '광장'을 찾았다. 정면에서 당당하게 경복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마당에 지하철이나 차를 타고 경복궁 바로 앞까지 가서 답사를 하는 것 자체가 너무 아깝지 않을까?

 

비전과 육조거리

 

광화문광장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우리는 잠시 오른쪽으로 눈길을 돌릴 필요가 있다. 교보빌딩이 보인다. 그러나 빌딩을 보고자 눈길을 돌린 것이 아니다. 그 앞의 비각(碑閣), 아니 비전(碑殿)을 보기 위함이다. 지하철을 내려 길 안내판을 보면 비각이라 되어 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엄연히 '기념비전'(記念碑殿)이라는 편액이 달려 있다. '전'(殿)이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서 이는 국왕(황제)을 위한 시설이다.

 

이것은 1902년(광무 6년) 고종(高宗)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비이다. 이 비가 지니는 의미는 결코 적지 않으나 지금은 교보빌딩에 가려 이름마저 '비각'으로 잘못 불리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광화문광장으로부터 경복궁에 이르는 길-세종로는 오늘날도 그렇지만 조선시대에도 한 나라의 중심이었던 서울, 그 가운데서도 중심지였다. 지금은 세종로라 불리지만 조선시대에 이 길의 이름은 이른바 육조거리로 불렸다. 그 폭은 오늘날 세종로에 비해서 좁았다.

 

옛 지도를 보면 이 길에는 동편에 의정부(議政府), 이조(吏曹), 병조(兵曹), 기로소(耆老所) 등, 서편에 예조(禮曹), 사헌부(司憲府),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 등 국가를 이끄는 가장 중요한 관서들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육조거리'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궁궐이 밀도 높은 역사와 정치의 현장이라는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육조거리가 지니는 비중은 매우 크다 할 것이다.

 

그러나 육조거리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였던 이 곳이 그냥 놔두어질 리가 만무했다. 그렇게 사라진 육조거리는 광화문광장의 조성사업 가운데 행해진 발굴조사를 통해 그 장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600년이라는 긴 시간의 무게를 고스란히 우리에게 드러내 보였던 것이다.

 

해치상이 뒤집어 쓴 오명

 

이제 광화문(光化門)에 이르렀다. 물론 지금은 복원공사가 한창이라 광화문을 볼 수 없다. 내년쯤 복원된 광화문을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렇게 광화문 주위를 따라 걸으면 그 좌우에 하나씩 자리한 해치상(獬豸像)을 만날 수 있다. 해태상이라 많이 불리고 있는 그것이다. 석공 이세욱의 솜씨로 만들어진 것인데, 그 솜씨가 참으로 대단하다.

 

그러나 해치상의 팔자는 참으로 기구했다. 그리고 아직도 오명을 씻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해치상을 세웠다는 속설이다.

 

정말 해치상은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세운 것일까? 그것은 속설이요 전설일 뿐이다. 속설이나 전설에는 간절한 소망, 염원이 담겨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만들어주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왜 그럴까? 우선 자리한 위치 자체가 틀렸다. 각종 문헌이나 옛 사진들이 이미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해치상이 있었던 곳은 사헌부가 자리한 즈음이었다. 다음으로 생각해볼 것은 해치상이 지닌 상징이다. 해치상은 시비곡직(是非曲直)을 가리는 법의 상징이다. 그 앞에는 노둣돌이 놓여져 있었는데, 그것은 지엄(至嚴)한 공간이니 말에서 내리라는 하마(下馬)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렇게 위치도, 상징하는 바도 틀린데, 관악산의 화기를 누른다는 따위의 전설, 속설이 맞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전설, 속설이 마치 사실인 양 이야기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답답한 일일까?

 

광화문이 걸어온 드라마틱한 길

 

1910년 일본은 대한제국을 불법으로 강점했다. 일본은 그들의 불법적이고 불합리하며 정당성이 없는 행위를 의도적으로 지워버리기 위해 대한제국 황실 사람들에 대한 철저한 이미지 조작, 왜곡과 함께 그들과 관계되는 공간을 철저하게 파괴, 변형, 왜곡하였다. 궁궐은 그 일차적인 대상이었다. 경복궁도 예외일 수 없었다. 광화문과 근정문(勤政門) 사이에 들어선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청사는 그 절정이었다. 일본은 청사를 지으면서 그 청사의 중심 축을 그들이 만든 신궁과 태평로에 맞추었다. 원래의 축보다 동쪽으로 약 4~5도 정도 비튼 것이었다.

 

1926년 청사가 완공되었고, 경복궁은 완전히 가려졌다. 그런 마당에 그 앞의 광화문은 당연히 철거 대상이었다. 그러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헐지는 못하고, 대신 광화문과 담을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부근(지금 국립민속박물관 근처)으로 옮겼다. 그나마 6·25때 폭격으로 돌 축대 위의 2층 문루는 소실되고 축대만이 남게 되었다. 이후 광화문은 1968년 다시 지어졌다. 그러나 지금 이 건물을 헐고 발굴조사를 한 뒤 다시 짓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아니! 1968년에 다시 지었다면서. 그런데 왜 40년도 채 되지 않아서 헐고 또 새로 지어?" 당연히 제대로 된 복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철근 콘크리트를 가지고 짓지를 않나, 현판을 한글로 왼쪽에서부터 쓰지 않나, 잘못된 축에 맞춰 짓지 않나,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나마 이 광화문은 문으로서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했다. 조선총독부 청사가 뒤에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청사는 없어지지 않았다. 청사는 해방 이후 미군정 청사로, 중앙청으로, 심지어 80년대에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이기까지 했다.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의 면모를 보여줘야 할 박물관 건물을 식민통치의 본산이었던 조선총독부 청사를 썼다는 것은, 그것이 불과 10여 년 전까지 그랬다는 것은 정말 생각만 해도 소름끼친 일이 아닐 수 없다.

 

1995년 광복 50주년이 되어 문민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 청사의 첨탑이 철거되었고, 1996년 완전히 철거, 해체되었다. 청사의 철거로 1990년대부터 시작된 경복궁의 복원정비사업은 한층 탄력을 받았다. 2001년 흥례문과 그 일곽이 복원되었고, 이로써 광화문을 통해 경복궁으로 당당히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대대적인 경복궁의 1차 정비 복원사업에 그 완결이라 할 수 있는 잘못된 광화문을 그냥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철근 콘크리트가 만능이던 시절, 그러나 그 만능의 재료로 만들어진 잘못된 광화문은 40년도 살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광화문광장이 열렸다. 광화문 복원이 완료되어 광장으로부터 광화문을 거쳐 경복궁으로 당당히 들어갈 날도 머지 않은 것 같다. 참으로 길고 파란만장한 역정이었다.

 

♧ 참 고 문 헌 ♧

 

이태진,「안중근-불의 불법을 쏜 의병장」,『한국사시민강좌』재30집, 일조각, 2002.

한국문화유산답사회,『서울』(답사여행의 길잡이 15), 돌베개, 2004.

한영우,『다시 찾는 우리역사』(전면개정판), 경세원, 2003.

홍순민,『역사기행 서울궁궐』,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1994.

홍순민,『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지난 수개월 전 경복궁, 창덕궁을 비롯한 서울의 다섯 궁궐을 개별적으로 답사한 뒤 그 때의 느낌을 포함하여 나름대로 정리한 글입니다. 기존에 저의 블로그나 클럽에 올렸던 글들은 물론 여러 기본적인 문헌들을 다시 참고하여 나름대로 쓴 것입니다. 대중들이 우리 궁궐이 지닌 매력을 쉽게 이해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극히 간단한 몇몇 기본적인 문헌만을 활용하여 나름대로 쓴 글임을 양해바랍니다. 이번에 가졌던 답사에서는 사진을 찍지 못했기에 지난 2008년 10월 폰카로 찍었던 몇 개의 사진을 추려 올립니다. 양해 바랍니다.


태그:#광화문, #해치상, #육조거리, #광화문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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