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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 달이 되어 가는 아기는 '엄마'와 '아빠'와 '아기'라는 말 다음으로 '아, 됐다'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참말로 이 말을 하는지 안 하는지는 알쏭달쏭이지만, 우리 귀에는 '아, 됐다'로 들립니다. 아기가 무언가 집고 싶어서 안달을 하고 떼를 쓸 때에 모른 척하고 있는데, 아기가 집어 달라는 무언가를 집어서 슬그머니 건네면, 아기는 한숨을 쉬듯 '아, 됐다' 하고 내뱉습니다.

 

엄마가 문득 읊는 소리를 듣고는 따라하는지, 그냥저냥 내는 소리가 '아, 됐다'처럼 들리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작은 키로 발돋움을 하며 무언가 집으려고 용쓰는 아기가 드디어 제 손에 무언가를 집고 나서 내뱉는 그 짧은 소리마디는 더없이 잘 어울리면서 재미있다고 느낍니다.

 

.. 내가 다닌 학교에 민주공화국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헌법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면, 대한민국 공교육의 1차적 소명은 대한민국 국민을 민주공화국의 구성원으로 형성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공교육의 현장인 학교마다 강조되어야 할 것은 민주공화국이어야 했다. 프랑스의 학교마다 그들의 국가 이념인 '자유·평등·박애'가 강조되듯이. 그러나 내가 다닌 학교에서 강조된 것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반공·방첩'이었다 … 젊은 세대들은 거의 이 사건을 모른다. 5·18광주민주화운동과 6·10민주항쟁조차도 모르는데, 하물며 보도지침사건을 배우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보도지침사건은 한국 언론사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  (16∼17쪽/홍세화, 97쪽/김주언)

 

아기는 날마다 새롭게 배웁니다. 날마다 똑같은 사람과 똑같은 집과 똑같은 동네를 보면서도 배우고, 때때로 조금 먼 동네로 마실을 가며 부대끼는 모습과 사람들을 보면서도 배웁니다. 낯선 바람을 쐬면서 배우고, 낯익은 바람을 쐬면서 배웁니다. 어느 하나 배움 아닌 이야기가 없는 우리 터전입니다. 좋은 모습을 배우는 한편, 궂은 모습을 배웁니다. 좋은 사람한테서 좋은 내음과 목소리와 생각과 삶을 살며시 배울 수 있을 테고, 궂은 사람한테서 궂은 내음과 목소리와 생각과 삶을 안타깝게도 어느 결엔가 배울 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꼭 아이를 키우는 몸이 되었기 때문에 제 둘레 터전을 더 깊이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이가 없이 어른끼리 살아가는 터전이라 하여도 '사람이 살 만'한 곳이어야 합니다. 맑은 숨과 따뜻한 햇볕을 쬘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나부터 내 이웃한테 따사로운 사람이어야 하며, 내 이웃은 둘레 사람들한테 넉넉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럴 때에야 비로소 살 만합니다. 동네는 돈에 눈먼 이들이 함부로 짓밟거나 까부수는 재개발구역이면 안 됩니다. 한 동네에 뿌리내린 채 서른 해이고 쉰 해이고 백 해이고 걱정없이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시끄럽거나 지저분한 장사꾼이 들이닥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 나라에서는 좀처럼 살 만한 터전을 찾기 어렵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이 있는 대로, 돈이 적거나 없는 사람은 돈이 적거나 없는 사람 대로, 마땅한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힘이 듭니다.

 

참말 왜 우리는 이렇게 온누리를 들쑤시면서 끝없이 재개발을 되풀이해야 할까요. 갯벌을 갯벌답게 살리고, 바다와 냇물을 바다와 냇물 그대로 살리면 안 되는가요. 논밭과 산들에 그렇게 비료와 농약을 쳐대야만 하는가요. 좀 못생기고 자그마한 능금과 배와 복숭아와 포도를 먹어서는 안 되는가요. 더 빨리 달리는 고속철도보다, 더 둘레 터전을 아늑하게 보듬으며 환경사랑을 함께하는 철도를 마련할 수는 없을까요.

 

이 나라를 지키는 길에 국가보안법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국가보안법이 없으면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생각이 몹시 안쓰러운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 법 없이 느긋하고 넉넉하고 따뜻하고 힘차고 슬기로운 삶터를 일굴 수 없는지 궁금합니다. 더 많은 돈이 없이도 얼마든지 나라를 북돋우고 살림을 북돋우며 교육과 문화와 과학을 북돋울 수 없는지 궁금합니다.

 

.. 당시에 대한 기억들은 온통 선생님들께 '개기고 기어오른 사건'들로 채워져 있다. 내심으로 선생님들을 깔보고 무시했다. 학생이라고 무시하고 때리는 사람들에게는 같은 대접을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 세상 물정에 어둡던 나는 쉬는 시간이면 맨 뒷자리에 앉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교련반대시위가 심심치 않게 벌어졌지만 나는 그냥 멀리 피해 다녔다. 행여 그쪽 가까이 지나가다가 잘못될까 두려웠고, 혹시 졸업 이후에 공무원 등으로 취직하는 데 좋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  (20쪽/오창익, 112쪽/이학영)

 

<내 인생의 첫 수업>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덜컹거리는 지옥철에서 이 사람한테 밀리고 저 사람한테 발을 밟히며 읽습니다. 밀어붙이는 사람이나 발을 밟는 사람이나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차가운 빛조차 없는 메마른 낯빛으로 아무렇지 않게 밀치고 발을 밟을 뿐입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내 옆과 뒤에서 똑같이 하는데 내가 밀치거나 밟을 밟았대서 내가 뭔 잘못인데?' 하는 뚱한 모습입니다.

 

가늘게 한숨을 쉬면서 힘겹게 책을 손에 쥐어듭니다. 모두 쉰세 사람이 저마다 당신 삶을 오늘과 같은 흐름으로 이끌어 준 '고마운 스승'이 누구였는가를 떠올리면서 다 다른 삶을 다 다른 목소리로 들려줍니다. 쉰세 사람은 모두 우리 세상을 좀더 낫고 알차고 아름다운 쪽으로 이끌고 싶어하는 분들로, 저마다 시민사회 모임에 몸을 담고 온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사회 디자이너'라고 일컬으면서 우리 사회가 제자리걸음이나 뒷걸음을 치지 않게끔 애쓰고 있음을 여러모로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쉰세 사람이 되는 다 다른 삶이지만, 다 다른 사람들 삶이 어쩐지 몹시 닮았구나 싶습니다. 하나같이 초중고등학교 적을 '즐겁게' 떠올리지 않습니다. 입시에 매이는 학생 때는 스스로를 사람답게 살지 못한 때로 떠올립니다. 대학교에 다닐 때에는 취업이라는 벽에 부딪쳐 제 밥그릇을 챙기는 쪽에 좀더 기울어져 있거나, 공장이나 시위판에 뛰어들어 '보통사람이 누구인가'를 비로소 처음 보고 느끼며 배웠다고 이야기합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금세 끝까지 읽어치웁니다. 다 읽어치운 책을 덮고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글쓴이는 모두 쉰셋이지만, 왜 한 사람이 쓴 이야기라는 느낌만 드는지 실마리가 잡히지 않습니다. 어이하여 쉰세 사람이 지내온 발자국이 마치 한 사람이 지내온 발자국처럼 보이는지 갈피를 잡기 어렵습니다.

 

.. 비판이라는 미명으로 상대를 비난하거나 험담해야 자신의 존재가 살아남는 우리 나라 운동권 문화에 익숙하던 나에게, 서로가 존중하고 배려하는 문화를 적절한 유머로 만들어 가는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하고 강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 그 과정에서 강압적이며 불합리한 결정의 뒤에 돈과 권력에 충성하는 과학기술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간파했다. 그래서 과학은 가치중립이라고 믿던 '이공계'는 인문학을 더 공부해야만 한다는 걸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  (71쪽/나효우, 149쪽/박병상)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동인천역에서 내려 어두움 깔린 길을 걷습니다. 코앞에 걷고 있는 젊은 짝꿍이 "씨발, 추워." 하고 한 마디 뱉습니다. 이제 갓 스물을 넘겼음직한 새파란 이들이 그리 춥다고 하기 어려운 이 날씨에 춥다고 하면서 "씨발"을 입에 붙입니다. 영도 밑으로 뚝 떨어지지 않았더라도 춥다고 느끼면 춥겠지요.

 

아침에 전철역으로 가는 길에서 스치는 고등학교 아이들 또한 어느 누구한테나 입에 "씨발"이 붙어 있습니다. "씨발, 아침부터 …….", "씨발, 오늘도 ……." 저녁나절 동인천역 둘레 술집거리에서 노닥거리거나 뒷골목에서 담배를 꼬나무는 고등학교 아이들 입에도 언제나 "씨발"이 매달려 있습니다. 단골로 가던 창영초등학교 앞 분식집은 이제 문을 닫고 말았는데, 이 분식집에 들어앉아 떡볶이를 먹으며 한 시간쯤 옆지기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이곳을 드나드는 초등학생과 여고생을 살펴볼 때에는 "씨발"을 입에 달던 아이는 못 보았습니다.

 

동네 탓일는지, 가게 탓일는지, 또래동무 탓일는지, 둘레에 어떤 어른이 있는가에 따라 다를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창영초등학교 앞에 있던(이 학교 바로 옆에는 여상이 있습니다) 분식집 아주머니는 어린 학생이 함부로 "씨발"을 입에 올렸을 때에 가만히 있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넌지시 타이르며 이런 말을 쓰지 않도록 이끌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때때로 떡볶이를 사는 곳이 있습니다. 대한서림과 동인서관 옆에 나란히 세 곳 붙어 있는 분식집 가운데 한 집에서 사는데, 이 분식집들을 드나드는 어린 학생이나 나이 좀 먹은 아저씨들이나, 분식집 할매한테 으레 반말을 늘어놓습니다. "할머니, 빨리 줘."라든지 "할머니, 얼마야?" 하고. 어떤 이는 '할머니'라고도 안 붙이고 그냥 반말만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이런 반말지꺼리에 딱히 대꾸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할머니는 으레 높임말을 씁니다.

 

할머니 분식집은 제가 국민학교 다닐 때에도 보았고, 옆지기와 함께 살며 딸아이를 낳은 요즈음도 봅니다. 할머니는 더 늙고 힘이 없어질 때에도 가게를 열어 놓으실 텐데, 앞으로 열 해쯤 더 이곳에서 장사를 이을 수 있지 않을까 어림해 봅니다. 그러니까, 이 할매 분식집을 찾아오는 나이 좀 먹은 이들은 당신이 학생 때부터 온 손님이요, 이제는 초등학생 아이를 데려오며 이곳을 들를 만한 때라 하겠습니다. 모르기는 모르지만, 이이들 나이 좀 먹은 이들은 학생 때부터 할매한테 말을 까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 학교옷을 입은 어린 아이들은 앞으로 나이를 좀더 먹어 서른이 넘고 마흔이 넘어 이곳을 다시 찾아온다면 그때에도 어김없이 말을 깔 테지요.

 

.. 그렇지만 중대장의 공명선거 의지는 상급자의 압력에 의해 바로 제동이 걸렸다. 거기에다 기무대 소식 보안반장까지 직접 찾아와서 "상급 라인에서는 발벗고 열심히 뛰고 있지만, 하급 라인에선 많이 '민주화'되어 여당표가 70퍼센트도 힘들 것이다. 너무 강압적으로 하지 말고 남들 하는 만큼만 해 줘라. 서신검열기로 표본조사를 하여 여당득표율이 저조할 때는 해당 중대가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라고 엄포를 놨다 … 그 대학이란 것이 이렇게 비싼 것이었구나! 대학생이란 것이 그저 합격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많은 돈을 풍덩풍덩 바쳐야 누릴 수 있는 신분이었구나! 나는 당시 이런 바보 같은 깨달음을 얻었던 것 같다 ..  (87쪽/이지문, 159쪽/김언경)

 

집에 닿아 가방을 내려놓고 씻고 아기를 안습니다. 하루 내내 아기와 함께하지 못하고 아침저녁으로만 함께해야 하는 삶이 퍽 고단합니다. 더욱이 바깥일을 한다며 서울을 오가는 길에 부대끼거나 복닥이는 사람들이 그리 따사롭거나 넉넉하지 못해, 이런 바깥물이 제 몸에 배어들어 아기한테 옮아갈까 걱정스럽습니다. 제아무리 바깥물이 어지럽고 어수선하더라도 저 스스로 제 몸과 마음을 알뜰히 간수한다면 근심될 일이 없다 할 테지만, 한 사람한테 따스함과 넉넉함보다는 성과와 돈과 이름값을 바라는 이 삶터에서 제자리와 제길을 건사하기란 만만하지 않습니다.

 

싸우고 싶지 않은데 싸우도록 내몰고, 어깨동무하고 싶은데 어깨를 내어주지 않습니다. 다투고 싶지 않은데 당신들과 같은 옷을 입지 않으면 편을 가릅니다. 따돌리기도 싫고 따돌림받기도 싫은데 당신들과 같은 자리에 서지 않으면 손가락질을 하거나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합니다.

 

오늘 우리 삶터에는 학교라 할 만한 학교가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오늘 우리 삶터는 학교 울타리 안쪽에서만 가르치고 배우는데, 울타리 안이나 밖이나 매한가지로 어지럽고 어수선할 뿐 아닌가 싶습니다. 제도권을 박차고 나와도 제도권 틀거리요, 제도권 바깥에서 힘내어 싸운다 할지라도 제도권 테두리로구나 싶습니다. 그러니까, 제도권을 비판하면서 제도권을 바로잡자고 애쓰는 쉰세 분이 쓴 토막글을 모은 <내 인생의 첫 수업>은 어쩔 수 없이 제도권 이야기에 파묻힐밖에 없고, 이리하여 쉰세 사람 쉰세 가지 삶이라고는 하나, 속살은 하나같이 어슷비슷하거나 도토리 키재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같은 목소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배움터가 못 되는 학교를 박차고 나오지 못하면, 살림터가 되기 힘든 울타리에 매이는가 봅니다. 배움터가 되는 학교를 스스로 찾아나서지 못하면, 살림터가 될 우리 세상을 일구지 못하는가 봅니다.

 

 ┌ <내 인생의 첫 수업>(두리미디어,2009)

 ├ 글 : 박원순을 비롯해 쉰두 사람

 └ 책값 : 12000원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내 인생의 첫 수업

박원순, 홍세화 지음, 두리미디어(2009)


태그:#인문책, #책읽기, #전철길, #책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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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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