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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보고 도종환은 '길의 시인'이라 불렀고, 김지하는 '삼남민족민중사상가'라 불렀다. 1985년 황토현문화연구소를 만든 뒤 20년 넘게 우리땅을 두 발로 누비는 그는 문화사학자 신정일(56)씨다. 현재 (사)'우리땅걷기모임' 이사장인 그는 지금까지 우리나라 산 400여 개를 올랐고, 8대강을 몇 번이나 걸었다. 이 땅 구석구석을 누비며 조상들이 남긴 흔적과 자연이 내뱉는 신음소리를 충실히 전달해온 신씨가 최근 <다시걷는우리강-낙동강><다시걷는우리강-영산강>(창해 간)을 잇따라 펴냈다.

 

시속 5-6km 속도로 발원지에서부터 바다 합류지점까지 강을 따라 걸으며 속내를 살핀 신씨보다 우리나라 강을 잘 알 이가 있을까. 1주일 3-4일 정도, 1년 200일 가량은 길에서 보내니 집보다 오히려 길이 편하겠다. 이와 같은 질문을 인사 삼아 드렸더니 우문을 현답으로 받아친다. 길이 곧 집이고, 집이 곧 길이란다. 길에서 태어나고 길에서 죽는 거란다.

 

종교와 철학,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강과 산을 이야기한 신정일씨와 가진 인터뷰는 즐거웠다. 25일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길이 스승, 길과 책에서 인생을 배우다

 

그는 지금껏 40권 가까운 책을 썼고, 그 중 여러 권이 베스트셀러다. 만물박사로 통하는 그가 읽었다고 짐작하는 책은 대략 몇 만 권. 한 번 읽은 책은 대부분 기억한다는 그다. 인터뷰한 날도 신정일씨 입에선 니코스 카잔차키스, 니체, 볼테르, 김지하, 앙드레 지드, 사도 바울, 카뮈와 같은 인물들과 그들이 한 말들이 폭포처럼 터져나왔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숫자조합이 모니터에 끊임없이 흘러내렸던 것처럼 아름답고 고귀한 문구들이 이어졌다.

 

박원순은 인터뷰한 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문장을 인용하는 기억력에 감탄하고, 재야사학자 이덕일은 천재라고 평가했단다. 그를 기른 것은 학교가 아닌 책과 강, 산, 길이었다.

 

전라북도 진안 섬진강변 근처 산골짝 마을이 고향인 그는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했다. 행상을 하던 어머니가 힘들게 마련한 중학교 등록금을 아버지가 두 번이나 노름으로 날리셨다. 집은 방 한 칸에 부엌 한 칸. 방문을 달 형편이 안돼 짚으로 짠 발을 대신 쓸 만큼 가난했다. 열 넷에 가출을 하고, 열 다섯엔 출가를 했다니 고단한 어린시절이 흑백사진처럼 스쳐간다.

 

얼마 전 할머니묘를 이장하기 위해 고향으로 가다 행상하던 어머니와 동무 삼아 걷던 길을 지났다.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라 눈물을 왈칵 쏟았다니 그 사연 몇 날 몇 밤 새야 온전히 들을 수 있을 듯 싶다. 걷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시절이다. 집을 나와서 정처 없이 걸었고, 남루한 옷차림 때문에 간첩으로 의심받아 잡혀가기도 했다.

 

예민한 청소년 시절 그가 빠진 것은 책이었다. 카뮈가 쓴 <시지프스 신화>와 카프카 전집을 읽었다. 명작에 어떤 작품이 언급되면 꼭 구해서 읽었다. 그는 책과 연애했다. 그가 비상한 기억력을 갖게 된 것도, 넓은 안목을 얻게 된 것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언젠가 검찰청 초청강연에서 이 대목을 강조했단다. "남이 뚫어놓은 길 걷게 하지 말고, 자식이 가장 좋아하는 걸 하게 하라"고. 길이 스승이라고 말하는 그는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대학을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해서 좋아하는 말이 도반(道伴)이다. 길동무란 뜻이다. 길 위에 서면 함께 길을 걷는 사람일 뿐 모두가 평등하단다. 길 위에 선 이들은 나이나 지위여하에 상관없이 모두가 스승이라고. <택리지>를 쓴 이중환도, <금오신화>를 쓴 김시습도 모두 길에서 사상체계를 완성했단다. 그에겐 길이 박물관이고 도서관이다.

 

신씨가 요즘 교육에 대한 문제점을 좀더 뚜렷하게 느끼게 된 것은 <다시 쓰는 신택리지>를 쓰면서다. 출판계약을 한 뒤, 원고마감은 점점 다가왔지만 한 줄도 나가지 못했다. 궁리 끝에 택리지를 다룬 석박사 논문 50여 편을 구해 읽었다. 지리전공자는 지리만, 역사전공자는 역사만 다뤘다. 모두가 자기 전공에서 한 발짝도 나서지 못한 것. 강과 산엔 지리만 있는 게 아니라 역사도 있고, 사람도 있고, 자연도 있는데, 전체를 조망해 쓴 논문이 한 편도 없었던 것.

 

그는 논문들에 실망했고, 그가 해야 할 역할을 찾았다. 신씨는 자기가 만약 대학에서 공부했다면 <다시 쓰는 신택리지>를 못썼을 거라 말한다. 조선시대 대학자들인 박제가 홍대용 김시습은 강과 산을 두루 살핀 끝에 경계를 넘나드는 백과사전파가 될 수 있었다며 틀에 박힌 요즘 학문세계를 비판했다.

 

그가 강조한 공부방법은 자득(自得)이었다. 스스로 즐기고, 스스로 터득한다는 뜻이다. 스스로 그러하라는 것. 그것이 자연이고 곧 강이란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강 이야기로 넘어갔다.

 

강이 '죽었다'고 말하는 이유... 한 번도 걸어서 전체를 둘러보지 않았기 때문

 

"강을 따라 걸을 수 있는 길을 만들자.…산길이나 다른 길과는 달리 길이 끊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한 예를 든다면 부여 부근 '지천'의 하류에는 다리가 없기 때문에 금방 건널 수 있는 길을 두 시간이 넘게 돌아가기도 했다. 영남대로가 지나는 삼랑진에서 양산의 물금까지의 길은 더했다. 길을 따라 돌아간다면 하루나 한나절을 허비해야 하기 때문에 철로를 따라 갈 수밖에 없다. KTX가 개통되기 전에 낙동강 도보답사를 갔던 길에는 철로에 귀를 기울여가지고 열차가 오지 않으면 후다닥 뛰어갔는데, KTX가 개통되고서는 그렇게 할 수조차 없었다. KTX는 소리도 없이 오기 때문에 터널 앞에서 기다리다가 KTX가 통과하면 죽기 살기로 뒤따라가 수많은 터널들을 통과해갔다."

 

그는 목숨 걸고 답사를 했다. 그가 다닌 여정을 더듬노라면 누구라도 감히 강을 봤다고 말하긴 힘들겠다. 4대강 개발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강은 그대로 두는 게 가장 좋단다. 그대로 두는 게 곧 살리는 길이라고. 그는 정부 공무원들을 데리고 여러 번 5대강 답사(4대강에 섬진강 포함)를 다녔다. 한 사무관은 "강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왜 죽었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탄식하는 말을 함께 현장답사한 공무원들 여럿에게 들었다. 대통령이 밀어붙이니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것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대통령이나 정책입안자들이 '강이 죽었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짓말일까 모르는 것일까. 신씨는 모르는 것이라고 딱 잘랐다. 걸어서 둘러본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사람이 다니는 길과 자동차가 다니는 길은 다르다고. 기껏 이재오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이 자전거를 타고 누빈 것 정도인데, 그 또한 사람이 다닌 길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대로 보진 못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신씨는 원래 우리나라 강은 배를 띄울 정도 물은 없다고 설명했다. 옛날엔 다니지 않았느냐 물었다.

 

"옛날엔 댐이 없었다. 저수지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고. 지금은 농업용수다 공업용수도 얼마나 많은가. 그렇게 빠지는 물들 때문에 강물이 없는 거다. 그래서 배가 다닐 수 없는 것이고. 옛날에도 한 번 가뭄 들면 한없이 들었다. 아마 하구언쪽 물이 찰랑이는 모습만 보고 배가 다닐 수 있다 생각하는 모양인데 일부분만 보고 전체를 못 본 거다."

 

이대로 4대강을 개발하면 어떻게 될 지가 궁금하다. 그는 "인류에게 재앙이 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강물이 살아있기 위해선 여울이 많고 유장하게 흘러야 한단다. 이미 댐과 보에 막혀 흐름이 끊어진 강은 이미 살아있는 게 아니라고.

 

돈과 관련된 문제를 짚어보자. 자연이 다소 망가지더라도 돈다발이 풀리면 사람들 삶은 좀 나아지지 않을까. 오래전 얘기를 꺼낸다. 안동댐 충주댐 섬진강댐으로 수몰된 주민들 이야기다. 섬진강댐 사람들은 평당 900원씩 보상받았다. 논 세 마지기 팔아 다른 데 가서 한 마지기 샀다. 어쩔 수 없이 서울로 가면 하층민이다. 개화도 간척지로 간 이들은 소금 때문에 농사를 포기했다. 충주나 안동댐은 평당 2천 원으로 그나마 나았지만 역시 도시에선 하층민을 면치 못했다. 고향을 버리지 못하고 댐 근처에 지금도 사는 이들은 극빈층 신세다.

 

오래전 이야기다. 지금은 보상가가 훨씬 높지 않은가. 신정일씨는 혀를 찬다. 그 돈다발 때문에 부모 자식간 의 상하고, 형제들이 등 돌리는 모습 숱하게 봤단다. 그나마 일부 얘기다. 여전히 주민에게 떨어지는 것은 별로 없고, 일자리 창출은 포클레인 창출에 머물 것이라고 어두운 전망을 내놓는다.

 

그는 강도 살고 사람도 살리는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꽤 자세하게 몇 가지를 간추렸다. 대략 다음과 같다.

 

▲우리 강을 우리나라와 세계 각국이 시행하는 국립공원 개념으로 보고 지키자. 스페인 산티아고 800km길을 걸은 사람들에게 인증서를 주는 것처럼 남한 5대강에 걸을 수 있는 길을 만들고 그 길을 걸은 사람들에게 인증서를 주자 ▲일본 규슈지방에서 지쿠고강을 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쉬는 현장 박물관 개념으로 가꾸고 지켜나가는 것처럼 남한 5대강에 한강박물관, 낙동강박물관, 금강박물관, 섬진강박물관, 영산강박물관을 만들자 ▲문화유산해설사나 숲해설가가 각 지역 문화유산과 숲을 설명하듯이 강문화유산해설사를 기르자. 강을 지키고 일자리를 만드는 일이다 ▲나루터를 복원하고 주막을 만들자. 학생들 현장체험학습과 내외국인 관광프로그램으로 쓰자 ▲영남대로 옛길인 문경새재에 옛길박물관을 만들었듯 '삼남대로'와 '관동대로'에도 박물관을 만들자.

 

전재산 4000억 원 기부한 청룽에게 우리가 배워야 할 점

 

신씨는 사람이 자연의 일부라며 사람과 자연을 한 몸으로 본다. 그는 강을 걸으면서 사람을 만났고, 사람 속에서 강을 봤다. 사람 이야기를 듣고 싶다. 기억나는 이를 물었다.

 

잠시 생각하더니 한강 어느 댐 밑에서 만난 베낭 멘 할머니 이야기를 꺼낸다. 19세에 시집간 할머니는 할아버지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시집간 1년 뒤 남조선국방경비대(해방 직후 경찰력을 보충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대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국군으로 개편)로 끌려간 남편은 그 뒤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시아버지 시어머니에 딸린 시동생은 넷. 새벽 같이 일어나 하루 종일 농사를 짓고 돌아와 시부모와 시동생 돌보면 하루해가 꼴딱 같다. 그렇게 한평생을 보냈다. 신정일씨는 가슴이 먹먹해졌단다. 그는 지금 우리가 너무 잘 산다고 말했다.

 

홍콩배우 청룽(성룡) 이야기를 꺼냈다. 청룽은 전재산 4000억 원을 사회에 내놓겠다고 약속했다. 하나 뿐인 아들에게 유산을 왜 남기지 않느냐는 질문엔 아들에게 능력이 있다면 재산이 필요없을 것이고, 능력이 없다면 헛되이 탕진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신씨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바로 이런 철학이라고 강조했다.

 

다시 철학이다. 우리에게 부족한 건 철학이고, 두루 살필 수 있는 눈이다. 4대강 개발은 철학 빈곤이 낳은 결과다. 전공과 대학에 갇혀 두루 살피지 못하는 외눈박이 사람들, 남이 바라는 틀에 갇혀 자기 행복을 돌보지 못하는 사람들, 위와 아래를 나누는 사람들, 그가 진단한 바에 따르면 어쩌면 4대강 개발인지도 모른다.

 

암울한 진단이다. 그에게 꿈꾸는 세상을 물었다. 이청준이 쓴 <이어도> <잃어버린 지평선>에 나온 샹그릴라, 정여립이 꿈꾼 대동세상을 꺼낸다. 그는 스스로도 말했듯이 어쩔 수 없는 이상주의자다.

 

"내가 동학을 좋아한다. 동학은 모실 '시(侍)'만 있어도 세상이 완성된다 했다. 해월 최시형 선생이 어느 신도집에 갔을 때다. 누군가 베를 짜고 있어 물으니 '며느리가 베를 짜고 있다'고 말했단다. 해서 '우리 며느리가 베를 짠다 하지 말고 하늘님이 베를 짠다'고 하십시오 했단다.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섬김 받는 존재가 아니라 섬기는 존재다. '섬김'만 생각하면 싸울 일 없을 거다."


영산강 - 담양에서 목포까지 남도의 눈물로 흐르다

신정일 지음, 창해(2009)


낙동강 - 태백에서 남해까지 강토의 절반을 적시다

신정일 지음, 창해(2009)


태그:#신정일, #낙동강, #영산강, #4대강, #5대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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