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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에 홀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무언가에 빠져든다는 뜻, 무언가에 미친다는 뜻, 그것이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는 뜻이 아닐까. 화투나 경마에 빠지는 것도 똑같을 것이고, 책에 홀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책에 빠져들고, 책에 미치고, 책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가 또 다른 책을 만나는 걸 뜻한다.

 

책에 홀리는 것은 화투나 경마와 같은 노름에 홀리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우리 아버지도 노름에 홀려 전답을 날린 때가 있었다. 그것들에 홀리면 패가망신한다. 하지만 책에 홀리는 건 전혀 다르다. 책 속에서 길과 인생을 만나게 되니, 책엔 아무리 홀려도 좋다.

 

최종규가 쓴 <책 홀림길에서>(텍스트 펴냄)는 그가 35살이 되기까지 어떤 책들에 홀려 살아왔는지를 밝혀놓은 책 이야기다. 책 속 그가 살아 온 뒤안길을 훑어보니,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헌책방을 즐겨 드나들었고 신문배달과 출판영업과 국어사전을 기획하는 일도 했고, 최근에는 인천 배다리 골목길에 '사진책 도서관: 함께살기'를 열기도 했다. 가히 헌책방에 있는 책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던 것 같다.

 

"1975년부터 2009년까지 두 다리와 자전거로 헌책방 마실을 즐기며 책으로 키운, 어줍잖은 삶자락을 한 올 두 올 풀어내 보려고 합니다. 귀엽게 봐주시면 그지없이 반갑겠고, 너그러이 굽어살피시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들어가는 글)

 

대학교육을 박차고 나온 건 삶속 배움에 홀려

 

그가 책과 함께 써내려간 여러 이야기들을 읽노라면, 그가 대학 교육을 박차고 나온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왜 그는 대학생활을 접은 걸까? 그건 순전히 대학 교수들 때문이다. 통번역을 꿈꾸고 2지망 외대에 들어갔는데, 네덜란드 학과 교수들은 하나 같이 앵무새 같은 수업만 해 댔고, 여학생들한테만 후한 점수를 줬는데, 그것이 죽기보다 더 싫었던 것이다.

 

그때 대학 교실을 박차고 나와서 꺼낸 책이 바로 이오덕 선생이 쓴 <삶과 믿음의 교실>이었단다. 그것은 그가 앞으로 살아갈 앞날을 밝혀준 것이기도 했다. 대학에서 단순한 이론을 되풀이 하는 것으로 시간을 낭비할 게 아니라 삶속에서 얻는 도전 정신과 그 속에서 깨우치는 참된 배움을 더 얻고자 했던 것이다.

 

더욱이 그런 삶 속에서 얻는 이야기들이야말로 어린이들한테도 눈물과 웃음을 자아낼 뿐만 아니라 할매와 할배들한테도 눈물과 웃음을 자아낼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것은 권정생 할아버지가 쓴 <몽실언니>와 이오덕 선생이 쓴 <우리글 바로 쓰기>를 통해서 확인한 바였단다.

 

헌책방에서 독일어 참고서 하나 찾다가 완전히 헌책방에 홀려

 

한 때 그는 대학진학을 목표로 제2외국어인 독일어 공부를 학원에서 익혔다고 한다. 그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통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그때 학원 선생은 학생들에게 참고서를 하나씩 구하도록 했는데, 결국 새 책방에는 없고 헌책방에서 그걸 구했다고 한다.

 

그는 그 자습서를 그곳 헌책방에서 구해 오려고 하던 그 찰나에 무언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른바 책이 그를 불러 세웠던 것이다. 달리 말해 책에 홀린 것이었다. 자습서만 가지고 나가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여러 책들이 자신들을 알아봐 달라며 소리치쳤던 것이리라.

 

그곳이 바로 인천 배다리 헌책방 골목길에 있는 여러 헌책방들이었다고 하는데, 나도 그곳을 익히 알고 있다. 왜냐하면 2002년도에 내가 살던 곳이 중구청 아래 길목에 있는 집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나도 싸고 질 좋은 책들이 그 배다리 헌책방 길목에 나란히 쌓여 있다는 것을 듣고 있던 터였고, 또 그곳에 가서 여러 책들을 사들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홀렸다던 그 소리는 나는 듣지 못했다.

 

그 시절 그 헌책방에서 그가 산 책은 안수실 소설책과 한국 현대소설 두 권, 박은식님이 쓰고 박영사에서 손바닥책으로 낸 <한국통사>였다고 한다. 그것들을 모두 6천원을 샀다고 하니 얼마나 오졌을지 능히 짐작이 간다.

 

책 홀림은 종잇장 바깥 삶을 살던 그 시절부터

 

"제가 살아오며 만나고 부대낀 사람들 이야기를 책 아흔한 권을 읽으며 받은 느낌으로 녹아들도록 적바림해 보았습니다. 제가 읽은 책은 아흔한 권이 아니라 구만천 권이라 할 수 있지만, 구만천 권이거나 아흔한 권이거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낍니다. 종잇장에 스며든 책이 있는 가운데 종잇장 바깥에서 살아 숨쉬는 책이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203쪽)

 

이 책 갈무리 부분에 나와 있는 글귀다. 그처럼 그가 쓴 여러 글들을 읽노라면 뼛속 깊이 새긴 삶과 살 속 깊이 파고든 눈물과 마음 속 깊이 뿌리내린 발자취들에 홀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그것들을 읽노라면, '기역 니은 디귿'을 배울 적부터 그림일기를 그리고 쓰던 유치원 시절, 고등학교 때 치른 시험 종이, 젊은 시절 연애편지 쓰던 그 모든 것들이 우리 모두에게 역사가 되지 않을 게 없다는 사실에 더 놀라게 될 것이다.

 

그리고 먼 훗날, 책 홀림이란 바로 종잇장 바깥에서 삶을 살던 그 시절부터 시작된 게 아니었나 하고, 새삼스레 느낄 것 같다.


책 홀림길에서

최종규 지음, 텍스트(2009)


태그:#최종규, #책홀림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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