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미실 사후 위기에 봉착한 <선덕여왕>.
 미실 사후 위기에 봉착한 <선덕여왕>.
ⓒ MBC

관련사진보기


반년 가까이 월화드라마 맹주 자리를 굳건히 지켜 온 MBC <선덕여왕>이 종영을 불과 2주 앞두고 흔들리고 있다. 한때 40%를 넘기며 무서운 기세로 치고 올라가던 시청률은 지난 50회 미실(고현정 분)의 죽음을 기점으로 30%대로 뚝 떨어져, 다시 올라가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적수가 없기는 마찬가지나 극이 종반을 향해 갈수록 힘이 떨어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선덕여왕>이 이렇게 휘청거리는 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역시 미실의 죽음이다. 미실이 쿠데타를 성공하지 못하고 자결함으로써 극에서 하차하자, 누리꾼들은 '50부작 사극 <미실>이 끝나고 12부작 사극 <비담>이 시작한다', '미실 없으면 무슨 재미로 <선덕여왕>을 보냐'면서 미실의 하차를 못내 아쉬워했다. 그만큼 미실은 시청자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미실은 악역이었으나, 또한 악역이 아니었다. 그녀는 덕만(이요원 분)과 대립하는 정치세력의 수장이었고, 사사건건 덕만을 방해하고 그녀를 궁지로 몰아넣었지만, 단지 그뿐이 아니었다. 그녀는 능히 신라를 다스릴 만한 큰 인물이었고, 뚜렷한 정치신념을 갖고 있었다. 사사로운 이익에 따라 표리부동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할 줄 아는 위인이었다.

덕만과 늘 대립하고 계책을 내어 그녀의 행사를 방해했지만, 그녀가 조언을 구하면 자상하게 다음 방도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녀는 덕만의 성장을 지켜보며 기꺼워할 줄 아는 큰 그릇이었다. 그랬기에 덕만 역시 그녀가 비록 자신의 정적이긴 하나 마음속으로 존경했고, 그녀에게 배울 점이 있다면 배우고자 노력했다. 비교하자면 염종(엄효섭 분)보다는 문노(정호빈 분)에 더 가까운 인물이었다.

왕이 된 후 더 이상 백성과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 덕만

왕이 된 덕만은 이제 더 이상 백성과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왕이 된 덕만은 이제 더 이상 백성과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 MBC

관련사진보기

문제는 여기서 비롯된다. 미실이 지나치게 매력적으로 그려졌다는 것. 그래서 주인공인 덕만보다 더 조명 받고 사랑받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미실이 죽게 되면서 이제 미실이 받던 조명까지 모두 덕만에게로 옮겨졌다. 그러나 덕만은 모든 면에서 미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처음부터 모든 게 완벽했던 미실과는 달리 그녀는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 오르면서 성장하는 캐릭터였다.

그런 그녀가 온갖 역경을 헤치고 계단의 끝까지 올라서서 왕이 되었다. 성장이 끝났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왕이 된 이후 보이는 그녀의 행보에서 시청자는 대체 그녀가 어떤 면에서 성장을 한 것인지 알 수 없게 됐다. 그녀는 공주 시절 늘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두려움'으로 백성을 다스리려던 미실과는 달리 그녀는 백성에게 '희망'을 품게 하여 그들의 힘으로 하여금 삼한통일의 기틀을 다지고자 노력했었다.

그런데 왕이 된 이후 그녀에게서는 더 이상 그런 면모를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백성을 얘기하고 희망을 말하던 그녀는 이제 손에 쥔 왕권을 신료들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권력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대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유신(엄태웅 분)과 비담(김남길 분)을 두 손 위에 올려놓고 춘추(유승호 분)의 조언을 들어가며 무게추가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그저 보통의 권력자가 되어 있었다.

자신의 참모습을 잃어버린 덕만에게 매력이 느껴질 리가 없다. 애당초 그녀에게는 미실과 같은 카리스마가 없었다. 미실은 세종(독고영재 분)과 설원(전노민 분)이 서로를 경계하고 으르렁거려도 능히 자신만의 위엄으로 그들 모두를 압도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미실이 내뿜는 카리스마에 빠져있던 시청자들이, 유신과 비담의 세력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덕만의 모습을 보며 여왕으로서의, 군주로서의 매력을 느낄 리 없다.

달리 보면, 꿈과 희망을 이야기하던 이상주의자가 현실 세계의 정치를 온몸으로 겪게 된 후, 이상과 현실의 괴리 사이에서 고뇌하다가 결국 혼탁한 현실 정치의 속으로 뛰어들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청자가 그렇게 납득하기엔 설명이 턱없이 부족했다. 덕만이 그러한 고민을 안고 고뇌하는 과정을 디테일하게 묘사했더라면 시청자는 바뀌어 버린 덕만의 캐릭터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덕만과 비담의 '러브라인'이 다소 생뚱맞게 느껴지는 것 역시 그간의 과정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덕만에게 연모의 감정을 드러내는 비담의 마음은, '사랑은 아낌없이 빼앗는 것'이란 미실의 마지막 충고를 받아들여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에서 방향을 선회해 오로지 덕만을 위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데 이르기까지,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가 되어 있었다.

생뚱맞은 덕만과 비담의 러브라인

다소 생뚱맞은 덕만의 사랑 고백.
 다소 생뚱맞은 덕만의 사랑 고백.
ⓒ MBC 화면캡쳐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덕만은 달랐다. 덕만은 지금껏 극이 종반에 이르기까지 비담에 대한 어떤 사사로운 애정도 내비친 적이 없었다. 지금껏 그녀가 비담에게 보여준 감정은 어머니인 미실을 자기 손으로 없애버려야만 했던 가혹한 운명을 지닌 그를 가엽게 여기는 것, 그리고 가장 믿을 수 있는 충복인 그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것, 이 두 가지뿐이었다. 이 중 어느 것도 사랑이나 연모의 성질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러던 덕만이 어느 날부터인가 비담의 손길에 반응하기 시작한다. 그의 손짓에 흔들린다 고백하고, 그의 토로에 눈물을 흘린다. 오직 비담만이 자신을 사람이라, 여인이라 생각한다며 비담의 마음을 받아들인다. 불과 몇 회 전까지만 하더라도 비담이 유신의 권력을 집어삼키고 왕권을 위협할까 전전긍긍했던 덕만은 어느새 평범한 여인의 모습으로 그의 품에 안겨 있다.

극 후반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 백제군과의 전쟁은 어설픈 전쟁신으로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데 실패했다. 강력한 백제군 본진과 일거에 90리를 달린다는 붉은 투구의 유군에 설원이 무너지고 주진공이 대패해 서라벌에서는 신료들의 입에서 파천까지 나오는 상황이지만, 긴장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연기자들뿐, 시청자는 긴장감을 느낄 수가 없다. 모든 상황이 어딘가 나사 하나가 풀린 것처럼 어설프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일거에 90리를 달린다는 붉은 투구와 유군의 정체가 실은 2명의 붉은 투구가 저마다 따로 유군을 이끌고 신라군을 유린한다는 사실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간단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신라군은 유신이 당도한 뒤에야 그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산비탈을 타고 굴러 떨어지는 바위덩이들은 축구공마냥 통통 튀어서 산비탈을 타고 내려오고, 그 바위를 맞은 백제 병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말을 타고 유유히 퇴각한다.

타이틀 롤인 덕만은 자기 모습을 잃고 어설픈 미실 따라잡기에 우왕좌왕하다가 생뚱맞게 비담과 사랑을 확인하고, 인물들의 캐릭터는 밋밋해졌으며, 극의 짜임새는 어설퍼졌다. 종영을 4회 앞둔 <선덕여왕>은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에 처해 있다. 한 회 한 회 이끌어가기가 버거워 보일 정도. 남은 4회 안에 비담의 난은 어떻게 그려질 것이며, 덕만은 삼한일통의 기틀을 어떻게 닦을 것인가?


태그:#선덕여왕, #고현정, #이요원, #김남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