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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파랬다. 구름은 없고 도로 끝에서 바다는 더 파랗게 반짝였다. 완도일까. 바다 끝자락에 붉은 땅이 선명하다. 3주. 제주로 이사 와 이처럼 청명한 날은 처음이다.

 

"아, 한라산!"

 

이처럼 가까웠었나. 하얀 털모자를 쓴 백록담이 손에 잡힐 듯 신비롭다. 오른쪽으론 바다가 왼쪽으로는 설산이 보이는 풍경. 중산간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한라산도 바다도 우리를 따라 달린다. 아직 다 따지 못한 귤나무까지 더해 '육지사람'인 내겐 참 이국적인 풍경이다.

 

아내와 함께 이른 '봄'을 맞으러 가는 길이다. 이사하고서 짐 정리하랴, 귤 따랴 바쁜 시간을 보내고 나서 첫 나들이인 셈이다. 제주시내로 접어들자 축제를 알리는 홍보깃발이 가로등에 기대어 펄럭인다.

 

'2010경인년 탐라국입춘굿놀이'

 

햇살을 받은 깃발이 참 싱싱하다. 운전대를 잡은 아내를 위해 안내책자를 읽어준다.

 

"탐라국시대부터 전승되어 오던 전통문화축제로서 일제강점기 민족문화말살정책에 의해 맥이 단절되었다가 그 문화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1999년 새롭게 복원되어 올해로 12회 째 맞는 제주의 귀중한 무형자산이다……… 제주목관아를 중심으로 낭쉐…, 어, 낭쉐? 낭쉐가 뭐지…?"

 

내게 제주가 이국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알고 있는 단어들만 듬성듬성 들리는 제주 말은 방언이라기보다 차라리 조상어가 동일한 어느 외국어 같다. 낯선 나라에 처음 도착했을 때 들려오는 언어들이 여행자가 비로소 먼 이국땅에 있음을 실감나게 하는 것처럼, 제주 말은 '육지사람'인 나를 설레게 한다.

 

낭쉐...나무로 만든 소

 

낭쉐라. 발음이 참 예쁘다. 중국어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들으면 프랑스어 같기도 하다. 그런데 뜻은 더 예뻐서, 나무로 만든 소. 바로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그 크고 순박하던 소의 눈망울이 떠오를 것만 같은 이름이다.

 

낭쉐는 오늘의 주인공답게 고사가 한창인 관덕정 앞마당에 있었다. 하지만 내 상상과는 달리 그이는 호랑이와도 대적할 것처럼 검고 크고 저돌적인 형상이었다. 그 옛날 탐라국왕이 몸소 쟁기를 끌고 밭을 갈며 농사시범을 보여 새봄을 열었던 풍속을 계승하여 만든 것이 '낭쉐코사'라더니, 검은 낭쉐는 제주 전역의 밭을 다 갈고도 남을 것처럼 거칠고 기운차 보였다.

 

낭쉐를 둘러싸고 금줄이 쳐있고 그곳엔 제주인들의 올 한 해 바람들이 빼곡히 달려 바람에 따라 춤을 추었다. 올 한 해 우리 가족 건강하게 해주세요. 立春大吉. 올해 수능 대박 나게. 우리 사랑 영원하길. 박길자 김승옥 만수무강…. 아이부터 아주망, 하르방까지 제각각 소원도 다양하다. 간혹 영어도 보인다. To be successful in whatever I choose to do.

 

한 할망의 손에는 소원지가 여섯 장이다. 길러낸 자식이 여섯일까. 하나하나 매다는 손길이 어찌나 숭고한 지 사진을 찍는 내가 숨 쉬기가 다 힘겨울 지경이다.

 

낭쉐 뒤편 관덕정 마루에선 입춘굿이 한창이다. '새철 드는 날(입춘)'에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새로 부임하는 1만8천신들을 모셔놓고 액을 막고 풍요를 비는 큰굿이라 한다. 휴우, 자그마치 1만8천신이라 하니, 제주는 인도에 버금가는 '신들의 고향'이라 해야겠다. 이렇게 신들이 많은데 할망의 소원 여섯 정도를 들어줄 신이 없을까 싶어, 내 마음도 풍요롭다.  

 

"어, 만화가 박재동 선생님이다"

 

이제 아내의 손을 잡고 목관아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선시대까지 제주목사가 정치를 하던 곳. 오늘은 새봄을 맞으려는 시민들로 술렁인다. 펼쳐놓은 행사도 다채롭다. 검도시범, 가야금공연, 얼굴그리기, 가훈쓰기, 다도체험, 천연비누만들기, 꼬마낭쉐만들기, 널뛰기, 떡치기, 비석치기…….

 

"어, 만화가 박재동 선생님이다."

 

선생님의 한겨레 만평을 기억하는 독자로서 우리 부부도 캐리커쳐 하나 그려볼까 하다 그만두었다. 줄은 너무 길었고, 반면 만화가 선생님들은 피로해보였다.

 

대신 천 원짜리 입춘국수를 먹으러 갔다. 작년까진 공짜였다는데, 올해엔 지방자치선거 때문에 천원을 받는단다. 매해 해 오던 건데 굳이 사전선거운동으로 볼 것까지 있을까. 툴툴거리다, 관아 옆 마당 귤나무 아래 앉아 한 사발을 후루룩 다 먹고 나선 불평이 싹 들어갔다. 

 

정말이지 제주 국수는 어디서건 다 맛있다. 담백하고 깔끔하다. 그 뿐이 아니다. 제주는 빵도 맛있다. 누구 말을 빌리자면 제주는 논농사가 힘들어 국수나 빵 같은 음식 문화가 발달한 것이라는데, 사실인 것 같다. 시내를 다니다 보면 좀 과장해서 한 집 걸러 한 집은 국수집인 것 같고, 이미 육지에서는 프랜차이즈만 남고 다 사라진 동네빵집이 제주 곳곳에 살아있었다. 

 

파란 하늘과 바다. 낭쉐와 탐라국의 입춘굿놀이. 멸치국수와 동네빵집. 오늘 하루 내 마음을 즐겁게 해준 단어들을 웅얼거리다, 아는 얼굴과 딱 마주쳤다. 그런데 아, 누구더라. 반면 상대는 너무 반갑게 알은체를 한다.

 

"똘이 호나 이신디, 요 탈굿에 나왔데호난, 그거 보레 왓수다."

 

아, 정겨운 제주 사투리. '똘'이란다, 똘. 제주의 딸들은 예쁘지 않은 이가 없을 것 같다. 그들 부부의 딸이 곧 있을 탈굿놀이 한마당에 출현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만났더라…. 지난 3주 동안 만난 사람이 많지도 않건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 모르겠다.

 

신촌리에서 감귤농사를 하는데 매년 입춘굿을 보러 나오신단다. 신촌리, 아, 경로당! 그래, 지난 주 경로당에서 봤던 분이다. 내 꽁지머리를 보시곤 '냄새가 난다며' 무슨 예술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던 그 분.

 

딸이 풍물에 미쳐 다니더니 이제 판소리를 한다고 시집도 안 가고 저 모양이라고 툴툴거리시더니, 영 싫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아저씬 딸의 공연팀에게 필요한 옛 농기구를 여럿 만들어 줬다고 하니 말이다.   

 

돌하르방 춤에서 시작한 탈굿놀이는 어느새 파종을 한 '씨하라비'를 두고 기생들이 희롱하는 장면으로 달려 나갔다. 적지 않은 관객이 둘러싼 공연마당은 잘 알아듣지 못하는 제주 방언들이 쏟아지고 '와아' '까르르르' 탄성과 웃음이 이어졌다. 

 

이방인 같았다. 간혹 관객들 사이에 끼어있는 외국인처럼, 터져 나오는 낯선 언어에 에워 쌓인 나도 먼 나라의 여행자 같았다. '똘내미'가 방금 나왔다 들어간 기생탈 중에 한 명이었는지 노부부는 공연마당을 빠져나갔다. 우리도 그만 자리를 떴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곳 제주에 사는 동안 내내 여행자로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루하루가 늘 새롭고 설레는 여행자.     

덧붙이는 글 | 양학용 기자는 결혼 10년째이던 해에 아내와 함께 길을 떠나 967일 동안 세계 47개국을 여행하고 돌아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를 썼습니다. 현재는 제주도에서 시골살이를 하며 초등 교사가 되기 위해 늦깍이 대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wetravelin


태그:#제주도, #입춘굿놀이, #소원지, #길은사람사이로흐른다, #탈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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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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