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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는 지난 2년, 길게는 지난 5년 동안 영리병원과 의료민영화정책에 대한 사회적 논란과 갈등이 있어왔다. 이 과정은 의료민영화정책을 반대했던 사람들에게도 힘든 시간들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 사회가 얻은 결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무엇보다 우리는 '의료의 공공성'이라는 가치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의료가 단순히 상품처럼 거래되어서는 안 되며 국민 모두에게 평등한 의료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 사회적 공감대가 넓어졌다.

 

이와 함께 건강보험제도가 불충분하고 불완전하지만 평등한 의료를 위해 꼭 필요한 제도라는 사실을 국민 모두가 공감했다. 의료민영화정책을 통해 현재 건강보험제도를 천천히 그 기반에서부터 뒤흔들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장성을 획기적으로 강화하여 건강보험을 실질적으로 국민 의료비 부담을 줄여주는 제도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국민의 요구를 재확인할 수 있었다.

 

의료민영화 논란은 또한 한국의료의 적나라한 현실을 국민들에게 알리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정부 역시 의료민영화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조차 정부 자료를 공개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 결과 국민들을 위해서 선진화해야 할 의료분야가 무엇인지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산부인과 병의원 없는 시군구 27개

 

<OECD 건강 정보>(Health Data 2009)에 의하면 2007년도 우리나라의 총 병상 수는 인구 천 명당 9.3병상으로 OECD 회원국의 평균 총 병상 수 5.4병상보다 많다. 이 중 급성기병상수(응급 입원환자용 병상)는 인구 천 명당 7.1병상으로 OECD 회원국 평균 3.8병상에 비해 3.3병상 더 많아 현재 민간소유 의료기관이 급성기병상 위주로 투자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지표는 우리나라 급성기병상은 과잉공급/투자가 된 상태임을 보여준다.

 

반면, 2009년 12월 '투자개방형병원 도입에 관한 정부 용역보고서'를 보면 민간이 주도하여 의료기관 공급이 이루어진 결과 지역별, 영역별 불균형과 필수공익의료의 공백이 심각한 상황이다. 산부인과 병의원이 없는 시군구가 27개소이고, 산부인과 병의원이 있으나 분만시설이 없는 시군구가 11개소나 되었다.

 

응급진료의 경우는 더 심각한데 총 243개 시군구 중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없는 시군은 '09년 6월말 기준으로 군지역 57개를 포함 총 93개 지역이었다. 여기에는 서울의 강북구, 금천구를 비롯하여 부산의 동구·북구·영도구·중구·해운대구·사하구·금정구·강서구·사상구, 대구의 서구·수성구, 인천의 연수구, 경기 수원 권선구, 과천시, 하남시 등이 포함되어 있다. 장애인치과진료의 경우 전국 1만3918개 치과의료기관 중 2.6%인 367개 의료기관만이 장애인 치과진료에 참여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한국의료 현실에서 병의원의 영리화를 더 촉진하고, 대도시, 수도권 중심의 급성기 치료시설을 더 늘리는 것은 의료선진화가 아니다. '공적투자'를 통해 건강보험 보장성을 높이고 동시에 필수공익의료의 지역별, 영역별 불균형과 공백을 해결하는 것이 국민들이 원하는 의료선진화인 것이다.

 

의료민영화, 정부는 배운 것이 없네

 

현 정부는 작년까지 의료민영화 논란을 통해 배운 것이 없는 것 같다. 1월 15일 제주도 의료특구내 영리병의원을 전면 허용하는 '제주특별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것을 시작으로 연초부터 또다시 의료민영화정책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정부의 계획을 살펴보면 2월말에는 의료법 개정안이 국무회의 의결 후 국회 상정될 예정이다. 또한 이미 개인질병정보를 민간보험사가 자유롭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된 보험업법 개정안이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논의 중이며, 경제자유구역 내 허용된 외국영리병원의 특혜를 보장하는 '경제자유구역의 외국의료기관 등 설치·운영에 관한 특별법'(이하 경제자유법)이 국회 상임위에서 논의 중이다. 이어 의료채권법이 4월 국회 복지위 전체회의에 상정 논의될 예정이다. 이처럼 올해 의료민영화 논란은 이제 국회로 넘어오고 있다.

 

주요 법안 내용을 좀 더 살펴보겠다. 먼저 제주특별법 개정안이다. 그동안에는 투자개방형병원이라면서 허용자본에 대해서도 제한을 둘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개정안의 내용은 상법상의 모든 회사가 모든 종별의 의료기관을 개설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의료기회사, 제약회사, 민간의료보험사의 투자자도 참여할 수 있도록 전면 허용을 한 것이다. 이러한 영리병의원에서 행해질 진료 행위가 과연 의료기회사, 제약회사, 민간의료보험사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 법안에는 이와 함께 제주도 의료기관의 방송광고를 전면 허용하였다. 의료광고는 의료공급자의 일방적 홍보로서 의료소비자에게 적절한 의료정보를 제공하기보다는 특정 의료정보만을 집중 제공한다. 결과적으로 과장 광고가 되거나 또는 불필요한 의료서비스 소비를 조장할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이와 함께 의료광고에 들어간 비용은 그대로 의료비에 포함되어 의료소비자의 부담이 더 커질 것이다. 

 

이와 함께 의료채권법 제정안이 국회 상임위에 계류 중이다. 이 법안은 비록 병원 운영권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주식'형태는 아니지만, 채권 형태로 자기자본의 4배까지 외부 자본 도입을 허용하는 법안이다. 문제는 채권발행을 통해 확보된 외부 투자금을 기존의 비영리병원이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이다. 부족한 필수공익의료를 확충하고 지역별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민간 비영리병원이 과연 나설 것인가.

 

원격의료, 돈 있는 환자에게만 편리하다

 

필자는 오히려 '수익'을 위해 수도권, 대도시의 급성기병상을 확충하고, 치료 위주의 검사장비와 병원시설을 늘릴 것이라 예상된다. 이 경우 병원 간 경쟁은 더 심화될 뿐만 아니라 외부 투자금에 대한 배당 등을 고려할 때 중소병원은 더 많은 수익을 확보해야 하고 결과적으로 더 영리적 의료행태를 취하게 될 것이다.

 

2월말 정부발의 예정인 의료법 개정안도 우려스러운 점이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은 병원경영지원사업을 의료법인의 부대사업으로 허용하는 것으로서 이는 의료민영화정책을 줄기차게 추진하는 기획재정부 관료들이 토론회에서도 강조하는 내용이다. 이 외에도 의료기관의 합병절차를 새로이 마련하였는데, 이에 따라 의료기관 사이의 M&A가 사실상 가능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의료법 개정안의 또 다른 이슈는 '원격의료'이다. 원격의료는 환자가 직접 의료기관을 방문하지 않더라도 정보통신기술을 이용하여 진료를 보고 처방을 하는 것이다. 정부는 이번 의료법 개정을 통해 만성질환자의 경우 원격의료를 통해 직접 진료와 처방까지도 가능하도록 할 예정이다. 대병원, 명의를 선호하는 풍토가 있는 한국에서 아마도 일부 환자들은 1차의료기관을 거치지 않고 직접 대병원의 원격의료를 이용하려 할 것이고 이는 1차의료기관의 붕괴를 초래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환자에게는 편리한 것인가. 편리하다. 단, 경제력 능력이 있는 환자에게만 그렇다. 원격의료를 이용하려면 고가의 진단장비를 구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소득층 환자의 경우 대병원 원격의료를 이용할 엄두는 내지 못하면서 동시에 가까운 1차의료기관이 몰락하는 데에 따른 부정적 영향은 저소득층 환자에게 집중될 것이다. '진료행위'로서 원격의료를 전면화하는 것에 대한 기술적 어려움 및 의료적 난점들은 또 다른 문제로 남는다.

 

이제 곧 생명이 충만할 희망의 봄이 온다. 그런데 국민건강권을 지키고 의료민영화를 막아내려는 사람들에게 올해 봄은 다시 한 번 국민들을 믿고 '반대'의 힘을 모아야 할 때인 것 같다. 의료민영화를 시민들과 함께 막아내고 완전한 의료보장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향한 희망을 꿈꾸는 봄을 만들어보자.

덧붙이는 글 | 임석영 기자는 전문의이며, 행동하는의사회 대표입니다.  


태그:#의료민영화, #제주영리병원, #영리병의원, #의료법, #의료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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