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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주의 땅' 다듬기를 하면서

 

.. 그 당시의 나에게는 오랫동안 연어 통조림을 먹고 하루 종일 전차를 타며 지내던 끝에 발견한 안주의 땅이었다 ..  <유모토 가즈미/양억관 옮김-고마워, 엄마>(푸른숲,2009) 19쪽

 

"그 당시(當時)의 나에게는"은 "그무렵 나에게는"이나 "그때 나에게는"이나 "그즈음 나에게는"으로 다듬습니다. '하루 종일(終日)'은 '하루 내내'나 '하루를 온통'으로 손보고, '발견(發見)한'은 '찾은'이나 '찾아낸'으로 손봅니다.

 

이런 낱말이며 저런 말투이며 그대로 둔다고 해서 크게 나쁘다거나 얄궂지는 않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써도 사람들은 알아듣고, 저렇게 써도 아이들은 읽습니다. 이 글이 아이들이 읽는 책에 적힌 글이기에 좀더 곰곰이 헤아리고 한 번 더 찬찬히 돌아보면서 가다듬어야 하기는 하지만,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분들은 아이들 눈높이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아이들이 읽는 책이라 하여 '아이들이 알아들을 만한 말'이 어떠한 높낮이인지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이들한테 어려울 뿐더러 알맞지 않기까지 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 분 가운데 '어차피 아이들도 나중에는 그런 말을 배우며 살아야 하지 않느냐'고 이야기하는 분이 있습니다. 어른들이 쓰는 말이 얄궂든 잘못되었든 까다롭든 말썽이 있든 '이 나라에서 살아가자면 알아야 한다'고들 합니다.

 

그러니까, 이 나라에서 살아가자면 대학교도 나와야 하고 회사원이 되기도 해야 하며 유행도 따라야 하고 자가용도 굴러야 하며 뭣도 해야 한다는 …… 이런저런 목소리에 따라서 썩 옳지 않은 말마저 그대로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는 투입니다. 이리하여 몇몇 신문이 앞장서서 외치는 '초등학교 한자 교육'이 또다시 불거집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 자연스레 한문을 가르치고 배우는데, 초등학교부터 아이들한테 지식쌓기만 하려는 셈이라고 할까요. 중학교부터 영어를 배운다 한들 '늦을 까닭'이 없는데 아이들한테 어린 나날부터 머리속에 지식만 가득 채워 버린다고 할까요. 아이들 마음이 무르익을 무렵에 아이들 마음이 싱그럽고 착하고 넉넉하고 따사롭도록 이끌기보다, 아이들 마음밭에 벌써부터 시험과 경쟁을 집어넣는 어른들이라 하겠습니다. 아이들 몸이 무럭무럭 자라는 때에 아이들 몸이 튼튼하고 씩씩하면서 이웃을 두루 살피고 아낄 줄 알도록 끌어안기보다, 아이들 몸뚱이에 사랑과 믿음을 깃들도록 돕지 못한다고 하겠습니다.

 

우리한테는 지식이 지나치게 넘치고, 우리한테는 정보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한테는 사랑이 지나치게 없고, 우리한테는 믿음이 너무나 얕습니다. 우리한테는 참다운 넋이 지나치게 낮고, 우리한테는 아름다운 얼이 너무나 모자랍니다. 우리한테는 슬기로운 줏대가 지나치게 여리고, 우리한테는 싱그러운 깜냥이 너무나 말라비틀어져 있습니다.

 

 ┌ 안주(安住)

 │  (1) 한곳에 자리를 잡고 편안히 삶

 │   - 농촌에서의 안주를 꿈꾸다

 │  (2) 현재의 상황이나 처지에 만족함

 │

 ├ 안주의 땅이었다

 │→ 쉴 만한 땅이었다

 │→ 걱정없는 땅이었다

 │→ 지내기 좋은 땅이었다

 │→ 마음을 놓는 땅이었다

 └ …

 

'안주하는' 삶을 썩 안 좋게 바라보는 세상 흐름입니다. 옳지 못한 매무새대로 눌러앉는다면 썩 안 좋다고 할 만합니다. 옳은 매무새라 할지라도 그대로 눌러앉는 매무새란 고인 물이 될까 걱정스러우니 썩 안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매무새가 여러모로 아쉽고 허술하다 하여도 기쁘게 받아들이면서 하루하루 즐거이 가다듬으면 좋습니다. 우리 살림살이가 가난하든 모자라든 언제나 흐뭇하게 껴안으면서 이웃하고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면 됩니다. 따지고 보면, 스스로를 사랑하고 믿는 매무새가 참다운 '안주'라 할 수 있습니다. '눌러앉기'라 할는지 모르지만, 올바른 '눌러앉기'라 한다면 고인 물이 썩은 물이 되도록 가만히 있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올바르게 가다듬는 매무새요 알맞게 추스르는 몸가짐이라 한다면, 설 때에는 서고 뛸 때에는 뛰며 흐를 때에는 흐르고 멈출 때에는 멈출 줄 안다고 느낍니다.

 

이러는 가운데 내 넋과 얼을 알맞게 다독이고, 내 넋과 얼을 알맞게 다독이듯 내 말과 글을 알맞게 다독입니다. 내 넋과 얼을 올바로 다스리고, 내 넋과 얼을 올바로 다스리듯 내 말과 글 또한 올바로 다스립니다.

 

사람으로 살아가는 바른 길을 찾으면서 사람으로 살아가는 바른 넋을 품습니다. 사람으로 살아가는 바른 넋을 품을 때에 사람으로 살아가는 바른 말을 헤아립니다. 사람으로 마주하는 바른 삶을 느끼면서 사람으로 마주하는 바른 얼을 붙잡고, 사람으로 마주하는 바른 얼을 붙잡는다면 사람으로 살아가는 바른 글을 시나브로 사랑할 줄 알 테지요.

 

 ┌ 쉼터였다

 ├ 쉴 자리였다

 ├ 보금자리였다

 └ …

 

초등학교 아이들한테 '安住'라는 한자말을 가르치거나 '安'과 '住'라는 한자 지식을 외우도록 하는 일이 얼마나 흐뭇하거나 보탬이 될는지 궁금합니다. 중학교에 들어가거나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아이들한테 이러한 한자말을 상식처럼 알고 쓰도록 하는 일이 어느 만큼 즐겁거나 도움이 될까 궁금합니다.

 

제가 지난날 한자를 배우고 한문을 익힐 때뿐 아니라 오늘날 아이들한테 한자 지식을 집어넣으며 한자능력시험을 치르도록 하는 흐름을 돌아보면, 우리 어른들은 언제나 아이들한테 우리 말은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安'과 '住'를 따로따로 가르치는 한편 두 한자를 더한 '安住'를 가르칠 뿐, 우리 옛사람이 우리 말로는 '느긋하게' '살다'로 이야기하고 있었음을 가르치지 못합니다. '느긋하다'란 어떤 삶이요, '느긋하다'와 이어지는 '걱정없다'와 '좋다'와 '넉넉하다'와 '한갓지다'와 '즐겁다'와 '푸근하다'와 '흐뭇하다'를 다루지 못합니다. '살다'와 함께 '살아가다'와 '지내다'와 '보내다'를 다루지 못합니다. 그리고, '사는 터'를 아울러 '삶터'가 태어나고 '쉼터'로 가지를 뻗으며 '만남터'와 '어울림터'가 나오는 한편, '좋은터(좋음터)'나 '즐거운터(즐거움터)' 같은 말마디를 우리 깜냥껏 빚을 수 있음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안식처(安息處)' 같은 한자말이 없어도, 새들이 트는 집을 일컫는 '둥지'와 '둥우리'와 '보금자리' 같은 낱말로 우리들 사랑스러운 집을 일컫고 있었음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 하루 내내 전차를 타며 지내던 끝에 찾은 쉴 자리였다

 ├ 하루를 온통 전차에서 지내던 끝에 찾아낸 쉼터였다

 ├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차에서 지내던 끝에 만난 보금자리였다

 ├ 온 하루를 전차를 타며 지내던 끝에 알게 된 둥지였다

 └ …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 머리가 나빠질까 걱정합니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이 세계 경쟁 시대에서 살아남지 못할까 근심합니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이 나중에 일자리를 못 얻고 갤갤댈까 끌탕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무슨 꿈을 품는지 살피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너르고 깊이 온갖 꿈을 품도록 길을 열어 주지 않습니다. 대학교를 나와 회사원이 되는 일만을 아이들 꿈이 되도록 할 뿐이고,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로 키우는 일이 그 다음 꿈이 되도록 할 따름입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말다운 말을 옳게 배우는 데에는 마음을 쓰기 어렵습니다. 이런 판에 아이들이 서로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밭을 일구며 따뜻하고 넉넉한 마음결에 따라 말을 나누고 글을 주고받는 터전을 일구는 데에는 마음을 쏟기 힘듭니다.

 

우리 아이들한테는 일찌감치 가르치는 영어나 한자보다 제대로 가르치는 우리 말글이 먼저일 텐데, 우리 아이들은 예나 이제나 우리 말글을 제대로 배우는 적이 없습니다. 이 나라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우리 말글을 알맞고 바르게 가르치는 적이 한 번도 없고, 학교에서도 알맞고 바른 말글을 알차게 가르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아이들한테는 우리 말글을 올바르고 슬기롭게 가르칠 노릇이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 아이들한테는 우리 말을 우리 말답게 보살피면서 가르치는 매무새가 되어야 하고, 우리 글을 우리 글답게 돌보면서 물려주는 몸가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에 앞서 어른들부터 우리 말글을 올바로 배운 적이 없습니다. 아이들에 앞서 어른들부터 우리 말글을 차근차근 익힌 적이 없습니다. 우리 어른들이 학교를 다니던 지난날에도 우리 말글은 늘 뒷전이었고, 우리 어른들이 학교를 마치고 사회에서 일자리를 얻은 뒤에도 우리 말글은 늘 구석에 처박혀 있습니다. 우리 어른들이 아이를 낳아 기르든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든, 우리 어른들은 우리 말글을 튼튼하고 싱그러이 어루만지거나 새롭게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한테 일찍부터 한자를 가르치려는 어른들이 되기 앞서 어른들 스스로 우리 말글을 참답고 올바로 익히고 삭여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우리 어른들부터 먼저 옳고 바른 매무새를 기르고 아름답고 착한 마음밭을 가꾸며 따뜻하고 너른 몸가짐으로 튼튼한 넋을 일구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배워야 할 사람은 아이들보다 어른들입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태그:#-의, #토씨 ‘-의’,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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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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