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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가 지나면

 

예로부터 "'우수'가 지나면 대동강도 풀린다"고 할 만큼 추위는 물러나고 봄이 곧 온다고 한다. 지난 겨울은 예년에 없이 춥고 눈도 많이 내렸다. 언론들은 다투어 100년 만에 강설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사실 겨울은 겨울답게 추워야 하고 눈도 많이 내려야 한다. 그래야 다가오는 봄이 풍성해지는 것이다. 아마도 올 봄에는 가뭄 걱정은 별로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난 겨울 내내 매우 바쁘게 한 철을 보냈다. 지난 초겨울 안중근 장군의 뒤를 쫓아 속초를 출발하여 러시아의 연해주인 크라스키노, 슬리비얀카, 블라디보스토크, 뽀그라니치나야를 경유하여 중국의 수분하, 하얼빈, 채가구, 장춘, 대련을 거쳐 당신께서 순국한 여순까지 대장정을 열흘 동안 배로 열차로 답사하고서는 그 답사기를 쓰느라 골몰했다. 오는 3월 26일이 안중근 장군 순국 100돌이라 그때까지 책을 펴내야 하기에 출판사의 원고마감 일에 쫓겨 밤낮없이 강행군으로 눈병이 날 정도였다.

 

그 일이 끝나자 체액을 다 쏟은 누에처럼 몸도 마음도 텅 빈 듯하다. 이럴 때는 여행처럼 좋은 게 없다. 그래서 어제(2월 18일) 눈발이 휘날리는데도 언젠가 꼭 한번 태백선 열차를 타고 강릉을 가고 싶었던 소망도 풀 겸 원주에서 오전 8시 59분에 출발하는 강릉행 1631호 열차에 올랐다.

 

카지노도시로 변한 탄광촌

 

차창 밖에는 계속 눈발이 흩날렸다. 10: 45, 도착한 역의 이름이 '예미(禮美)'다. 이름이 아주 예쁘다. 알고 보면 이름만 아니라 예절이 아름다운 고장이 아닐까? 이 아름다운 눈길에 열차는 텅 비다시피 승객이 별로 없었다. 여객전무는 도착하는 역마다 내려 승객의 안전 승하차를 돕고는 출발 신호를 보냈다.

 

11:15, 지난날 탄광지대로 이름을 날렸던 '사북', 11:25에는 고한역에 머물렀다. 이곳을 지나면 역 일대는 온통 저탄장으로 온 마을도 탄가루에 묻힌 듯 시커멓게 물든 듯했는데 지금은 강원랜드가 들어선 탓인지 온통 무슨 무슨 호텔이네 모텔들이 울긋불긋 들어섰다.

 

탄광촌이 카지노도시로 변해 버렸는데 애초 탄을 캐던 광부나 그 가족을 위한 정부시책이 못된 토호들이나 카지노업자들의 배만 잔뜩 불리게 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전국에서 팔자 좋은 이들이 다 모여 개중에는 많은 이들이 신세 망치고 떠나는 곳이라고 하니 어찌 보면 하늘은 참 공평한 것 같기도 하다.

 

 

 

하늘의 뜻

 

11:35, 추전 역 한 모퉁이에는 아직도 저탄장이 있었다. 지금은 가스에, 전기에, 기름에, 밀려난 단지 서민들에게만 사랑을 받는 천덕꾸러기 연료이지만, 우리나라 산림 녹화에 크나큰 공헌을 한 연탄이다. 어느 하루 서울 명동 한복판에 막장에서 석탄을 캐던 차림 그대로 정부의 연료정책에 항의하는 광부들의 무언시위를 본 적이 있다. 우리 집은 서울 종로구에 살았지만 1990년대말까지 연탄을 뗐던 나에게는 매우 친숙한 연료다.

 

11:40, 태백을 지나는데 한 아파트 주차장에는 승용차들로 가득 찼다. 이제는 전국 어디나 집집마다 다들 승용차를 한두 대 굴리는 부자가 되었지만 그래도 백성들은 못살겠다고 아우성이다. 아마도 상대적 박탈감 때문인가 보다. '고사리' '하고사' '마차리' 조그만 간이역 이름이 정겨웠다.

 

산비탈에 나무들이 잔뜩 눈덩어리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 가운데 몇 그루는 눈을 이기지 못한 듯 가지가 부러지거나 밑동부터 쓰러져 마침내 수명을 다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뜻이 아닐까? 사실은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명들은 적당한 때에 가줘야 한다. 가지 않으면 하늘이 벌을 내려서  떠나게 한다.

 

12:25, 흥전역과 나한정역으로 가는 철길은 고지대로 바로 아래에 또 다른 철길이 보였다. 차내 방송은 바로 그 길로 열차가 뒤로 달린다고 친절히 알려주었다. 옆자리 여객전무는 이를 스위치백(Swich Back) 철길로, 열차가 고산지대에서 앞뒤 지그재그 형으로 달리는, 우리나라 유일한 곳이라고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봄기운이 환연한 정동진 바다바람

 

12:40, 신기역을 지나자 그동안 여우 날씨로 강설과 맑음을 반복하던 날씨가 쾌청해졌다. 참 아름다운 강산이다. 내 조국 산하의 아름다움을 모른 채 신혼여행 부부도, 골프채를 든 졸부들도 온통 해외나들이다. 이따금 나에게 주례를 부탁하러 온 제자들에게 나는 신혼여행은 가능한 국내로 하라고 권장한다.

 

몇 해 전에 고3 때 같은 반이었던 두 제자가 결혼하겠다고 찾아왔기에 그렇게 권했더니 착하게도 내 말을 듣고는 강원도 고성에서 부산 해운대까지 일주를 하고 돌아와서 "참 좋았습니다"라고 인사했다. 하기는 밀월여행에 좋지 않는 곳이 어디 있겠는가.

 

 

 

 

13: 09 동해역에 닿았다. 눈이 부신 동해바다가 펼쳐졌다. 계속 눈을 동해바다에 두는 새 13: 35. 정동진역에 닿았다. 열차에서 내려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심호흡을 하고는 부지런히 카메라에 담았다. 바닷바람이 부드러웠다. 봄기운이 환연했다.

 

13: 50, 정시보다 5분 늦게 종착역에 닿았다. 곧장 시내버스를 타고 주문진 항으로 가서 펄떡이는 생선을 즉석에서 떠서 모처럼 입을 즐겁게 한 뒤 한계령을 넘고자 양양으로 달렸다.

 

16:40, 양양에서 한계령을 넘어 춘천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한계령을 넘는데 언저리 경치가 그야말로 "선계(仙界)인지 불계(佛界)인지 인간(人間, 인간세상)이 아니었다"라는 선인의 시구 그대로였다. 한계령 나무들은 모두 눈꽃을 피웠다. 이를 '수빙(樹氷)' 이라고 한다.

 

늦은 밤 내 집으로 돌아와 뜨거운 물에 몸을 닦은 뒤 잠자리에 들었다. 꿈같은 하루였다.

 

 

 


태그:#정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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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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