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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돌섬(용섬) 앞 움푹 들어간 작은 해변 터에 두 채의 집이 보이는데 산 아래 집이 우리의 보금자리다. 멀리 보이는 섬이 나로도(고흥 마복산에서 바라본 풍경)
 바닷가 돌섬(용섬) 앞 움푹 들어간 작은 해변 터에 두 채의 집이 보이는데 산 아래 집이 우리의 보금자리다. 멀리 보이는 섬이 나로도(고흥 마복산에서 바라본 풍경)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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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전남고흥 땅에 평생 살고지고 할 보금자리를 마련해 이삿짐을 옮기고 아이들을 전학시켰습니다. 이삿짐 정리를 대충 마치고 전화선은 물론이고 인터넷 선도 들어오지 않은 바닷가 오지에서 이제 겨우 컴퓨터 앞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터를 구하기 위해 지난해 봄부터 공주에서 고흥까지 장장 3시간 40분 거리를 열 차례 넘게 들쑤시고 다녔습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무연고지에 터를 잡기까지 6개월 동안 보름에 한번 꼴로 뻔질나게 오고 갔던 것입니다.

전남 고흥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기까지

처음에는 부동산을 통해 싼 땅을 기웃거려 보았습니다. 하지만 원하는 땅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갈아 먹을 농지와 아내의 민박집 조건까지 맞아 떨어져야 했기 때문에 싼 땅을 입맛대로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부동산에서는 본래 땅값보다 1~2만 원 높게 흥정을 붙여왔고 풍경 좋은 곳은 이미 대처 사람들이 땅값을 올려놓았습니다. 

결국 부동산 소개를 포기하고 혼자서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흥 바닷가 시골 마을 곳곳을 누볐습니다. 반농반어를 할 수 있는 적지를 찾아 다녔습니다. 바다를 옆에 끼고 있는 볕 좋고 산세 좋은 마을에 무작정 발길을 멈춰 동네 어르신들을 만났습니다. 바닷가에서는 기본 찬거리를 해결해 줄 수 있고 경치 좋은 곳은 민박집으로, 볕 좋은 곳은 농사짓기에 더할 나위 없는 호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생면부지의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면 가감 없이 속사정을 있는 그대로 죄다 털어 놓았습니다. 혹 투기꾼인가 싶어 곁눈질로 보는 어르신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친절하게 내 속심을 받아 주었고 상세한 정보를 내주었습니다.

마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어느 정자나무 아래에서 만난 할아버지에게는 살아온 얘기를 두 시간 넘게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첫 만남에 삶의 이력을 주절주절 늘어놓고 있는 내게 '별 싱거운 놈 다보겠네'라는 표정으로 그랬습니다. 

"첨보는 사람인디, 어디 가서도 살아온 얘기를 고렇게 다 하는 갑소?"

어딘가 시골길에서는 소달구지를 타고 가는 노부부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사진 좀 찍어두 돼유?"
"찍어요 찍어, 지난번에는 방송국에서도 찍어 갔는디…."

할머니는 수줍은 새색시처럼 고개 숙이고, 할아버지는 껄껄 웃어가며 자랑스럽게 우마차를 몰았습니다.

지난 여름 끝자락 집 터를 구하러 다니다가 소 달구지를 타고 밭일 가는 노부부를 만나기도 했다.
 지난 여름 끝자락 집 터를 구하러 다니다가 소 달구지를 타고 밭일 가는 노부부를 만나기도 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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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왔소?"
"공주에서요."
"공주요? 충남 공주라구요, 아이고 이 뭔디까지 뭔 일로 왔소 이."
"혹시 이 동네 농사짓고 살만한 땅이나 빈집 나온 거 있나 해서유."
"여그요, 여긴 땅 나온 거 없는 갑소."

또 어느 마을에서는 내 손을 이끌고 논 가운데로 안내하던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논길을 걸으면서 공부 잘하는 아들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우리 막내가 공주대학교에 다니는디요."
"그래요?, 제가 공주에서 왔는디."
"이 땅 좀 팔았음 쓰건는 디요. 그놈이 요번에 대학원에 들어 갔는디, 아직두 하숙방을 못 구해줬소."
"공주대학교는 학자금이 싼 걸루 아는디유."
"그래두 이것저것 들어가는 게 많은 갑소, 이거 한 해 농사 지어봤자 돈 나오는 구멍은 빤하구."

할아버지의 땅은 경지정돈이 잘 된 논 한가운데 있었기에 집을 짓기 어려운 자리였습니다. 돌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할아버지에게 미안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쓸쓸하게 뒷짐을 지고 논을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평생 뼈 빠지게 농사 지어온 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논을 팔아야 할 처지인데 내가 사겠소, 나서는 사람조차 없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겠습니까.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저만치 쓸쓸하게 돌아서 가는 할아버지에게 미안하고 죄송스러워 다가갔습니다.

"거시기 막내 아드님이 무슨 꽈 다니는디요?"
"글씨, 무슨 꽈라드라? 잘 모르건는디. 왜그요?"
"제가 공주 사니께, 만나서 밥 한 끼라도 같이 먹고 싶어서요."

아들이 무엇을 전공하고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순박한 할아버지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나는 할아버지의 논을 빠져나와 다시 내 살 구멍을 찾아다녀야만 했습니다.

"텐트 가져 왔는데 왜 돈 들여 민박집에서 자?"

그렇게 여름이 다 지나가던 어느 날, 포기하고 있던 부동산에서 아주 싼 땅이 나왔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늘 그래왔듯이 인터넷 '다음'에서 제공하는 위성사진으로 위치를 확인해 보니 바닷가에 자리한 밭이었습니다. 나는 농사를 실컷 지을 수 있을 것 같고 아내 또한 원하는 민박집을 꾸려 나갈 수 있는 그런 자리로 보였습니다.

이번에는 아내와 함께 작심을 하고 고흥 길을 나섰습니다. 하지만 위성사진으로는 확인되지 않았던 급경사의 땅이었습니다. 집을 짓고 평생의 터를 일구고 살기에는 가당치도 않았습니다.  

땅을 둘러보고 나자 날이 어둑어둑 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내친 길에 하루 이틀 더 둘러볼 심사로 민박집을 찾았으나 고흥 길을 나섰을 때 도시락까지 싸들고 온 아내였기에 돈 아끼겠다며 민박집을 거부 했습니다.

"텐트 가져 왔는데 왜 돈 들여 민박집에서 자려구 그래?"
"헤 참, 민박집 하겠다는 사람이, 민박집도 먹고 살아야지."

텐트 칠 곳을 찾아 외나로도 대교를 건넜습니다. 일전에 큰 아이 인효 녀석과 함께 밤낚시를 하면서 하룻밤을 보냈던 바닷가로 향했습니다. 나로도 주변에는 도로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지명이 기억나지 않는 그곳은 산 넘고 산 넘어 고불고불한 비포장 길을 달려야 나오는데 아내는 차 한대 없는 어둠 속 길을, 그것도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에 짜증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어디 적당한 곳에 차 세우고 텐트 치면 안 돼?"
"조금만 더 가믄나오니께 기다려봐."
"아까도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하더니만…."

거의 다 왔다고 해놓고 한참을 달리다가, "어? 여기가 아닌개벼? 밤길이라서 헤깔리네" 어쩌구하자 아내의 불만이 극에 달했습니다.

"에이참, 그냥 돌아가자! 차도 없고 마을도 나오지도 않고…."
"쪼그만 더 가믄 된다니께."

길 안내하는 내비게이션인가 뭔가 하는 전자제품도 없이 우여곡절 끝에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야, 역시 나는 동물적인 감각이 있어 두 번째 오는 곳인디, 그것도 어둠 속에서 딱하니 제대로 찾아 왔구만. 여기서 아침에 일어나면 기가 멕힌다니께. 눈앞에 바다가 탁 펼쳐져 있다구."

기고만장은 바람 앞에 등불이었습니다. 차문을 열자마자 거센 바닷바람이 쒱 하니 불어닥쳐 자동차 문짝을 부숴 버리듯이 꽝하고 닫아버렸습니다.

"어? 바람이 엄청 부네…"

나는 아내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아내는 어치구니가 없어 거센 바람에 닫힌 자동차 문짝처럼 말문을 꽉 닫은 채 고개를 외로 꼬고 있었습니다.

"에이, 안 되겠네. 여기다가는 텐트 못 치겠네. 여기 경치가 그만인디…."
"…"
"그냥 갈까?"
"…"
"바람이 세서 안 되겠지 잉."
"당신 낚시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거지?"

아내가 정색을 하며 말했습니다.

"거시기 낚시도 하고, 텐트 쳐놓고 파도 소리도 듣고 그럴려구 그랬지. 경치도 좋고 해서…"
"이런 데다가 텐트 치겠다고? 바람이 저렇게 불고 있는데. 차문도 못 열 정도로…."
"바람이 이렇게 심할 줄 몰랐지."
"바람이 불지 않아도 그렇지, 어떻게 이런 데다가 텐트를 치겠다는 거야?"
"널찍하니 좋잖아? 그냥 여기 차 옆에다가 치면 된다니께. 방파제라서 판판하니 텐트치기도 좋구. 가로등도 있어서 좋고, 전에 인효 하고 왔을 때는 그냥 여기 차 옆댕이다가 깔판 펼쳐놓고 잤다구."

"순전히 낚시하려구 왔으면서."
"인효 엄마는 어차피 잘 거잖아, 기왕 바다가에 온 거, 낚시 좀 하믄 어때서 그려. 큰 고기 잡아서 당신 좋아하는 회도 먹을 수 있고. 또 뭐냐, 암튼 아침에 일어나면 여기 경치가 좋다니께." 
"좋기는 뭐가 좋아, 캄캄하니 바람만 불고 있구만."
"하참, 밤이니까 그렇지, 여유 있게 좀 살자, 여유 있게. 당신은 너무 성질이 급해서 탈이라니께."
"뭐라구? 바람 때문에 밖으로도 못 나서고 있는데, 지금 여기서 그런 말이 나와!"

급기야 성질 급한 아내가 폭발 했습니다. 그렇잖아도 느려터진 남편 때문에 답답해 죽어 하는 아내였는데 그런 남편이 여유 있게 살자는 말을 시도 때도 없이 주절거리고 있으니 열불이 날 일이었겠지요. 그래서 어쨌냐고요? 그 다음은 빤한 얘기 아닙니까? 자동차를 돌려 그 삼삼한 바다가 방파제에서 나오면서 서로 자신의 입장만 늘어놓아가며 골머리 아프게 쌈박질을 해댔지요. 

봉두난발 부부의 논두렁 숙박

외나로도 대교를 건너 어둠 속에서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는 고흥 길을 뱅뱅 돌고 또 돌았습니다. 길이 나오면 길인가 싶어 달렸지요. 길 끝까지 오면 "어? 여긴 도로가 아닌 게 벼" 차를 돌려 또 달렸지요. 그렇게 낯선 고흥 땅을 그것도 캄캄한 어둠 속 길을 한 두 시간쯤 달리다가 아내가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냥 아무데나 세워. 너른 데 나오면 거기다가 텐트 치자."  
"그려 그럼."

그렇게 합의를 보고 텐트 칠 만한 도로가의 너른 공터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적당한 공터가 나오질 않아 한 시간 쯤을 더 헤맸습니다. 한참을 헤매다가 어느 해수욕장(훗날 알게 된 것인데 그곳은 도화면에 자리한 발포해수욕장이었다) 근처에 도착했습니다. 끝물 해수욕장은 신나는 음악소리에 들떠 있었습니다. 텐트 칠 곳을 찾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여기 돈 받는 거 아냐? 그냥 돌아가자."
"그려 그럼."

해수욕장에서 나와 1킬로미터 쯤 떨어진 큰 도로에서 콘크리트 포장길이 나오기에 그냥 냅다 차를 몰았습니다. 헌데 2백 미터도 채 못 들어가서 길이 막혀 버렸습니다. 차에서 내려 두 눈 꿈벅거리며 살펴보니 주변이 온통 밭이었습니다. 우리가 들어선 길은 농로였던 것입니다. 어둠 속이라서 차를 돌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냥 여기서 자자."
"그러지 뭐."

텐트 칠만한 자리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임기응변에 능한 아내가 자동차 뒷좌석을 이렇게 저렇게 하니 앞쪽으로 착 접혔습니다. 우리 차는 막내 동생이 끌고 다니다가 어느 해인가 인도에 간다며 건네 준 열 댓 살 먹은 낡은 갤로퍼 승용차입니다. 그런 자동차를 5년 가까이 끌고 다니면서도 나는 잠 잘 수 있을 만큼 너른 공간이 나온다는 것을 그때껏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냥 잘만 하지?."
"어? 어떻게 한 거여? 야, 널찍하니 좋은데…."

그렇게 우리 부부는 어느 해수욕장에서(나중에 알고 보니 역시 발포해수욕장이었다) 1킬로미터 쯤 떨어진 밭 한 구탱이에서, 그것도 자동차 안에서 총총한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잠을 청했습니다.

안개 자욱한 새벽녘. 아내보다 길고 넓직한 체구를 가진 나는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꾸부러진 다리와 허리를 펴고 부스스 일어나자 아내도 일어섭니다. 

"인효 엄마는 그냥 더 자. 장소 옮겨야 겠어."
"그냥 더 자고 옮기지."
"요즘은 농사짓는 사람들이 새벽부터 일해야 허니께, 길 비켜 줘야 혀."

아내는 그대로 침낭을 덮고 다시 잠을 청했고 나는 덥수룩한 수염에 봉두난발한 머리채로 자동차를 몰아 해변 도로를 달렸습니다. 자동차 머리맡에 붙어 있는 거울을 통해 곤히 잠든 아내를 보았습니다. 이상하게도 안쓰럽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집시 부부가 따로 없었습니다. 갑자기 큰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나는 미친놈처럼 혼자서 와 하하 웃었습니다.

아내는 웃음소리에 부스스 일어나 창밖을 두리번거리다가 문득 운전석 머리맡의 거울을 보았는지 배시시 웃으며 그럽니다.

"아이구 머리채 좀 봐, 우리가 꼭 집시 부부같네."
"햐! 나두 그런 생각 했는디!"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새벽 공기만큼이나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남을 의식하는 관습 따위를 훌훌 벗어던진 아내가 자유로워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아내 스스로가 선택한 '민박'이었으니까요(아내는 훗날 사람들에게 이 날의 '집시행각'을 재미삼아 두고두고 떠벌여댔으니까요).

그래도 이날은 10여 년 전. 공주의 빈집을 구하려 다닐 때에 비하면 양반이었습니다. 당시 운전면허증은 고사하고 자동차가 없어 버스를 타고 시골 구석구석을 찾아 다녔습니다. 두어 살 먹은 큰 아이는 내가 안고 작은 놈은 아내가 남산만한 뱃속에 모셔놓고 수없이 빈집을 찾아 다녔으니까요.

아내는 민박, 나는 농사... 비로소 내 땅을 발견하다

집에서 3백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 길이 1백여 미터에 불과한 작은 해변. 봄 방학때  첫 손님으로 열 한 분의 선생님들이 놀러왔다.
 집에서 3백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 길이 1백여 미터에 불과한 작은 해변. 봄 방학때 첫 손님으로 열 한 분의 선생님들이 놀러왔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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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차를 몰아 세면을 하기 위해 어느 마을의 해변에 도착했습니다. 백사장이 아담하게 펼쳐져 있는 작은 해수욕장이었습니다. 아내가 인적 드문 해수욕장에 설치된 간이 수돗가에서 세면을 하고 있는 동안  느긋하게 담배를 피워 물고 있는데 마을 주민으로 보이는 60대 초반의 한 아저씨가 저만치에서 양동이와 낚싯대를 들고 다가왔습니다.

차안에 있던 낚싯대를 주섬주섬 챙겨 해수욕장 옆 갯바위에서 낚싯대를 펴고 있는 아저씨에게 쪼르르 다가갔습니다. 생각대로 아저씨는 이 마을 주민이었습니다. 지금껏 해왔듯이 공주에서 생활하면서 이런저런 일로 먹고사는 아무개인데 평생 살아갈 터를 구하러 다닌다는 속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아저씨 말이 때마침 마을에 우리가 원하는 그런 터가 있을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집에 갔다 올 테니께 있다가 보소."

아저씨는 '깔따구'라 불리는 농어 새끼 몇 마리를 잡아 되돌아가면서 그 터를 소개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소개해 준 터는 마을에서 1킬로쯤 떨어져 있었습니다. 본래 논자리를 밭으로 일궈 놓았는데 터를 중심으로 야트막한 산이 둘러 있었습니다. 동남향으로 자리한 앞산은 풍만한 젖가슴처럼 둥그렇게 놓여 있었고 멀리 뒷산 역시 너른 품에 부드러운 산세로 펼쳐져 있었습니다.

해변에서 곰순이와 달리기하는 김영희 선생님.
 해변에서 곰순이와 달리기하는 김영희 선생님.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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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가 터에서 3백 미터 정도의 거리에 아주 작은 해변이 기가 막히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바로 이곳이다 싶을 정도로 맘에 쏙 드는 자리였습니다. 아내는 한적한 해변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민박집을 꾸려 나갈 수 있었고 나 또한 평생 원 없이 농사를 지을 수는 그런 자리였습니다. 1500평에 평당 2만 원. 땅값이며 평수가 우리가 원했던 가격과도 얼추 맞아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드디어 평생 살만한 터를 구했구나 싶어 좋아했지만 그야말로 대책 없는 부부였습니다. 첫 눈에 반한 그 터를 구입하는데 법적인 하자가 없다하더라도 민박집은 고사하고 당장 의식주를 해결할 집을 마련하는 게 문제였습니다.

빈집을 구할 수 있을 것인지, 빈집을 구하지 못하면 나조차도 몰랐던 아내의 통장에 찍혀 있는 전 재산 3천만 원으로 과연 집을 지을 수 있을 것인지 그게 더 큰 문제였습니다. 때마침 통나무 주택시공업자인 처남이 걱정 말라며 터만 구하면 남는 목재로 함께 집을 지어 보자 힘을 실어 주었지만 그게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산 너머 산이었습니다.


태그:#전남고흥, #당신은 민박집, 난 농사...그래, 여기서 살자!, #보금자리, #집시부부, #길위에서 만난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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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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