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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너무 짧은 거리였다. 불과 5분 남짓, 꼭 삼백하고도 다섯 걸음. <동아일보> 옛 사옥(현 일민미술관)에서 지금 이곳 프레스센터까지 거리가 그랬다. 권력에 굴복한 언론과 '자유언론'의 거리는 우리의 생각보다 너무도 짧다.

권력에 맞서다 거리로 내몰린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위원들의 '원상회복'에 필요한 걸음이기도 했다. 허나 꼭 35년 동안 그들은 단 한 걸음도 돌아가지 못했다. <동아일보> 사옥은 자신들을 내쫓은 사주를 기념하는 미술관으로 바뀌었고, "유명을 달리한 열네 명의 동지"는 영원히 돌아가지 못한다.

빗방울이 떨어졌다. 17일 밤 일기예보가 떠올랐다. <동아>에서 쫓겨나던 35년 전 그날 새벽에도 비가 오지 않았던가. 정연주 전 KBS 사장은 아니라고 했다. 이어 '실망하는' 기자의 얄팍함을 확 깨는 말을 건넸다. "열네 분의 눈물, 눈물 아니겠냐"고. '자유언론'의 길에는 피눈물이 담겨 있다.

1975년 동아투위는 동아일보 옛 사옥에서 프레스센터를 왕복하며 6개월 동안 침묵시위를 벌였다
 1975년 동아투위는 동아일보 옛 사옥에서 프레스센터를 왕복하며 6개월 동안 침묵시위를 벌였다
ⓒ 동아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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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전 그때나 지금이나 자유언론은 외롭다"

17일 오후 동아투위 35주년 기념식이 서울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렸다.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 언론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계속되어야 할 싸움이란 '팩트'를 입증하듯, 120여 석은 꽉 차 있었다.

"우리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가 동아일보사로부터 삶과 이상의 터전을 빼앗긴 지 오늘로서 꼭 서른다섯 해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우리들의 검던 머리는 백발이 되었으며 열네 명의 동지가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추도사를 읽던 정동익 동아투위 위원장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35년이 지나도록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살아남은 우리들이 부끄럽다"는 대목에서 목소리가 떨리더니, "마지막 한 사람이 살아 남을 때까지 자유언론 실천에 몸을 바칠 것"이란 다짐에 이르러서는 끝내 울음이 섞이고 말았다.

하지만 정 위원장은 "35년 전 그때나 지금이나 자유언론은 외롭다. 항상 협박과 결핍에 시달리며 꺼질 듯 말 듯 위태위태하다"면서도 "35년 전 <동아일보>에 쏟아진 격려광고나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이 입증하듯, 자유언론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우리들의 희망"이라고 강조했다.

유족대표 "이 시대 모든 양심 있는 언론인들의 투쟁을 적극 지지하고 성원"

정동익 동아투위 위원장
 정동익 동아투위 위원장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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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식에 참석한 박형규 목사(남북평화재단 이사장)는 "'<동아일보>마저 이렇게 되면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이냐'는 탄식을 하며 울고, 그 다음 눈물을 씻고 같이 싸우자고 외치면서 나왔었다"면서 "자유언론이 확실한 승리를 거둘 때까지 함께 힘을 모으고 노력하자"고 힘줘 말했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은 그 노력을 '맞짱'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여기 들어오자마자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정동익 위원장이 울먹거릴 때는 아무 힘도 못 쓰고 늙은 나도 가슴이 뛰고 눈물이 났다"며 "이제부터 싸움은 이명박과 '맞짱'"이라고 잘라 말했다.

지금의 언론 현실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잇따라 터져 나왔다. 함세웅 신부(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는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부끄러운 과거가 참으로 쓰레기 같은, 또 광고지와 같은 언론을 만들어내는 현실이 마음 아프다"고 표현하며 "동아투위 동지들과 함께 언론 정화를 위해 함께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고 말했다.

유족대표로 참석자들 앞에 선 이주헌 미술평론가는 "이 정부 들어 언론 자유가 갈수록 위축되고 피폐해지고 있다. 고인들이 지하에서 애통해 할 것"이라며 "이 시대 모든 양심 있는 언론인들의 투쟁을 적극 지지하고 성원한다. 완전한 자유언론의 시대가 꽃피도록 매일 기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표현의 자유, 우리 시대의 과제입니다"

이어 발표된 '표현의 자유, 우리 시대의 과제입니다'라는 제목의 성명을 통해 동아투위는 "'87년 6월 항쟁'으로 국민들이 (언론인) 여러분들에게 가져다 준 '언론의 자유'가 발전은커녕 뒷걸음치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언론인들의 대대적인 각성을 촉구했다.

"여러분들 중에 혹시 여러분들만이 마음대로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면, 그것으로 '언론자유'가 확립된 사회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은 없는가요? 혹시나 여러분들 중에, 나만의 '표현의 자유'만 보장받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언론인들은 없는지요?"

또한 "언론사주, 막강한 국가권력, 광고시장의 알파요 오메가인 재벌들"을 "언론의 자유를 팽개쳐버리는 데 대한 마음 속의 면죄부"로 내세워 스스로 위안하고 있지는 않느냐고도 엄중하게 되물었다. "제2의 언론자유운동, '표현의 자유운동'을 과감하게 펼쳐 나가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국민들에게는 "민주주의의 생명력을 가꾸고 키우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가꾸고 키우는 일이다. 표현의 자유는 우리 국민들 자신의 실천과제일 뿐, 당국에서 허용 받거나, 남의 나라 사람들이 찾아다 쥐어주는 것이 아니라"고 못 박으면서 표현의 자유 확립을 위한 시민운동을 펼칠 것을 호소했다.

17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동아투위 35주년 기념식
 17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동아투위 35주년 기념식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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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투위' 35주년을 맞아 언론인들과 국민에게 드리는 글

한편 이날 기념식에는 동아투위 위원과 그 가족들이 200여 명 참석해 고인들에게 헌화했으며, 이해동 목사와 최상재 언론노조 위원장도 인사말을 통해 35주년을 함께 돌아봤다. 추도식에 앞서 김민환 고려대 언론학부 교수의 사회로 '동아투위 결성 35주년 기념 학술토론회'도 진행됐다.

다음은 동아투위 35주년 기념 성명 전문. '회피 연아' 동영상을 유포한 누리꾼을 수사 의뢰한 '당사자'와 이에 분노하는 사람이라면, 또한 꼭 35년 전 <동아일보>와 같은 위기에 처해 있는 MBC 관계자에게는 특히 일독을 권한다.

'표현의 자유', 우리 시대의 과제입니다!
'동아투위' 35주년을 맞아 언론인들과 국민에게 드리는 글

도움과 격려를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박정희 정권은 1970년대에 '표현의 자유'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습니다.

이에 맞서 동아일보, 동아방송 언론인들은 1974년 가을 "자유언론은 어떠한 구실로도 억압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것"임을 선언하고 곧바로 '자유언론 실천운동'을 벌였습니다. 이 운동은 박정희 군사독재의 폭압에 맞서는 '태풍의 눈'이었습니다. '연탄가스 중증환자'가 되어버린 언론계의 산소 호흡기 같았습니다.

박 정권은 이 산소 호흡기를 떼어 내기 위해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 대한 일체의 광고게재를 차단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국민들은 '격려광고'로 맞섰습니다. 박 정권은 최후의 수단으로 동아일보 사주 일가를 핍박했습니다. 김상만 일가는 이에 굴복하여 기자, 아나운서, 프로듀서들을 대거 광야로 내몰았습니다.

광야로 쫓겨난 기자, 아나운서, 프로듀서 114명이 1975년 3월 17일 길거리에서 결성한 모임이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입니다. 이 '동아투위'가 출범한 지 오늘로 만 35년이 됩니다. 우리는 오늘 다시 한 번, 그동안 우리에게 도움과 격려를 주신 많은 분들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동아투위 35주년 기념식
 동아투위 35주년 기념식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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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부와 동아일보사에게 "즉각 사죄, 원상회복"을 요구합니다

정부기구인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광고탄압과 언론인대량해고사건에 대한 2년간의 조사활동 끝에 2008년 10월 다음과 같이 '결정'했습니다.

"동아일보는 정부의 압력과 요청에 따라 자유언론실천운동에 앞장선 언론인들을 대량 해고했다."

현재의 정부가 과거 정부를 계승하는 정통성 있는 정부라면, '정부의 횡포로 핍박받은 국민들'에게 사죄하고 보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더 늦기 전에 정부가, '사죄'와 '국가배상'에 나설 것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독재 권력에 굴복하여 무고한 사원들을 집단 해고한 동아일보사 역시 책임을 통감하고, '사과', '원상회복'에 나서야 합니다.

언론인들에게 고합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사회는 민주화가 상당히 진전되었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핵심인 '표현의 자유'는 아직도 빙점을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모든 국민들의 '표현의 자유'가 법과 제도 속에서 얼마나 동등한가에 비례합니다. 표현의 자유가 빙점을 오르내리고 있다는 것은 학문의 자유, 사상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가 위험수준에 처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론인 여러분, 여러분들 중에 혹시 여러분들만이 마음대로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면, 그것으로 '언론 자유'가 확립된 사회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은 없는가요? 혹시나 여러분들 중에, 나만의 '표현의 자유'만 보장받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언론인들은 없는지요?

혹은 오늘날 봉건 영주처럼 군림하고 있는 언론사주가 다수인 한국사회에서 사주의 비위를 거슬러가면서까지 국민들의 언론자유를 위해 나설 이유는 없다라든가, 막강한 국가권력에 맞설 만한 용기는 없다라든가, 광고시장의 알파요 오메가인 재벌들을 비판함으로써 실직의 위기를 초래할 이유는 없다라든가 하는, '언론의 자유를 팽개쳐버리는 데 대한 마음속의 면죄부'를 찾고서 스스로 위안하지는 않는지요?

이런 관점이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 현상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상당수 언론들이 '국민들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수호자'가 아니라 오히려 '사상과 학문의 심판관'이 되거나 행정부와 국회와 법원 간의 삼권분립을 부정하는 듯한 보도와 해설들을 심심찮게 드러내는 것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저 '87년 6월 항쟁'으로 국민들이 여러분들에게 가져다 준 '언론의 자유'가 발전은커녕 뒷걸음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국민 중에 누군가가 돈이나 권력이 적다고 하여 무시당하거나 억압받아서는 안 됩니다. 노동자의 목소리도, 농민의 목소리도, 일선 교사의 목소리도, 일선 공무원들의 목소리도, 소규모 자영업자의 목소리도, 묵살 당하거나 핍박받아서는 안 됩니다.

특히 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표현의 자유'는 그 본질적 자유권이 위협받을 정도로 위축되고 있습니다. '쇠고기 촛불집회'와 'PD수첩', '언론소비자주권국민캠페인'의 광고 불매운동은 일찍이 재판정으로 끌려가 피고인석에 앉게 된 바 있습니다.

여러 정치적 재판에서 잇단 무죄를 선고한 재판부들에 대해서 "사법 개혁"이라는 이름의 '마녀 사냥'이 시작되었습니다. 애꿎은 '우리법연구회'에 대한 일부 언론들의 '사상 사냥'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사회는 이제 언론인 여러분들이 앞장서서 시민들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에 브레이크를 걸지 않는다면, 파시즘 체제로 되돌아갈 위기에 서 있습니다.

언론인 여러분! 여러분들은 스스로 자청하여 언론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이 땅의 자유와 인권과 민주주의를 지킬 파수꾼의 암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언론인 여러분! 여러분들이 제2의 언론자유운동, '표현의 자유운동'을 과감하게 펼쳐 나가야 할 때입니다.

합동추도식에서 헌화하고 있는 참석자
 합동추도식에서 헌화하고 있는 참석자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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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여러분들께 호소합니다

'표현의 자유' 실현은 우리 국민 모두의 과제입니다. 미국의 3대 대통령을 지낸 바 있는 토머스 제퍼슨은 1786년에 이미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소규모 반란이 이따금씩 일어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자유의 나무는 꺾이고 시달리면서 애국자와 압제자의 피를 흡수하여 활력을 더해 가는 것이다…."

'촛불 집회'와 같은 평화로운 집회가 "불법 시위"로 내몰리고 아직도 공무원들의 노동조합 결성이 거부되는 한국사회에서 '표현의 자유'가 어떻게 제대로 숨 쉴 수 있겠습니까? 국민 여러분! '표현의 자유'를 제대로 누리는 사회를 만들어 갑시다!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는 슬퍼할 줄도 알고, 분노할 줄도 알고, 행동할 줄도 알고, 연대할 줄도 아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는 사회에는 '민주주의'가 손님으로 찾아와서 끝내는 한 가족이 되게 됩니다."

우리는 온 국민이 함께한 저 87년의 '6월 항쟁'으로 '민주주의'를 손님으로 맞아들였습니다. 이 '민주주의'가 손님으로만 우리와 함께 있다가 떠나가 버릴지, 아니면 한 가족이 되어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할지, 2010년대의 한국사회는 시대적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를 한 가족으로 맞이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 '동아투위'는 35년 전 '자유언론실천선언'의 정신을 인용하여 국민 여러분께 다음과 같이 호소합니다. '민주주의'의 생명력을 가꾸고 키우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가꾸고 키우는 일입니다.

"표현의 자유는 우리 국민들 자신의 실천과제일 뿐, 당국에서 허용 받거나, 남의 나라 사람들이 찾아다 쥐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유명을 달리한 동아투위 위원들의 영정 사진
 유명을 달리한 동아투위 위원들의 영정 사진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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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투위'는 오늘 결성 35주년을 맞아 국민 여러분들에게 '표현의 자유' 확립을 위한 3대 시민운동을 펼칠 것을 호소합니다.

1. 서로 생각이 다른 것은 논쟁이 아니라 토론에 맡기고, 생각이 같은 것들은 함께 실천한다.

2.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무데나 '좌익이다', '빨갱이다'라고 몰아붙이는 데 악용되고 있는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을 벌인다.

3. 스스로 '사상의 심판관'으로 자처하는 언론, 또는 언론인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론기관' 또는 '언론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범국민적 '표현의 자유운동'을 전개한다.

2010년 3월 17일
동아자유언론투쟁위원회


태그:#동아투위, #자유언론, #언론 자유, #동아일보,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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