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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마시고 하는 결정치고 제대로 된 것은 거의 드물 것입니다. 알콜 기운에 취해 분별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결정을 내리고 나면 다음날 후회하는 일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술 마시고 호기가 앞서면서 내린 결정 때문에 다음날 눈을 뜨고 나서 후회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뭐 그것도 술버릇이라면 술버릇이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약 3주 전 술을 몇 잔 먹은 김에 내린 결정만큼은 지금 다시 곱씹어도 참으로 탁월한 결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술기운이 아니었다면 하지 않았을 테니 그럴 때는 술기운도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어떤 결정이었냐구요? 3주 전 상황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들 용돈 3만 원... 보름도 안 돼 용돈 타령

 

중학교 2학년인 첫째 아들 정민이의 용돈은 한 달 3만 원입니다. 초등학교 때는 물론 그보다 적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하더라도 정민이의 용돈은 항상 남아돌았습니다. 책상서랍에 넣어 놓고 쓰기 때문에 한 번씩 지갑 속을 들여다볼라치면 대부분의 돈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초등학교 5학년인 둘째 정연이의 지갑은 텅 비어 있는 경우가 많았답니다. 이런저런 군것질에 용돈이 남아 있을 날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정민이는 한 달에 한번 받는 용돈을 거의 쓰지 않는 데 반해 둘째인 정연이는 보름 정도만 지나면 용돈이 떨어져 쩔쩔매곤 했습니다.

 

하지만 1년 전부터 상황이 슬슬 바뀌는 조짐이 보였습니다. 둘째 아이의 용돈 부족은 여전했지만 첫째 아이마저 용돈이 떨어졌다며 엄마를 조르는 경우를 왕왕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확인해 보니 아들이 용돈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곳은 다름 아닌 책 대여점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책을 빌려오는 데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달에 2만 원 남짓 그렇게 사용한다는 것이지요.

 

단골집인 동네 책 대여점은 기실 제가 먼저 회원 등록을 하고 책을 빌려다 보던 곳이었습니다. 저를 따라서 정민이도 1년여 전부터 이곳에 회원으로 등록하고는 주로 판타지 소설을 빌려오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되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판타지 소설도 만화책과 같이 성인용과 청소년용이 구분되어 있어야만 할 것 같은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즉 청소년들이 읽기에 적절하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는 판타지 소설이 왕왕 있었고, 그런 책도 청소년들에게 아무런 규제 없이 대여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에 들어선 정민이가 읽고 있는 책을 들여다보면, 적절하지 않은 책을 읽고 있는 것 같아 영 마땅치 않던 참이기도 했지요.

 

물론 책 대여점 주인에게 그 같은 점을 말하고 아이들에게 적절치 않은 판타지 소설은 대여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지만 소용이 없었답니다. 그 주인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아니라 아르바이트 학생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가 더 많아 일일이 통제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닌 듯했습니다.

 

두 번째는 책에 너무 빠져들어 학업에 소홀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책을 빌려보는 데 용돈을 너무 많이 사용한다는 점이었구요. 어쨌든 이래저래 아들이 책을 빌려다보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여기던 참이었습니다.

 

책 대여점 반납기일 어기면 '과태료(?)'... 그렇다면 조기 반납은?

 

책 대여점으로서는 자신들이 보유한 책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돌려보게 하는 게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즉 빌려간 후 빨리 가져오면 그 책을 다른 사람이 또 빌려 갈 수 있기에, 이익을 위해서는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책을 주로 빌려오던 대여점의 경우 그 기간은 보통 2박 3일 내지 3박 4일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번씩 빌려와 책 내용이 재미 있다면 밤을 새워서라도 읽은 후 다음날 반납하곤 하지만 그 내용이 재미 없으면 몇 페이지 읽다 말고 내려놓게 됩니다.

 

그럴 경우 대여점에서 정해놓은 대여기간을 놓치기 일쑤입니다. 이런 습관은 아들도 마찬가지인지, 어떤 책은 몇 시간 만에 대여섯 권을 다 읽고는 대여점에 책을 반납하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일주일 내내 그대로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3주 전쯤입니다. 술을 마시고 기분좋게 집에 들어왔는데 아들이 자기 책상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고 있더군요. 물어보니 대여점에 책값으로 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불과 일주일 전쯤인 설 연휴 직후 만 원인가를 냈다고 기억하고 있는데, 1주일도 안 돼 또 만 원을 낸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를 않았습니다. 화를 내면서 야단을 칠 수밖에요.

 

"야. 일주일에 만 원어치씩이나 빌려다 보면 공부는 언제 하려고 하느냐!"

"그게 아닌데요. 아빠......"

 

그러면서 말을 흐렸습니다. 사연을 들어보니 책 대여점에서 반납기일을 어겼다고 해당 액수만큼을 선금에서 공제하는 바람에 돈을 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말을 들어보니 불합리한 것 같습니다.

 

책 회전율을 높이기 위해 반납기일이 늦어지면 벌칙을 부과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를 하겠지만 반대로 책을 반납기일 이전에 가져다 주는 것엔 어떻게 혜택을 주는지 궁금할 수밖에요. 아들을 앞세우고 책 대여점을 찾아갔습니다. 물론 그날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귀차니즘'을 핑게로 TV를 보거나 인터넷을 뒤적거렸을 것입니다.

 

 

반납기일 어긴 것에는 여지없이 '과태료(?) 혹은 연체료'

 

아들을 앞세우고 찾아간 책 대여점의 사장과 나눈 대화는 처음부터 그리 매끄럽지 못했습니다. 저는 사연을 말하고 아들의 책 대여 선금에서 연체금을 이유로 공제한 부분을 원상으로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물론 술기운 때문인지 목소리가 한 옥타브 크게 나왔던 것 같습니다. 사장님도 그런 부분이 마음에 거슬렸는지 완강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렇게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규정상, 늦으면 권당 하루 200원 남짓의 연체금을 물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목소리는 점점 높아만 갔습니다. "아니 책 대여점이 금융기관도 아니고 이러저런 사정으로 손님들의 책 반납이 늦을 수도 있는 것인데 그렇게 당신들 마음대로 정한 규정에 따라 연체료를 부과해도 되느냐"며 언성이 높아졌답니다. 또 "당신들이 책 반납이 늦어졌다고 연체료를 물린다면 반대로 일찍 반납하면 대여료에서 그만큼의 혜택을 줘야 하지 않느냐"고 따졌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저의 항변은 그분에게는 전혀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늦게 책을 반납하면 그만큼의 연체료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급기야 저의 폭탄 선언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회원 해지해 주시고 우리 아들 것도 마찬가지로 해지해 주십시오, 그리고 남은 금액은 지금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몇 천원 남아 있던 거스름돈을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들에게 다시 한 번 강조했습니다. "아빠가 회원 해지하면서 분명히 말했듯이 저 책 대여점에는 다시는 안 가기로 했으니 너도 절대로 저 집에 가면 안 된다. 그리고 앞으로는 책 대여점에서 책을 빌려올 생각은 하지 말아라."라고 말입니다.

 

 

새로운 길을 찾아서... 헌책방 그리고 온라인 서점

 

잠을 잘 때 그냥 누우면 잠이 도통 오지 않아 엎드려서 책을 읽다가 스르르 잠드는 버릇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책이 수면제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책 대여점에 발길을 끊고 집안에 있는 책을 찾아보니 더 이상은 읽을 만한 책이 없습니다.

 

결혼 후 굴곡이 많은 삶을 살다보니 예전에 가지고 있던 그 많던 책들은 시나브로 없어져 버렸습니다. <말>지 창간호부터 10년 남짓 모아왔던 잡지, 월탄 박종화 전집, <한겨레> 창간호, 1920년대에 발행된 <소년> 창간호 등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귀한 책과 자료들입니다. 

 

지난해 10월경에야 겨우 책을 들여놓을 만한 공간을 갖춘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그 후 책장을 가져다 놓고 그동안 상자에 담아놓았던 아이들 학습도서 위주로 책장을 채워놓은 정도입니다. 정민이도 아빠의 이 같은 독서습관을 닮아서인지 밤마다 안절부절입니다. 급기야는 초등학교 때 읽었던 <먼 나라 이웃나라> 만화책을 들여다보고 있더군요.

 

그렇게 책장에 여유 공간이 많으니 대여점에 갖다줄 돈으로 책을 사는 게 낳겠다는 판단이 서더군요.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헌책방입니다. 식탁에서든 화장실에서든 그리고 침대에서든 부담없이 손에 들 수 있는 책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지난 주 토요일입니다. 근 10여 년 만에 찾아가본 신림9동(현 대학동) 고시촌 앞 헌책방에는 정겨운 책들이 가득 쌓여 있더군요. 정가 1만 원짜리도 여기서는 2천원입니다. 이십여 권의 책을 골라냈습니다. 들고 갈 무게를 염려해서 그렇지, 고를 만한 책은 무척이나 많았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수백 권이라도 사오고 싶었지만 책 무게가 만만치 않기에 포기할 수밖에요. 앞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들러서 사오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아들을 위해 <반지의 제왕> 시리즈(7권), 그리고 제 몫으로는 조정래 선생님의 <아리랑>(12권)을 샀습니다. 그리고 또 몇 권의 책을 더 골랐습니다. 그렇게 해 봤자 책값은 6만 원대에 불과했습니다.

 

지난 주에는 <아리랑>에 푹 빠져 지냈습니다. 1990년대 <한국일보>에 연재될 때 읽었던 기억이 가물가물한 관계로 전혀 새로운 책을 읽는 것 같았습니다. 정민이도 교과서에 질릴 때면, 이번에 사다준 책을 읽고 있더군요.

 

급기야는 책을 사다 나르는 일에 아내도 동참했습니다. 지난 주 목요일 한 인터넷 서점에 5권짜리 <세계 역사의 길>이라는 책을 주문하니, 그 다음날 택배로 집에 도착했더군요. 아내가 아이들에게 참고서 종류 이외의 책을 사준 것은 아마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합니다.

 

어쨓든 3주 전의 결정으로 1석 3조의 효과를 얻고 있습니다. 아들이 그동안 무분별하게 사용하던 용돈을 절약하는 게 그 하나요, 그 나이에 읽기에는 적절치 않은 일부 판타지 소설을 읽음으로써 정서에 해가 되는 것을 막은 것이 그 둘이요. 과도하게 소설책에 빠져들어 학습에 지장이 생기는 것을 막은 게 그 셋입니다. 3주 전 결정은 아주 휼륭했던 셈입니다.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이봐, 술 먹고 결정 내린 것 중에 대여점 회원 해지한 것은 정말 잘한 것 같다. 그렇지?"

 

아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습니다.

 

"그래, 지금까지 당신이 술 먹고 한 결정 중 최고로 잘한 결정이여!"

"......"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책 대여점, #아리랑, #반지의 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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