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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안중근 장군 순국 100주년'을 기념하는 유적 답사기를 쓰고자 2009년 10월 26일부터 11월3일까지 아흐레간 엔치야(煙秋) 하리, 슬라비얀카,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포브라니치나야, 쑤이펀(綏芬河), 하얼빈, 지야이지스고(蔡家泃), 다렌, 뤼순 등지를 배로 열차로 안중근 발자취 그대로 답사하여 <영웅 안중근>이라는 책으로 펴낸 바, 그 가운데에서 안중근 장군이 하얼빈 역 플랫폼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장쾌하게 쓰러트린 장면과 최근 현안이 되고 있는 안중근 장군 유해 문제를 2회에 걸쳐 싣고자 한다.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 정각,   안중근 장군이 간수들의 인도로 교형장으로 가고 있다.
▲ 안중근 장군의 최후 당당한 모습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 정각, 안중근 장군이 간수들의 인도로 교형장으로 가고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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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0월 26일 09 : 00

1909년 10월 25일 밤 11시.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열차가 창춘(관성자) 역을 출발하였다. 러시아 측이 이토에게 제공한 특별열차는 최신형 기관차가 끌고 귀빈차에는 응접차가 연결되어 있었다. 이토를 태운 특별열차는 밤새 만주 대륙을 힘차게 달렸다. 귀빈차 실내는 스토브의 열기로 훈훈했다. 이토는 브랜디를 머금으며 칠흑의 차창 밖 만주 대륙을 바라보며 이생에서 마지막 밤을 마냥 즐겼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정각. 이토를 태운 열차가 하얼빈 역 플랫폼에 도착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대합실에서 차를 마시던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은 일본인 환영객 틈에 싸여 잽싸게 플랫폼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러시아군 의장대 뒤 일본거류민단 환영객 틈에 끼어 섰다.

이윽고 이토 일행을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 역 플랫폼에 멎었다. 열차 도착에 맞춰 플랫폼에 도열한 러시아 군악대가 주악을 연주됐다. 러시아 대장 대신 코코후초프가 이토 수행비서관 모리 야스지로(森泰二郞)의 안내로 객차로 들어가 이토에게 도착 인사를 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광영입니다. 각하께서는 더 먼 곳에서 오셨지요."

이토는 코코후초프의 손을 잡으며 다정하게 답했다. 두 사람은 열차 내 응접 테이블에 앉아 모리가 내놓은 차를 들면서 환담을 나눴다.

"이 하얼빈에서 코코후초프 대신과의 회담이 이루어진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도 이토 공작과 동감입니다. 천천히 고견을 듣도록 하고 우선 플랫폼에 정열하고 있는 의장대의 열병을 받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09 : 25

이토는 코코후초프의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열차에서 내린 다음, 러시아 의장대 앞을 지나 환영 나온 각국 영사들이 서 있는 곳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군악대의 연주 속에 이토와 코코후초프가 나란히 선두에 서고, 그 뒤를 나카무라 제코(中村是公) 만철총재, 가와카미 토시히코(川上俊彬) 하얼빈 주재총영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 만철이사, 모리 야스지로(森泰二郞) 비서관, 무로타(室田) 귀족위원 등이 뒤따랐다. 그때 하얼빈 역 플랫폼 기둥에 달린 시계침은 9시 25분을 막 지나고 있었다.

이토는 그들과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뒤, 일본거류민단 환영객 앞을 지나 다시 러시아 의장대 쪽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러시아군 의장대 뒤편에 있던 안중근 장군은 이 순간을 하늘이 준 절호의 기회로 알고, 가슴에 숨겨뒀던 브라우닝 권총을 뽑아들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이사진은 190년 11월초 안중근 장군이 뤼순감옥으로 이감된 직후에 찍은 사진으로 리본에는 수형번호 대신 '안응칠'로 표기돼 있다. 일본 죠신지 소장으로 지금은 류코쿠 대학에 기탁보관 돼 있다고 한다.
▲ 뤼순감옥 초기의 안중근 장군 이사진은 190년 11월초 안중근 장군이 뤼순감옥으로 이감된 직후에 찍은 사진으로 리본에는 수형번호 대신 '안응칠'로 표기돼 있다. 일본 죠신지 소장으로 지금은 류코쿠 대학에 기탁보관 돼 있다고 한다.
ⓒ 눈빛출판사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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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장군은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준 하늘에 감사하며 회심의 첫 발을 쏘았다. 그때 안중근과 이토와 거리는 불과 열 발자국이었다. 첫 탄알이 이토의 팔을 뚫고 가슴에 파고들었다. 하지만 총소리가 주악 소리에 뒤섞여 그때까지 경비병들은 영문을 몰랐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안중근 장군은 다시 혼신을 다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두 번째 탄알은 이토 가슴에 명중했다. 경비병과 환영객들은 그제야 돌발 사태를 알아차리고 겁을 먹은 채, 우왕좌왕 흩어지고 도망쳤다. 총을 맞은 이토는 가슴을 움켜쥐고서는 뭐라고 중얼거리며 비틀거렸다.

다시 안중근 장군은 이토의 절체절명 마지막 남은 명을 확실히 끊어주고자 침착하게 가슴을 정조준하여 회심의 세 번째 방아쇠를 당겼다. 세 번째 탄알은 이토 복부 깊숙이 명중되었다. 제3탄이 이토를 확실하게 절명시킨 결정의 탄알이었다. 그제야 늙은 여우 이토는 꼬리를 내리고 코코후초프 쪽으로 픽 쓰러졌다.

안중근 장군은 그 자가 혹 이토 히로부미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에, 만일을 대비하여 그 곁을 수행하던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 가와카미, 수행 비서관 모리, 만철 이사 다나카 세 사람에게도 총알을 한 방씩 안겼다.


1909년 10월 26일 09 : 30


 안중근 장군이 이토 히루부미를 쓰러트린 하얼빈 역 플랫폼 현장.

2009년 10월 31일 헤이룽장성 당사 연구소 김우종 선생이 필자에게 그날의 상황을 설명하며 안중근 장군 거사 지점에서 권총 방아쇠를 당기는자세로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진 곳을 가리키고 있다.
 안중근 장군이 이토 히루부미를 쓰러트린 하얼빈 역 플랫폼 현장. 2009년 10월 31일 헤이룽장성 당사 연구소 김우종 선생이 필자에게 그날의 상황을 설명하며 안중근 장군 거사 지점에서 권총 방아쇠를 당기는자세로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진 곳을 가리키고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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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장군의 권총에 장전된 일곱 발 총알 가운데 발사된 여섯 발은 단 한 방도 헛방이 없었다. 대한 남아의 대단한 담력과 신묘한 사격술이었다. 의기의 대한 남아가 일본 열도를 향해 던지는 불방망이였다.

그 불방망이로 일본 열도가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일본인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대한 남아의 장엄한 기백이었다. 대한의 영웅 안 장군은 불타오르는 적개심으로 네 사람을 쓰러뜨린 뒤, 러시아어로 만세 삼창을 목 놓아 불렀다.

"코레아 우라!(대한 독립 만세)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그런 뒤 안중근 장군은 권총을 거꾸로 잡아 러시아 헌병에게 건네주고 태연자약 의연하게 체포되었다. 그때가 오전 9시 30분이었다. 잠깐 사이에 안중근 장군은 당신이 바란 대로 모든 걸 다 이루었다. 대한의 영웅, 대한의군 참모중장 특파독립대장 안중근 장군의 쾌거였다.

이 순간 우리나라 백성들은 강화도조약 이래 30여 년 쌓였던 체증을 한순간에 시원히 '뻥' 뚫었다. 아무도 할 수 없었던 일을 대한의군 안중근 장군이 권총 한 자루로 통쾌히 치렀다.

세 방의 총알 세례를 받은 이토 히로부미는 곧장 열차에 옮겨졌다. 이토의 수행 의사 고야마(小山)가 맥을 짚고 캠퍼 주사를 놓고 브랜디를 입에 넣어 주었지만 그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소생 불능의 즉사였다.

(이때 이토는 즉사하지 않고 의식이 조금 있었는데 모리 비서관을 통해 "범인은 조선인입니다"라는 말을 듣고는 "바가야로(멍청한 놈)!"이라는 말을 남겼다는 얘기도 있다.)

안중근 장군이 운동시간에 잠시 바람 쐬로 나간듯 아직도 책상 위에는 지필묵이 그대로 놓여있었다
▲ 안중근 장군이 수감된 감방 안중근 장군이 운동시간에 잠시 바람 쐬로 나간듯 아직도 책상 위에는 지필묵이 그대로 놓여있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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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장군 죽어서 천년을 살다

대한 남아 안중근 장군이 일본 열도 심장부에 꽂은 비수였다. 만일 안중근 장군의 쾌거가 없었다면 어찌 우리의 민족혼을 말할 수 있으랴. 이토 히로부미 피살 전보에 일본 국민들은 순식간 마른 하늘의 벼락 같은 충격에 빠졌다. 요미우리신문, 동경 일일신문, 대한매일신문 등에서는 호외를 발행하는 등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해외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은 환호의 찬사를 보내는가 하면, 조정의 친일파들은 몹시 당황했다.

친일내각의 우두머리 이완용은 사저에 일본헌병이 파수를 보게 했고, 친일의 거두 송병준은 일본 순사 셋을 청하여 숙소를 지키게 하는가 하면 한성부민회장 유길준은 이토의 영구를 맞고자 대련으로 향했다. 10월 28일, 순종은 통감부에 행차하여 이토를 애도했으며, 30일에는 이토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밖에 숱한 벼슬아치들이 통감부로 가서 이토의 죽음을 조상했다. 이와는 달리 당시 중국 총통이었던 위안스카이(袁世凱)는 다음의 글로 조문했다.

평생을 벼르던 일 이제야 끝냈구려.
죽을 땅에서 살려는 것은 장부가 아니고말고.
몸은 한국에 있어도 이름은 만방에 떨쳤소.
살아서 백년을 사는 이 없는데 그대 죽어서 천년을 사오.

平生營事只今畢  死地圖生非丈夫
身在三韓名萬國  生無百世死千秋

안중근 장군이 순국한 뒤 중국 동북 일대 소학교에서는 중국인이 작사 작곡한 <안중근을 추모하며>라는 노래를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진실로 공경할 만하다.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고 자신도 용감히 죽었다.
마음속으로 비로소 나라의 한을 풀었다.
역사 속에 충의 혼을 우러르지 않을 자가 없었다.
천고에 길이 살아남아 있어라.
누가 그의 뒤를 따르랴.
누가 그의 뒤를 따르랴.

"저 놈이 필시 이토 노적(老賊)일 것이다"

안중근 장군의 사형이 집행된 교형장으로 새 교형장 건설로 이미 철거된 것을 최근에 다시 복원시켜놓은 것이다.
▲ 안중근 장군의 사형이 집행된 교형장 안중근 장군의 사형이 집행된 교형장으로 새 교형장 건설로 이미 철거된 것을 최근에 다시 복원시켜놓은 것이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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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1909년 10월 25일), 나는 김성백의 집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새 옷을 모조리 벗고 수수한 양복 한 벌을 갈아입은 뒤에 단총(권총)을 지니고 바로 정거장으로 나가니 그때가 오전 7시쯤이었다.

거기(하얼빈 역)에 이르러 보니, 러시아 장관(코코후초프 러시아재정대신)과 군인들이 많이 와서 이토를 영접할 절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차 파는 집에 앉아서 차를 두서너 잔 마시며 기다렸다. 9시쯤 되어, 이토가 탄 특별기차가 와서 닿았다. 그때는 사람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나는 찻집 안에 앉아 그 동정을 엿보며 스스로 생각하기를"어느 시간에 저격하는 것이 좋을까?"하며 십분 생각하되 미처 결정을 내리지 못할 즈음, 이윽고 이토가 차에서 내려오자 도열해 있는 군대가 경례하고 군악소리가 하늘을 울리며 귀를 때렸다. 그 순간 분한 생각이 북받쳐 일어나고 삼천리 길 업화(業火, 불같이 일어나는 노여움)가 머릿속에서 치솟아 올랐다.

"어째서 세상이 일이 이같이 공평치 못한가. 슬프다! 이웃 나라를 강제로 뺏고 사람의 목숨을 참혹하게 해치는 자는 이같이 날뛰고 조금도 꺼림이 없는 대신, 죄 없이 어질고 약한 사람은 이처럼 곤경에 빠져야 하는가?"하고는 다시 더 말할 것 없이 곧 뚜벅뚜벅 걸어서 용기 있게 나가 군대가 도열해 있는 뒤에까지 이르러 보니, 러시아 측 관리들이 호위하고 오는 맨 앞 가운데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가진 한낱 조그마한 늙은이가 이같이 염치없이 감히 천지 사이를 활보하여 오고 있었다.

"저 놈이 필시 이토 노적(老賊)일 것이다."

1910년 2월 14일 일제는 이곳에서 안중근 장군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안 장군은 이보다 더 극심한 형은 없느냐!"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 뤼순 지방법원 법정 1910년 2월 14일 일제는 이곳에서 안중근 장군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안 장군은 이보다 더 극심한 형은 없느냐!"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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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단총을 뽑아들고, 그 오른 쪽을 향해 4발(실제는 3발)을 쏜 다음, 생각해 보니 십분 의아심이 머릿속에서 일어났다. 내가 본시 이토의 모습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만일 한 번 잘못 쏜다면 큰 일이 낭패가 되는 것이라, 그래서 다시 뒤쪽을 향해서, 일본인 일행 가운데서 가장 의젓해 보이는 자를 새로 목표하고 3발을 이어 쏘았다.

그리고 다시 생각하니, 만일 무죄한 사람을 잘못 쏘았다고 하면 일은 반드시 불미할 것이라 잠깐 정지하고 생각하며 머뭇거리는 사이에 러시아헌병이 와서 붙잡히니 그때가 바로 1909년 음역 9월 13일(양력 10월 26일) 상오 9시 반쯤이었다. 그때 나는 곧 하늘을 향하여 큰 소리로'대한만세!'를 세 번 부른 다음, 정거장 헌병분파소로 붙잡혀 갔다.
-  안중근 지음 <안응칠 역사> 에서


태그:#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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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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