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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주
기자는 '안중근 순국 100주년'을 기념하는 유적 답사기를 쓰고자 2009년 10월 26일부터 11월 3일까지 아흐레간 엔치야 하리(煙秋), 슬라비얀카,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포브라니치나야, 쑤이펀(綏芬河), 하얼빈, 지야이지스고(蔡家泃), 다렌, 뤼순 등지를 배로 열차로 안중근 발자취 그대로 답사하여 <영웅 안중근>이라는 책으로 펴낸 바, 그 가운데에서 안중근 장군이 하얼빈 역 플랫폼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장쾌하게 쓰러트린 장면과 최근에 현안이 되고 있는 안중근 장군 유해 문제를 2회에 걸쳐 싣는다.


지금도 옛 뤼순감옥 묘지 터에는 개발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일본이 안중근 장군 유해를 별도 보관치 않고 이곳에 매장했다면 찾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 옛 뤼순감옥 공동묘지 터에 솟아나는 아파트 건물들 지금도 옛 뤼순감옥 묘지 터에는 개발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일본이 안중근 장군 유해를 별도 보관치 않고 이곳에 매장했다면 찾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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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위해 몸 바침이 군인의 본분이다(爲國獻身軍人本分)

1910년 3월 26일 새벽이 밝아왔다. 감방 창문 밖으로 봄을 재촉하는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안중근 장군은 예삿날과 마찬가지로 몸가짐을 가다듬고는 천주님께 기도를 드리고 이생에서 마지막 아침밥을 들었다. 식사를 마치자 간수 지바 도시치(千葉十七)가 찾아와 머뭇거렸다. 안중근 장군이 이를 눈치 채고는 물었다.

"어제 부탁한 것 때문이오."
"그렇습니다."
"지금 쓰지요."
"감사합니다."

1910년 3월 26일, 순국 직전 어머니가 보내준 명주저고리와 두루마기, 그리고 검정바지로 갈아입고 죽음을 담담히 기다리고 있는 안중근 장군의 최후의 영정. 삼가 장군님의 명복을 빕니다.
▲ 순국 직전의 안중근 장군 모습 1910년 3월 26일, 순국 직전 어머니가 보내준 명주저고리와 두루마기, 그리고 검정바지로 갈아입고 죽음을 담담히 기다리고 있는 안중근 장군의 최후의 영정. 삼가 장군님의 명복을 빕니다.
ⓒ 눈빛출판사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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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바는 고개를 숙여 예를 드리고는 벼루에 먹을 갈았다.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 수감된 뒤 숱한 글씨를 남겼다(박은식의 <한국통사>에 따르면 200여 점을 썼다고 하는데 현재 확인된 것은 50여 점이다). 그때 안중근의 머릿속에는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이란 8자가 떠올랐다. "나라 위해 몸 바침이 군인의 본분이다" 마음 속으로 읊어보았다.

"그래, 나는 이것을 위해 오늘까지 살아왔던 거야."

안중근은 붓을 들고는 온 정성을 다해 힘차게 써내려갔다.

爲國獻身軍人本分
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謹拜

아주 통쾌했다. 죽음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마치 농부가 추수를 끝낸 들판을 바라보는 흐뭇한 심정이었다. 아니 목동이 양떼를 몰아 집으로 돌아가는 평화로운 심경이었다. 안중근은 화룡점정(畵龍點睛)의 마음으로 왼손에 먹을 묻힌 뒤 낙관을 찍었다.

"신품(神品)입니다."

곁에서 지켜보던 지바가 감동하면서 말했다.

"그동안 고마왔소."
"가보로 간작하겠습니다."

그 뒤 지바는 뤼순 감옥 근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 센다이(仙台)에서 철도원으로 근무하면서 안중근 장군의 반명함판 사진과 이 유필 족자를 집안에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안 장군의 명복을 빌다가 1944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아내도 남편을 따라 아침저녁 추모하다가 후사가 없자 조카 미우라(三浦)를 양녀 삼아 그 일을 잇게 했고, 미우라는 뒷날 이 유묵을 한국의 안중근기념관에 기증했다.

연해주 크라스키노 남양알로에 농장 앞에 서 있다.
▲ 단지동맹유지비 연해주 크라스키노 남양알로에 농장 앞에 서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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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장군의 유언

안중근 장군이 마지막 유묵을 쓰고는 곧 두 아우 정근 공근을 면회했다. 안중근 장군은 담담한 말로 아우들에게 유언을 받아쓰게 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 고향으로 옮겨 장사지냄)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이 된 의무를 다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서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 장군은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에 묻어두었다가.."라고 유언을 남길 만큼 이 공원을 거닐며 거사 직전의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었다..
▲ 옛 하얼빈공원, 현 조린공원이다. 안 장군은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에 묻어두었다가.."라고 유언을 남길 만큼 이 공원을 거닐며 거사 직전의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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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장군은 두 아우가 형의 사형 집행 전 마지막 면회임을 알고서 비통해 하자 나무랐다.

"나는 티끌만한 상심도 없는데 너희가 왜 그러냐?"

그 말에 아우들도 마음을 가다듬자 차분한 목소리로 일렀다.

"오직 늙으신 어머님께 효도를 다하라. 앞으로 정근은 공업에 종사하여 한국공업의 후진성을 벗어나는 데 이바지해 주고, 공근은 학자가 되기를 바란다. 아들 분도를 꼭 신부로 만들어 달라."

안 장군은 이 다리 위에서 하얼빈 역 구내를 바라보며 거사 계획을 머릿속에 그렸다.
▲ 제홍교에서 바라본 하얼빈 역 안 장군은 이 다리 위에서 하얼빈 역 구내를 바라보며 거사 계획을 머릿속에 그렸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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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한 낙조

안중근 장군은 두 아우와 마지막 면회를 마치고 감방에 돌아온 뒤 어머니가 동생 편에 차입해준 흰 명주저고리와 검정바지로 갈아입고 그 위에 흰 두루마기를 걸친 다음 이승에서 마지막 사진을 남겼다. 안중근 장군은 두 간수가 양팔을 잡고 이끄는 대로 교형장으로 갔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구리하라(栗原貞吉) 전옥이 사형집행문을 낭독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우리 대한국이 독립해야 동양 평화가 보존될 수 있고, 일본도 위기를 면하게 될 것이다."

안중근 장군이 말을 마치자 형 집행 간수가 백지를 접어 두 눈을 가리고 그 위에 흰 수건을 둘러맸다. 그런 뒤 안중근을 부축하여 일곱 계단을 올라 교수대 위에 세웠다.

"잠시 기도할 시간을 달라."

구리하라 전옥이 이를 허락하자 안중근 장군은 교수대에서 3분 남짓 기도를 드렸다. 그 기도가 끝나자 안중근 장군의 목에 밧줄이 드리웠다. 오전 10시 4분이었다. 10시 15분, 의사가 절명을 확인했다.

안중근 장군이 144일 지낸 뤼순감옥 청사 전경
▲ 뤼순감옥 안중근 장군이 144일 지낸 뤼순감옥 청사 전경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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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집행 후 안중근 장군의 두 동생이 안 장군 유해 인도를 요구했지만 끝내 일본은 이를 들어 주지 않았다. 안 장군의 유해가 밖으로 나갔을 때 그 묘지가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한 일이기에 이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안중근 장군의 유해는 송판으로 된 관에 안장된 채 그날 오후 뤼순 감옥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날 새벽부터 내린 보슬비는 하관할 때까지도 내렸다. 이천만 대한의 백성들이 이 세상을 떠나는 안중근 장군에게 흘리는 눈물이었다. 뒷날 하얼빈 역 플랫폼에서 안 장군의 총탄을 발에 맞았던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 만철이사의 회고담이다.

"나는 당시 현장에서 10여 분간 안중근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총을 쏘고 나서 의연히 서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신(神)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것도 음산한 신이 아니라 광명처럼 밝은 신이었다. 그는 참으로 태연하고 늠름했다. 나는 그같이 훌륭한 인물을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그날 안중근 장군의 하관을 마친 뒤는 날씨가 활짝 개더니 해가 넘어갈 무렵에는 저녁놀로 여순 앞바다를 시뻘겋게 물들였다. 한 영웅의 운명을 기리는 장엄한 낙조였다.
- 이상 박도 <영웅 안중근> 279~283쪽

유해 반송에 앞서 해야 할 국내 정지작업

7천만 우리 겨레가 같은 마음일 테지만, 100년이 지나도 안중근 장군의 유해가 고국으로 반장되지 못한 현실이 못내 안타깝다. 그동안 각계에서 여러 차례 안중근 유해를 모셔오기 위해 유해발굴단을 현지에 보내 찾았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최근 2008년 대한민국 정부의 주선으로 박선주 충북대박물관장을 단장으로 한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단'을 편성하여 두 차례에 걸쳐 현지 발굴 작업을 대대적으로 펼쳤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이번 답사 기간 중, 다롄에서 만난 다롄대학교 역사학원 유병호 교수에게 안중근 장군 유해 문제에 대해 물었다.

다롄 뤼순 현지 안중근 장군 전문 역사가다.
▲ 다롄대학교 유병호 교수 다롄 뤼순 현지 안중근 장군 전문 역사가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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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의사 순국 후 동생들이 형의 시신 인도를 일본 측에 요구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뤼순 감옥소 측 말로는 안 의사 시신은 사형수 무덤에 매장했다고 하는데, 거기에 매장되었다면 당시 법으로 3년 후에 소각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에 와서 유해를 찾기란 불가능하지요. 다만 안 의사는 특수한 경우이니까 일본이 별도 매장해서 관리하였다면 찾을 수 있을 테지요."

나는 뤼순 감옥을 답사를 마친 뒤 나의 길안내자인 다롄 안중근연구회 박용근 회장에게 뤼순 감옥 묘지 답사도 부탁드렸다. 그가 앞장서서 뤼순 감옥 묘지로 찾아가는 길옆에는 온통 고층 아파트들이 한창 들어서고 있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그새 일백년이 지났으니 그곳인들 어찌 변치 않겠는가. 옹졸한 일제가 어찌 안중근 장군의 무덤을 제대로 남겼겠는가. 설사 남겼더라도 일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해로 남아있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하지만 뤼순 감옥 묘지 흙에는 안중근 장군의 육신과 넋이 그대로 녹아 묻혀 있을 것이다.

다롄 안중근 연구회장 박용근씨가 뤼순감옥묘지를 설명하고 있다.
▲ 뤼순감옥 묘지 다롄 안중근 연구회장 박용근씨가 뤼순감옥묘지를 설명하고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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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흙이나마 한 줌 담아 백범 선생이 효창원에 가묘를 한 안중근 장군 묘지에다가 덮어주고 싶었다. 박 회장은 뚜벅뚜벅 앞장 서 가다가 한 돌비석 앞에 섰다. 흰 돌에 '뤼순감옥구지묘지(旅順監獄舊址墓地)'라고 새겨져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꿇어 절을 두 번 드린 뒤 한 흙을 한 줌 담아 주머니에 넣고는 하산했다. 지금도 그 언저리는 한창 개발 중으로 머지않아 이나마 남아있는 뤼순 감옥 묘지까지도 사라질 것 같았다. 

안중근 장군 유적지 답사에서 돌아온 이틀 뒤인 2009년 11월 6일 효창원에 있는 안중근 장군 무덤(가묘)을 찾았다. 백범기념관 홍소연 자료실장이 맞아 주었다. 나는 안중근 장군 무덤에 엎드려 고유인사를 드리고, 뤼순감옥 묘지에서 가지고 온 흙을 봉분 곳곳에 골고루 흩었다.

필자가 뤼순감옥 묘지에서 채취해온 흙을 안중근 장군 가묘에 헌토하고 있다.
▲ 안중근 장군 가묘 필자가 뤼순감옥 묘지에서 채취해온 흙을 안중근 장군 가묘에 헌토하고 있다.
ⓒ 백범기념관 홍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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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통령의 지시로 안중근 장군의 유해 찾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음은 때늦은 감이 있으나 다행한 일이다. 사실 아직도 안중근 장군의 유해를 고국에 모시지 못한 점은 먼저 일본이 인간의 기본 양심으로 사형수의 유해를 유족에게 돌려주는 최소한의 인도주의를 무시한 야만적인 처사에 그 제일의 책임이 있고, 다음으로 우리 정치 지도자에게도 그 책임이 있다.

내가 백범기념관 홍소연 자료실장의 얘기를 들은 바로는 1948년 3월 김구 선생이 평양에 가 남북정치지도자 회의 당시 북한의 김일성 주석에게 안중근 유해 반장 문제를 공동으로 추진하자는 제의를 했으나, 김 주석은 그 무렵 뤼순이 소련점령지라는 이유를 들어 난색을 표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고 한다.

100년이 지난 오늘, 안 장군의 유해 반장 문제는 사실상 일본의 협조 없이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제라도 일본이 이성을 찾아 그 진실을 낱낱이 밝혀 주는 게 한일 간의 미래를 위해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아울러 우리 정부와 정치지도자들은 안 중근 장군의 유해 반장에 앞서 국내 사전 정지작업이 필요하다.

그 첫 번째로 만일 안 장군의 유해가 존재한다면, 남북 양측에서 서로 연고권을 주장하며 유해를 앞에 두고 또 다른 갈등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 내가 알기로는 남북한 양편에 안중근 장군 가묘가 있다. 우리는 산 조상보다 죽은 조상을 더 잘 모시는 인습이 있는데, 행여 안 장군의 유해를 두고 양편에서 서로 가져가겠다고 다툰다면  얼마나 볼썽사나운 일이겠는가. 그래서 이 일은 유족을 앞세워 남북공동으로 추진하는 게 그런 불상사를 예방할 수 있고, 일본도 더욱 중압감을 느낄 것이다.

둘째로는 선열 못지않게 살아남은 후손에 대한 대우 문제다. 아직도 안중근 장군을 비롯한 왕산 허위 선생 그리고 다른 독립지사 후손들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유랑민으로 고국을 그리며 살고 있다.

셋째로는 정부요직에 친일파 후손 등용 문제다. 일제 강점기 순사부장 아들이 이 나라 2세 교육의 우두머리라는 말을 행여 안중근 장군이 아신다면 아마 당신 유해 고국 반장을 주저하실 거다. 이는 임명권자도 이를 수락한 자도 선열을 욕보이는 일이다. 나는 10년 전 베이징에서 만난 한 독립운동가가 "국토가 남북으로 갈라진 고국에 내 뼈를 묻고 싶지 않다"는 비장한 유언을 들은 바 있었다.

전남 장흥군 장동면 만년리 용두산 기슭에 있는 안중근 사당인 해동사가 있다.
▲ 해동사 전경 전남 장흥군 장동면 만년리 용두산 기슭에 있는 안중근 사당인 해동사가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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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보다 더 기념해야 할 국치일(國恥日)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국치(國恥) 100년을 맞은 이즈음, 이제 우리가 나아갈 방향은 어떻게 잡아야 할까? 내 생각은 증오는 또 다른 증오를 낳기에 계속 반성치 않는 일본을 증오하기보다는 앞으로는 일본의 실체를 바로 알고 우리의 국력이 그들을 앞서는 데 더욱 힘써야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의 국력이 일본을 앞서 그들 스스로 우리에게 무릎을 꿇게 히는 일이다. 이 방법이 일본에 대한 가장 바람직한 선의의 복수 길이며, 진정한 승리라고 생각한다.

현재는 분명 일본의 국력이 우리보다 앞섰지만 우리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일본을 능히 추월하리라 확신한다. 이 길이 안중근 장군을 비롯한 독립지사들에게 은혜를 갚는 길이며, 또한 역사의 순리이다. 고대사에서는 우리가 앞섰고, 근현대사에서는 일본이 앞서고 있지만, 미래사에서는 우리가 다시 앞서갈 차례다. 이것이 역사의 순리요, 이를 이루는 게 오늘을 사는 '후손들의 몫'이 아닐까.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제의하고 싶은 것은 100년 전 나라를 빼앗긴 국치일(國恥日)인 8월 29일을 8월 15일 광복절 못지않은 기념일로 정하여 이날 하루만이라도 국민들이 나라가 왜 망했는지 깊이 되돌아보는 날이 되게 했으면 좋겠다.


태그:#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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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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