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객관적인 역사적 진리는 없다. 그러므로 오직 현재의 눈을 통해서만 우리는 과거를 볼 수 있고 과거를 이해할 수 있다." - E.H. 카, <역사란 무엇인가>
 
어느 시대건 그 시대에 맞게 역사를 재해석하는가 봅니다. 지나온 역사는 하나, 즉 진실은 하나인데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말들이 많습니다. 당연히 역사의 가치도 변하면서 머므르지 않고 강물처럼 흐르는가 봅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느 누구도 단종 같은 삶도 세조 같은 삶도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번 여행을 하며 깨닭았습니다. 아무리 역사적 진리가 없다고 해도, 역사이전에 인간이 있었고,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기 때문인가 봅니다.
 

 

월정사에서 상원사 쪽으로 오르다 보니 월정사 부도군이 있었습니다. 부도는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모신 일종의 무덤입니다. 9세기경부터 근래까지 20여기의 부도가 아름드리 전나무 숲 속에 오순도순이야기를 주고받듯, 죽음이 심심하지 않은 것처럼 무리를 지어 있었습니다. 대부분 종 모양인데, 일부는 비석 모양도 있었습니다. 성긴 이끼와 풍화의 흔적을 보니 종 모양이 오래된 것 같고 비석 모양은 근래의 것인 듯했습니다. 천여 년의 세월동안 죽음의 흔적으로 저렇게 있었겠지요.

 

 

서울은 봄이 완연한데, 대관령을 오르면 오를수록, 상원사로 향하면 향할수록, 시간을 역행하는가 싶더니, 오대계곡으로 접어들자 봄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고, 겨울로 다시 돌아가 잔설을 머리에 인 오대산 봉우리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런데 차에서 내려 부도군 주변을 자세히 보니 썩은 낙엽 사이로 이름 모를 연노랑 싹들이 돋아나고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봤던 그 삭막한 산과 들에도 이렇게 연노란 싹들이 자라고 있었는데 너무 빨리 오는 바람에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살면서 이렇게 못보고 지나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우리는 어디로 그렇게 빨리 가는 것일까요. 최종 목적지가 어딘지나 알고 그렇게들 빨리 다니는지.

 

인간의 평균수명이 팔십이라고 하면 천 년이면 12배의 인생을 살 수 있는 긴 세월이라는 것에 존재의 무상無常을 느끼며 담배 한대를 태우다가 문득 생각했습니다. 그럼 한해밖에 살지 못하는 여린 싹은 자기보다 80배의 긴 세월을 사는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천 년의 세월동안 부도군을 바라본 저 늙은 전나무나, 천년의 흔적을 보고 알량한 감회에 젖었던 나나, 지금 막 비집고 나오는 저 여린 싹 모두 천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지만 나의 우문엔 모두 무관심 한 듯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에 흠뻑 젖은 채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상원사는 오대산 중턱에 있는 월정사 부속 암자이며, 지혜의 보살인 문수동자가 모셔져 있는 곳입니다. 세조는 왕위에 오른 후, 알 수 없는 피부병이 생겼는데 유명한 명의들도 고칠 수 없어서,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법주사 신미대사를 찾아가 치유할 수 있는 방안을 물었답니다. 신미대사는 세조에게 부처님의 가피로 치료하고자, 세조에게 상원사 중창과 불상 조상을 권유 하였고, 세조는 이를 실행했다고 합니다. 때문에 지금도 상원사에는 세조에 관한 유물과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설화는 세조가 불사를 하고자 상원사에 오다가 문수보살을 친견한 이야기입니다. 세조가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가는 도중에 계곡물에 목욕을 할 때였습니다. 자신의 피부병을 시종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시종들을 멀리 보내고 혼자 목욕을 하는데, 마침 곁을 지나는 처음 보는 동자를 보고 등을 밀어달라고 했답니다. 목욕을 마친 세조는 "그대는 어디에 가든지 임금의 옥체를 보았다고 말하지 마라" 당부하니, 동자도 세조에게 "임금께서도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발설하지 마시오."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세조는 놀라서 동자를 뒤돌아 봤지만 동자는 홀연히 사라졌고, 그 이후 세조는 피부병이 말끔히 치료 되었다는 설화입니다. 세조가 가신들을 데리고 상원사에 행차했던 것은 사실인가 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조 12(병술) 5월 1일(무자일) 임금이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에 행차하였다. 영의정 신숙주, 상당군 한명회, 호조판서 노사신 등이 행차를 따랐다." 하지만 피부병이 말끔히 낳은 것은 아닌 듯합니다. 세조는 상원사 행차 후 채 2년도 안되어 죽었습니다. 세조가 부처에게 머리숙이며 그렇게 애걸했을 것인데, 부처는 왜 그를 죽였을까요?

 

문득 이런 말이 떠오르네요. 네가 곧 부처다.

 

 

세조는 어린 조카인 단종을 지금의 강원도 영월군 청령포로 유배를 보내고, 그것도 모자라 유배지에 사약을 내린 사람입니다. 단종은 어찌 숙부가 주는 사약을 받을 수 있겠느냐면서 사약을 먹지 않고 줄로 자신의 목을 묶고 하인에게 잡아당기게 해서 자살하였다고 합니다.

 

권력이 아무리 좋다고 치더라도 어찌 어린 조카를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태어난 지 이 틀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계유년과 병자년 궁궐의 죽고 죽이는 권력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라다가 끝내는 어린나이에 숙부에 의해 머나먼 강원도 산골로 유배 와서, 청령포 노산대 절벽위에서 한양으로 흐르는 동강을 바라보며 얼마나 그리움에 사무쳤을까요. 우리 역사는 물론 인간 삶의 비극이란 비극은 다 간직한 것 같은 단종의 삶 속에는 세조라는 악인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광수의 '단종애사' 때문에 세조가 또는 신숙주가 역사에 기여한 업적이 희석되었다고 말이 많지만, 저는 그런 것은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한 가지 알고 있는 것은 세조도 신숙주도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살생부를 작성한 한명회도 마찬가지였겠지요.

 

 

 

그랬을 것입니다. 세조는 어린 조카를 그렇게 보내고 마음속에 한 덩어리 근심을 가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형님인 문종이 살아와 그의 목을 자르는 악몽에 목을 움켜쥐며 깨어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고, 죄책감에 시뻘건 눈으로 밤을 지새운 것이 헤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세조도 사람이면 그랬을 것입니다. 조선시대 왕들의 사망원인을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세조는 심각한 정신질환과 피부질환으로 사망했다는 사실로만 봐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카를 비롯해 계유년과 병자년에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살아남은 자의 괴로움을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정신적 피폐와 육체적 고통 속에서 그렇게 죽어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200여년이 흐른 후 그때 그에게 죽은 자들에게 관직을 주어, 신하들에게 그와 같은 충절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사육신(死六臣)은 그렇게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고려가 석가와 손을 잡고, 조선이 공맹과 어께동무를 하고 백성을 현혹했듯이 말입니다.

 

 

세조는 자신의 병을 고쳐준 동자야말로 문수보살의 화신임을 깨닫고 자신이 본 문수동자의 모습을 조각가에게 설명하여 조각하게 했는데, 그것이 지금의 상원사의 문수동자 상이라 합니다. 하지만 저는 문수동자상을 쳐다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예배의 대상으로서 만들어진 국내 유일의 동자상이며, 수준 높은 목조 상으로 조선전기 불상미를 새롭게 파악할 수 있는 대표적 작품이다. 고개는 약간 숙인 상태이며 신체는 균형이 잡혀있다. 머리는 양쪽으로 묶어 올린 동자머리를 하고 있으며, 볼을 도톰하게 하여 어린아이 같은 천진스러움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라고 상원사 입구에 쓰여 있었지만, 직접 보니 설명과 전혀 달랐습니다. 먼저 눈에 금방 거슬리는 것은, 동자상에 수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좀 더 유심히 살펴보니 아래로 내려뜬 눈에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도대체, 제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저는 금방 답을 찾아냈습니다. 그 모습이었습니다. 영월 청령포 노산대 위에서 휘 돌아치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눈물 한방울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고, 그 눈물 찾듯이 아찔한 절벽 아래 물줄기를 바라보던 그 모습. 저 물줄기 따라가면 한양에 갈 수 있겠지. 자신을 아끼던 가족은 물론 따르던 충신들도 모두 죽은 한양을 그리워하며 물줄기를 내려 보던 모습. 내려 보는 눈길에 막 솜털을 벗어난 가늘고 짧은 턱수염이 젖어 턱에 달라붙은 것 까지 똑같았습니다. 그리움과 아쉬움과 무서움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느낄 17살 나이. 그 느낌을 두 눈 가득 담고, 휘돌리며 굽이쳐 절벽은 높아 시야는 넓고, 굽이쳐 산허리로 돌아서 사라진 물길은 짧아 그리움과 두려움을 깊숙이 간직한 채 내려 보던 그 마지막 단종의 모습이 연상 되었습니다.

 

 

역사는 후손들에게 많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소리를 잘 경청해야 합니다. 신영복 교수님은 "역사를 배우기보다 역사에서 배워야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그렇게 보내고 행복했을까요.

 

태백산맥 너머 서울이란 곳에 얽히고설킨 수많은 문제들의 답도 어찌 보면 이렇게 단순한데, 우리는 왜 풀지 못할까요. 국회에서, 청와대에서, 시청 앞 광장 등에서 떠들어 대는 수많은 논제들, 종로거리에서 명동거리에서 강남거리 등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고뇌들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인데 말입니다.

 


태그:#문수동자, #월정사, #청령포, #세조, #단동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