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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침부터 빗방울이 듣는다. 바람도 가을처럼 소슬하지만 금방 큰 비가 내릴 것 같지는 않다. 커다란 비닐봉지 하나를 뒷주머니에 찔러 넣고 집을 나섰다. 반장화를 신고, 주유소에서 받은 목장갑도 한 켤레 챙겼다. 실로 오랜만의 출행이었다.

 

뒷산에 고사리가 참 많았다. 멀리 경기도와 충청도 쪽에서 단체로 몰려오기도 했다. 처음 이 마을에 이사를 왔을 때는 야아 이게 뭐냐, 여기가 천국이다, 어쩌고 괴성을 지르기도 했었다. 4월 말경부터 5월 중순까지 꺾어서 말린 고사리가 쌀자루로 두세 개씩이나 되었다. 그것을 이 사람도 조금, 저 사람도 조금, 그렇게 나눠주고 나눠준 보답으로 돌아오는 선물을 받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런 재미를 작년에는 단 한 차례도 누리지 못했다. 치매 진단을 받은 어머니와의 삶이 너무 낯설고 불안해서 집을 비울 수도 없었지만 뭐라고나 할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우울함 같은 것이 내 안에 있어서 고사리를 꺾으러 다니며 이것저것 들여다보는 그런 서정적인 재미에는 통 관심이 닿지를 않았다. 그저 생각만으로 내일은 나서야지, 다시 또 내일은, 그렇게 하다가 고사리철을 보내고 말았다.

 

고사리 꺾기에도 노하우가 있다

 

고사리도 나름 보호색을 입는다. 낙엽 속에서 나오는 고사리는 낙엽 색깔이고, 잔디나 수풀 속에서 나오는 녀석들은 또 그런 색깔을 띤다. 그래서 눈을 제아무리 크게 떠도 잘 보이지 않는다. 방금 지나온 자리를 돌아보면 거기에 고사리가 있고, 그래서 자꾸 오던 길을 되돌아가게 된다.

 

마치 앞만 보며 달리는 자는 놀이에 끼어 주지 않겠다는 듯이. 가끔 가만히 서서 좌우를 천천히 둘러보면 나 여기 있어, 나도, 나도, 하는 듯이 그렇게 고개를 숙인 고사리가 눈에 잡히곤 한다. 그러니까 너무 서둘러서도 안 되고, 너무 게을러서도 안 된다는 얘기가 된다.

 

천천히, 무엇을 하는 듯이 안 하는 듯이 그렇게 천천히 산 속을 주유하고 있노라면 고사리의 속성 같은 것이 한눈에 잡힌다. 어떤 형태의 어떤 능선 혹은 어떤 골짜기에 어떤 등급의 고사리가 있는지, 말하자면 머릿속에 하나의 지도가 그려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지난 사오 년 동안 뒷산의 고사리 분포도 같은 것을 머릿속에 담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테면 이런 것들이었다. 일제 말기에 대회전을 준비하느라고 팠다는 방공포대를 중심으로 왼쪽으로 가면 떼죽나무 군락지가 있는데 거기에는 왜소한 밥고사리뿐이라서 별 것이 없고, 오른쪽으로 가면 참나무 군락지가 나오는데 그쪽에는 통통한 먹고사리가 지천이다, 뭐 이런 것들.

 

뱀들의 신방을 훔쳐보는 초유의 경험을 하고

 

이번에도 그랬다. 이번에도 습관적으로 머릿속의 고사리 지도를 따라서 천천히 산 속을 주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갑자기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니다. 갑자기는 아니었다. 멀리서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등 인기척이 들리기는 했었다.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다. 이슬비 촉촉하게 내리는 봄날에 고사리를 바라고 산에 들어온 사람이 어찌 나 하나뿐이랴.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뭔가 느낌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발자국 소리와 두런거리는 소리, 부르는 소리, 웃음소리, 이 모든 것들을 고려해볼 때 그 규모가 보통이 아니다 싶었다. 적어도 다섯, 많으면 열 명. 그 숫자를 생각하니 갑자기 뭔가가 아득해지는 것이었다.

 

야 이거 안 되겠다, 일단 피하고 보자.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하여튼 그랬다. 그들의 목소리와는 반대 방향으로 휘적휘적 걸어가며 눈에 보이는 대로 하나씩 고사리를 꺾다가 하마터면 뱀을 집을 뻔했다.

 

작은 다복솔 옆으로 마른 풀잎이며 낙엽들이 쌓여 있는데 그 사이로 탐스런 먹고사리 서넛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나를 꺾고 두 번째 손을 내미는데 손이 저절로 무슨 보이지 않는 장애물이라도 만난 듯이 멈췄다. 동시에 내 몸은 뒤로 물러서고 있었고, 입에서는 절로 "엄매야 너 뭐냐, 배암이네, 배암이여",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뱀은 하나가 아니었다. 혀를 날름거리며 나를 노려보는 머리는 하나였지만, 하나밖에 안 보였지만 얼기설기 뒤섞인 몸들의 규모를 볼 때 한 마리는 넘어 보였다. 게다가 통통한 것과 왜소한 것이 뒤섞여 있었다. 드디어 꼬리가 보였다. 통통한 꼬리와 왜소한 꼬리가 가위표 형국으로 붙어 있었다.

 

아, 요 녀석들이 짝짓기 중이었구나. 그렇다면 통통한 놈이 암컷이겠다. 근데 지금이 4월, 잠에서 깬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이러는 것이지. 뱀은 원래 그런 것인가. 동면에서 깨나자마자 후계생산 작업부터 벌이는 건가?

 

차마 가까이 다가서지는 못하고, 2미터쯤 떨어져서 한참을 보고 있는데도 수컷의 머리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디에 있지? 왜 암컷만 혀를 날름거리며 항의를 하는 것이냐? 그나저나 참 대단도 하다. 겨우내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잠만 잤던 몸으로 어떻게 그 위대하고 힘든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냐. 아무래도 그냥 가기는 어렵겠다. 내 기어이 수컷의 용모를 보고야 말리라. 

 

그때 갑자기 여인들의 소리가 다시 귀에 잡혔다. "어머, 저기 사람 있다" 하는 소리가 들리고, 뒤를 이어 "야 이년아 너 고사리 밟았잖아" 소리와 함께 산이라도 떠매가는 듯한 웃음소리가 터지는가 싶더니 다시 "너는 이년아 네 앞에 고사리를 두고도 못 보냐" 하고 쇳된 소리가 나오고 뒤를 이어 까르르 무너지는 웃음소리가 반복되고 있었다.

 

빗속의 산에서 듣는 여인들의 웃음소리는, 까닭도 근거도 없이 무섭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저 어이가 없다는 느낌뿐이다. 그랬다. 나는 그들의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야아 이거 큰일났다,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소리와는 반대쪽으로 자꾸 달아나고 있었다.

 

이만하면 되겠다, 하고 한숨을 돌리고 다시 차분하게 고사리를 찾아서 좌우를 천천히 돌아보며 걷기를 얼마나 했을까, 아득히 멀어지다가 아예 들리지 않게 되었던 여인들의 웃음소리와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어느새 저만치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까워졌다 싶은 순간 나무들 사이로 붉은 옷자락이 보였다.

 

이게 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저들이 설마 나를 따라오는 것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뭔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가. 완전히 뭔가에 홀린 기분으로 다시 달아나기 시작했다. 한참을 달아나다가 이쯤이면 되겠다 싶어 다시 좌우를 느긋하게 둘러보며 고사리를 찾고 있는데 이것이 무엇인가. 어느새 따라잡았는지 바로 위쪽에서, 그리고 왼쪽에서, 여인들의 부산한 발자국 소리와 수군거리는 소리 그리고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아따 이 아줌마들이 뭣 났다고 이렇게 빨리빨리 쫓아오는 거지, 환장하겠네 정말 거", 어쩌고 투덜거리며 그야말로 정신없이 눈에 비치는 대로 건성건성 고사리를 꺾는 둥 마는 둥 해가며 다시 도망을 치는데 불현듯 내가 이거 혹시 포위된 것인가? 그런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왜? 해답을 낼 수 없는 의문을 품고 있자니 가슴이 쿵덕쿵덕 뛰고 얼굴에 불이라도 붙은 듯이 확확거렸다. 고사리는커녕 나뭇가지 하나도 제대로 식별이 안 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아나다가 멈추고, 또 달아나기를 되풀이하다가 문득 알게 되었다. 어느 순간 들려온 "저기 있다"하는 소리, 뒤를 이어 터지는 천둥 같은 웃음소리, 그 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그들이 나를 지목하고 뒤를 쫓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편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저기 사람 있다" 했을 때 내가 달아나지만 않았더라면, 그들이 나를 주목하고 쫓아오지는 않았을 터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문득 장난기가 발동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장난기는, 모르긴 몰라도 아마 고사리를 꺾는 일보다 몇 배는 오지고 배터지게 재미나고 그래서 두고두고 우려내 먹을 수 있는 추억거리가 될 것이었다. 오, 이 무슨 횡액이란 말인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고사리고 뭐고 다 포기하고 그만 돌아오고 말았다.

 

속도 모르는 어머니는 여자를 주머니에 넣어오라고

 

못난 스스로를 무수히 그야말로 끝도 없이 타박하며, 훅훅 달아오르는 얼굴을 겨우 식히고 집으로 돌아와서 비닐봉지를 툭툭 털어놓는데 어머니가 깜짝 반가워하신다. 그 와중에도 고사리는 제법 꺾었던 것 같다. 작은 소쿠리로 한가득이다.

 

 "아따 꼬사리가, 겁나게 굵네. 어디서 이놈들을 다 데려왔을까."

 

 좋아라 하시는 어머니에게 고사리 뒤처리를 맡기고 커피를 끓였다. 말로는 다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아직도 내 안에서 출렁이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왜 나는 그렇게도 황황하게 도망하기에나 급급했던 것일까. 그런 반성을 곱씹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혼자 중얼거리게 되었던 모양이다.

 "아따 뭔놈의 여자들이, 어디서 그렇게 떼거리로 몰려와서는 그냥, 잡아먹히는 줄 알고 혼났네."

 

어쩌고 그렇게 산에서의 일을 중언부언 늘어놓으면서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는데 고사리를 만지작거리던 어머니가 문득 한 마디 하신다.

 

"그 여자 하나 집어오지."

"에?"

"하나만 잡아서 개야끔에다 쏙 감춰오지."

"여자를 잡아서 주머니에 넣어 오라고? 아니 왜에? 여자가 무슨 인형인가, 주머니에 넣어오게."

"전에는 다들 그렇게 했어."

"아니 엄마,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여?"

"다들 그렇게 했당게는."

 

어머니는 아마 보쌈을 말씀하시는가 보았다. 웃자고 하시는 말씀은 분명 아니었다. 고개를 푹수그린 채 사람은 보지도 않고 고사리에만 집중하고 있는 어머니의 표정이 어떠한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목소리는 더할나위 없이 진지했다. 그렇다고 아주 낯선 모습은 아니었다.

 

비가 내리는 날 어머니는 뭔가 생각이 많아진다. 맑은 날에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지만 비가 내리는 날에는 거의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날은 아들을 오빠라고 하지 않고 온전하게 아들로 인식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슨 보쌈을?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다는 느낌이어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았다.

 

"아니 그러니까 엄마, 여자를 왜 보쌈해 오라는 거냐고요."

"아이고 참말로, 아 같이 살게."

 

답답해서 못 살겠다는 듯 말끝을 한껏 위로 올리는 어머니, 거기서 말문이 턱 막혔다. 그 순간의 느낌은 정말로 뭔가가 턱 소리를 내면서 내 앞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 음, 역시 그것이었던가. 툭하면 아들을 오빠라고 부르면서도 가슴 속 저 아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여전했던가. 변하지 않았던가. 당신 스스로는 세수도 못하고 머리도 못 감고 옷단추 하나 제대로 꿸 줄도 모를 정도로 지난 일들을 죄다 잊어 버렸으면서도 아들이 혼자라는, 큰아들이 홀아비라는 것만은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인가.

 

그러고 보니 내가 아들 노릇을 아주 엉터리로 해 왔던 것 같기도 하다. 음...


태그:#고사리, #봄비, #여인들, #어머니와 아들, #치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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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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