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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매체에 '여성흡연자들이 예의가 바른 이유'라는 글을 기고했는데, 이것이 오마이뉴스 블로그를 통해서 네이버에 소개되면서 전국 댓글러들들의 관심을 만나게 되었다. (기사 바로가기) 이들 중에는 거의 난독증에 가까운 악플러부터, 철학논술 답안지를 채점하다 오신 교수님 성향의 댓글러까지 아주 다양한 유형들이 있었다. 물론 지원군도 있었다. 간간이.

반응을 정리하면 간단하다. ①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 자기경험을 일반화시키지 말 것! ② 남성의 무개념 흡연태도와 남성의 우월성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에 대한 근거제시가 부족, 또 하나는 이에 대한 약간의 반론들에 대한 맞대응. 예를 들어 "아니 무슨 학술논문도 아니고 왜 그렇게 엄격하게 따집니까?"라는 것에 대한 공격. ③ 네이버 메인에 나올 정도면 논리성 결여는 절대 용납불가!

얼핏 논리정연한 댓글같지만 단 하나의 질문으로도 위기탈출은 가능하다. "혹시 그 대상이 여성문제에 관한 것이라서?"라고 물어보면 된다.

왜 여성문제에만 '논리'가 그렇게 강조되는가?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좌측상단부터 우측하단까지를 꼼꼼히 보자. 여기에 날씨정보 빼고 과연 '성급한 일반화'가 되지 않은 콘텐츠가 있단 말인가? 모든 것이 개인의 생각 아닌가? 또 이를 '미디어란 그런 것이다'라고 수긍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여성문제' 어쩌고만 등장하면 난리인가?

모든 글은 '성급한 일반화'로부터 출발한다. 그게 글의 운명이다. 논객들 역시 이것에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누군가가 '관심을 가져주면' 성급한 일반화는 탁월한 상상력이 된다. 진중권이나 조갑제의 지지자들은 한없이 '그들의 논리적 전개력'에 감탄한다. 아무리 반대진영에서 똘아이요, 노망든 노친네라고 하든.

비논리적인 글은 '감성을 울리기도' 하고, '상상력의 원천'이 되어 학술연구자들이 의미 있는 가설을 수립하는 것을 도와주기도 한다. 그런데 여성문제에 있어서는 그 글이 '성급한 일반화'를 전제하는 에세이류의 글이라고 할지라도, 대한민국 전체가 '논리학' 시험 채점위원이 되어 분석질을 한다. 그래서 이 분야는 상상력 자체가 원천 봉쇄된 상태다. 글을 시작하기조차 버겁다.

조·중·동의 어처구니없는 칼럼부터 진보매체의 너무 앞선 주장까지 사실상 모든 것이 다 성급한 일반화를 잘해서 '토픽감'이라는 소리를 듣는 마당에, 여성문제만큼은 엄격한 조사에 기반을 '먼저' 바탕이 되어야지만 '읽을 자격'이 있단다.

이처럼 한국사회에서 여성을 논한다는 것은 신문은커녕, 개인블로그, 그리고 찌라시의 한 구절로도 등장하기가 어려운 사회적 모순에 맞닥뜨리는 일이다. 정말 가혹하다. 정말 빵꾸똥꾸다.

거리의 로또, 여성흡연자

여성의 흡연모습은 각인된다. 영화 <타짜>의 한 장면.
 여성의 흡연모습은 각인된다. 영화 <타짜>의 한 장면.
ⓒ 싸이더스 FN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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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세상의 모든 댓글에는 이유가 있는 법. 그리고 그 이유는 사회문화적 환경과 연결되어 있는 법. 이러한 웃지도 못할, 정말 울고 싶은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름의 주장은 매우 명료하다. "여성흡연자들을 많이 보았다", "나에게 피해를 준 여성흡연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논리는 성급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어떤 '여성'의 '흡연 장면'이 자신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는 이 놀랄만한 기억력이야말로 바로 여성흡연 자체를 '생소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증거 아닌가?

여성흡연자는 말 그대로 일당백이다. 나랑 내기해도 좋다. 지금 직접 관찰해보길. 집 밖에 나가서 다른 건물로 들어가기 전까지 흡연자들을 카운트하자. 논의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연령을 20~40대로 조절하고 공간변수도 보행을 하면서 흡연하는 경우(이른바 길빵), 그리고 버스정류장, 횡당보도 앞으로 제한하자. 1%? 100명의 흡연자가 있다면 여성흡연자는 1명 정도일 것이다. 대구에서는 장소만 잘 고르면 0%도 도전할 만하다.

문제는 이 어처구니없는 '수치'가 기억저장소에 너무나 또렷이 각인 된다는 것. 많은 사람들이 1%를 아주 강력하게 기억하는 것은 애초에 1%를 "대단한 무엇"으로 여겨야지만 가능하다. 맞다. 길거리에서의 여성흡연은 거의 로또 수준이다. 로또를 발견했으니 그 숫자가 평생 기억되는 것은 당연.

사람들은 해외에서 삼성, LG 광고이나 현대자동차를 발견하면 반가워한다. 하지만 다른 나라 사람의 눈에는 '광고판' 그 이상의 의미가 아니다. 여성의 흡연도 마찬가지다. 여성의 흡연은 언제나 '독특하고', '신기한' 현장이었다. 이건 좋은 표현이다. 내가 자란 곳에서는 '미친 년', '싸가지 밥 말아 처먹은 년'이었다. 그러니까 이 1%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거리의 로또다. 당첨된 로또 번호는 순식간에 캡처가 되고 스캔이 된다. 그 여자도 그렇게 나에게 기억된다.

"저 여자 담배 펴요"와 "저 남자 담배 펴요"의 다른 의미

강의를 할 때마다 내가 사회학적 관점을 설명하기 위해 던지는 질문이 있다. 먼저 한 학생을 지목하여 "와인을 아세요?"라고 물어본다. 100%가 "잘 모른다"고 대답한다(알아도 잘 모른다고 대답하는 것이 이른바 한국적 분위기).

다시 묻는다. 정말 모르냐고. 포도즙을 짜서 만든 그걸 정말 모르냐고 와인매장에 파는 와인을 모르냐고. 그렇다면 맥주, 소주, 막걸리도 모르냐고 묻는다. 그건 안다고 한다. 그런데 왜 모른다고 했느냐고 물어보면 애초 질문에 다른 의미가 있는 줄 알았단다.

'red(레드)'와 'white(화이트)'는 어떤 차이인지, 음식과의 궁합은 알고 있는지, 'dry(드라이)'와 'sweet(스윗)'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칠레와 프랑스 와인의 차이는 무엇이며, 게다가 와인을 마실 때 어떤 매너가 필요한지, 원샷 노브레이크 후 머리에 잔 털기가 금지되는 이유, 입에 머금고 오물오물 거리는 이유, 와인잔의 어디를 잡아야 하며, 어떻게 흔들면서 먹어야 하는지 등 말이다.

이걸 묻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잘 모른다"고 한다. 대단하다. 내가 그런 것을 묻는다고 생각하다니. 나랑 만나본 적도 없으면서.

이번에는 "삽겹살을 아세요?"라고 묻는다. 100%가 "안다"고 대답한다. 다시 묻는다. 정말로 아냐고. 나라별 삽겹살의 특징, 빈티지에 따른 맛의 차이, 육즙의 함유량은 얼마인지, 마블링의 상태를 구별하는 법, 몇 번을 뒤집어서 구워야 하며, 쌈장, 마늘, 양파, 야채들과 함께 먹을 때 그 적정비율을 알고 있느냐고 다그친다.

그런 건 잘 모른단다. 그런데 넌 왜 아냐고 대답했냐고 다그친다. 그러면 그 질문이 아닌 것으로 알았단다. 대단하다. 내가 그런 것을 묻지 않았다고 생각하다니. 나랑 만나본 적도 없으면서.

이처럼 무의식적 문장 하나에도 이미 수많은 '사회적 합의'가 동반되어 있다. 와인을 아느냐고 묻는 것은 '단순한' 인지능력 여부를 묻는 것이 아니다. 같은 음식이지만 삽겹살은 딱 거기까지다. 가장 놀라운 것은 이러한 대화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하고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단지 이 사회 안에 살아간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그렇게 비슷한 문화적 분위기를 체화한다.

"저 여자 담배 펴요"라는 질문. 내가 수백 번 물어 보았고 수천 번 들어 본 질문이다. 이 문장에는 "저 남자 담배 펴요"와는 완전히 다른 뜻이 동반되어 있다. 남자의 경우는 '흡연여부'가 중요한 변수일 때만 이 물음이 던져진다. 예를 들어 취향 자체를 묻거나, 혹은 금연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 혹은 건강과 관련된 테마가 나올 때 말이다.

그러나 여자의 흡연여부는 거시기하게도 매우 거시적인 차원에서 언급된다. 취향? 그런 것은 애초에 관심 없다. 오직 사람에 대한 평가를 하기 위함이다. 길을 지나가다가도 여성흡연자를 발견하게 되면 "여자가 말이야~"가 동반된다. 또 페미니스트를 욕하는 여러 논거 중에 "담배나 피는 년~"이 동반된다. 여성흡연은 소개팅의 조건에도, 며느리를 받아들이는 조건에도, 사회활동을 평가하는 조건에도 항상 포함되어 있다.

"저 여자 담배 펴요"라는 문장 하나만으로도 여성이 낙인될 수 있는 사회가 바로 한국이다. 이 메커니즘은 수십 년간 유지되고 있고 한국인들은 여기에 체화되어 있다. 이런 물음이 수만 번은 오갔을 것이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흡연하는 여성들을 본다. 연기가 나에게 피해를 준다. 이걸 어찌 까먹냐? 평생 안 까먹는다. 그러니 "여성흡연자들이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나의 주변적 서술에 일단 거품부터 문다. "내가 피해자다!"면서 난리다. 가련하기 짝이 없다. 미안하다. 여성흡연자는 일당백, 아니 일당천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온라인이프>에도 게재되었습니다.



태그:#여성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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