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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그림의 설치 예술작품, "로얄 블루 부동산"
 올리버 그림의 설치 예술작품, "로얄 블루 부동산"
ⓒ 이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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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과 북악산으로 둘러싸인 명당자리, 더군다나 청와대가 바로 코앞인 곳에 18층짜리 고급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면 어떨까?

물론,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청와대 주변에는 3층짜리 이상의 건물은 들어설 수 없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독일인 영상 설치 예술가 올리버 그림씨의 작품에서는 가능했다. 종로구 통의동에 위치한 쿤스트독(KunstDoc, 27일까지 전시)의 공간 프로젝트에는 그림씨의 작품 '로얄 블루 부동산'이 전시돼 있고, 부동산 안에는 이 꿈같은 고급 아파트 단지가 그려진 조감도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청와대 앞 18층 아파트... 분양자는 로얄 블루 부동산

"로얄 블루 부동산" 내부에 걸려있는 조감도
 "로얄 블루 부동산" 내부에 걸려있는 조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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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둔 아파트 단지. 그 앞으로 대통령 또는 외국 원수 호위를 위한 경호차량 행렬이 지나가고, 경찰차가 일반 차량들을 통제하고 있다.  

'로얄 블루 부동산'을 찾아 통의동에 들어섰을 때, 이 작품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지나가는 통의동 주민들 몇몇에게 설치 예술 작품을 아는지 물었지만, 다들 모르겠다고 한다. 그러다 막상 작품을 발견한 곳은?

'설마 공사가 한창인데, 예술 작품이 저런 곳에?'

"로얄 블루 부동산"과 그 옆 공사장
 "로얄 블루 부동산"과 그 옆 공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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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블루 부동산' 바로 옆은 공사로 매우 분주했다. 공사 감독관으로 보이는 분이, 위험하니 빨리 지나가라고 주의를 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한국의 여느 부동산 회사처럼 '재개발 전문과 뉴타운 상담'일을 한다는 '로얄 블루 부동산'. 서울 곳곳이 재개발과 뉴타운 건설로 몸살을 앓고 있지만, 청와대 주변에는 3층 이상의 건물은 들어서지도 못한다.

올리버 그림씨
 올리버 그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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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청와대 바로 옆에 18층짜리 고급 아파트를 그려놓다니. 게다가 대통령이나 외국 원수를 호위할 법한 검은색 경호 차량행렬과 경찰의 도로 통제. 과연 작가는 무슨 의도에서 이런 작품을 만들었을까? 혹시 정부 당국으로부터 어떤 '주의'를 받지는 않았을까? 도대체 작가는 누구일까? 

지난 17일, 용산구 보광동 자택에서 '로얄 블루 부동산'의 작가 올리버 그림씨를 만났다. 기자를 위해 버스 정류장까지 마중나오겠다는 그가, 좀 '많이' 친절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곧 그 이유를 알게됐다. 집 번지수만으로는 도저히 찾기 불가능할 정도로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길 너머에 그의 집이 위치했기 때문이다.

복잡하고 비좁은 골목길이었지만, 담쟁이 덩쿨로 둘러싸인 소박한 담장과 집 안 마당에서 뻗어 나온 각종 꽃나무로 이곳의 집들은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개성을 뽐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림씨는 이곳도 2~3년안에 재개발될 예정이라고 했다. 한남동 뉴타운이라는 이름하에 모두 없어지고 새로운 '럭셔리' 아파트로 들어찰 것이란다.

독일인으로 한국에 온 지 15년쯤 된 올리버 그림씨. 현재 홍익대 미대에서 부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유창한 한국어 구사는 물론 5·18 광주항쟁을 기리는 작품을 만든 적도 있을 만큼 한국에 관심이 많다.

한쪽은 전통 강조... 또 한쪽에서는 갈아엎기

- 제일 궁금했던 질문이 있다. 어떻게 청와대 옆에 부동산을 세울 생각을 했나?
"현재 로얄 블루 부동산이 있는 곳은 쿤스트독 미술관의 땅으로, 원래부터 설치 미술용으로 쓰이던 곳이다. 내가 미술관으로부터 설치예술작품을 의뢰받았을 때, 어떤 작품을 만들지 궁리하다가 이곳이 청와대 옆이라는 이유 때문에 부동산을 떠올렸다. 청와대 근처에서 산 적이 있어서 청와대 근처에는 3층 이상의 높은 건물은 세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로얄 블루'는 청와대의 청기와를 나타낸다. 청와대 또는 한국 정부가 다른 곳은 마구 개발하고 파헤치면서, 정작 청와대 주변을 보호하는 게 매우 모순적이고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국 정부가 진행하는 재개발 사업과 도시 계획 등이 매우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 작품에 난초 화분을 놓아둔 이유는 무엇인가?
"난이 한국의 전통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식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동산 사무실을 갈 때마다 자주 볼 수 있던 화분이 바로 난초 화분이었다. 그래서 이번 작품을 계획할 때, 난초가 부동산 사무실에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 왜 한국의 전통과 부동산 개발을 함께 떠올렸는지?
"한국이 한쪽에서는 전통을 지키자고 강조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조금이라도 오래된 것이면 '갈아엎어 버리는' 문화라고 느낀 적이 많다. 즉, 역사나 문화같은 축적된 무언가를 지키고 가꾸기보다는 다 갈아엎어 버리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에 더 몰두하는 것 말이다."

- 혹시 청와대 코앞에서 이런 설치물을 전시하는 것 때문에, 청와대로부터 어떤 불만을 받은 적이 있는지?
"내가 직접 무슨 얘기를 들은 적은 없다. 그러나 쿤스트독 갤러리에서 종로 경찰서 형사들의 방문을 받은 적이 있다고 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내게 갤러리의 한 큐레이터 전화번호를 직접 적어주었다. 갤러리 큐레이터에 따르면, '로얄 블루 부동산'에 대한 <한겨레>신문의 기사가 나간 날(13일), 종로경찰서의 사복 경찰 몇 명이 갤러리를 방문해 작가 및 작품을 전시한 의도 등에 대해 물어봤다고 한다. 이들은 전시 현장에도 직접 들러 작품을 확인했고, 조감도에 등장하는 경호 차량과 경찰차, 경찰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 작품에 설치된 전광판에서 한국어와 독일어로 번갈아 나오는 시가 있다. 무슨 의미인가?
"시의 내용은, '내가 꽃에 물을 주려고 했던 날이었다. 그러나 밖엔 이미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꽃에 물을 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땅은 이미 물에 흠뻑 젖어 있는데...'이다. 예전 분당의 한 아파트에 살았을 때, 당시 내가 가진 느낌을 담아 지었다. 그런데 바로 그 느낌이 '로얄 부동산'을 설치할 때 다시 떠올랐다. 나는 지금도 그 때와 마찬가지로 아파트에 사는 것이 끔찍하게 싫다."

필요악 아파트? 지방도 개발하면 사라진다

- 서울처럼 한정된 지역에 많은 인구가 사는 곳에서는, 아파트라는 주거 형태가 필요악 아닌가?
"서울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방도 같이 개발해야 한다. 서울로만 너무 집중되는 것이 큰 문제다. 인구가 지방으로 분산된다면 아파트라는 주거 형태가 꼭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 한국에서는 재개발 문제 때문에 용산참사 같은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혹시 독일에서도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지?
"독일에서는 70년대에 돈 없는 젊은이들, 특히 가난한 예술가들이 빈 집에 들어가서 살곤 했다. 이 빈 집들은 집주인이 이후에 땅값이 오를 것을 기대해 어떠한 수리도 하지 않은 채 버려두는 집들이었다. 이 집주인들이 독일 경찰에 신고를 해서 젊은이들을 끌어내게 만들기도 했지만, 용산참사 같은 공권력의 개입은 없었다. 독일에서는 한국에서처럼 동네 전체를 모조리 밀어내버리는 일은 없었다. 거주민들의 반대시위가 계속되면, 정부는 재개발 계획을 철회하는 일이 많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전통과 역사, 문화 등을 너무 쉽게 무시하는 현 한국의 세태가 너무 안타깝다. 한국의 전통문화, 아니 50~70년대 만들어진 것들만이라도 제발 보존했으면 좋겠다."

올리버 그림씨의 '로얄 블루 부동산 展'에 대한 작가노트를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서울시에서는 외국의 매체에 "Green Greener Seoul", "디자인 서울"이라는 문구로 서울을 홍보하지만, 실상은 도시 전체가 획일적인 아파트단지일 뿐이다. 그린벨트도 없애고 옛 것들은 전혀 신경쓰지 않으면서 개발한다. 그러면서도 전통, 애국을 강조한다... 그러한 개발이 서울 사람들에게 남기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태그:#로얄 블루 부동산, #올리버 그림, #재개발, #뉴타운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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