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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홋카이도의 중심인 삿포로(札幌)역에서 오타루(小樽)로 향하는 기차는 굳이 예매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많은 편수가 운행되고 있었다. 역 플랫폼에 잠시 서서 오타루행 기차를 기다렸다. 아름다운 삿포로의 여름과 겨울을 대비해 보여주는 광고판에 눈길이 갔다.

 

곧 기차가 도착했다. 기차는 삿포로의 서쪽 변두리를 지났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홋카이도의 들판이 나왔다.

 

 

기차가 몇 개의 역을 지나자 눈빛 시린 파란 바다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바다는 일망무제였다. 바다를 바라보는 인간, 나는 바다만 보면 왜 이리 설레는지 모르겠다. 철길은 바다와 맞닿은 채로 바다를 끼고 달리고 있었다. 예쁜 기차길이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저 바다 너머에는 러시아의 연해주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오타루 역에서 내리지 않고 오타루 역 한 정거장 전인 미나미 오타루(南小樽) 역에 내렸다. 미나미 오타루역은 이곳이 유명 여행지인 오타루의 역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한적하고 퇴락한 역이었다. 나는 미나미 오타루 역에서 가까운 오타루 오르골도(小樽 オルゴ-ル堂)를 먼저 둘러보고 예쁜 가게들이 몰려있는 사카이마치도리(堺町通り)를 지나 오타루 운하 쪽으로 걸어가기로 했다.

 

 

 한적한 길을 따라 조금 걸었다. 도로변에는 앙증맞고 귀여운 소형차들이 질서정연하게 주차되어 있었고 변두리 역 부근에 자리한 가게들은 손님도 없이 한적했다. 큰길을 만나 오른쪽으로 접어드니 사카이마치도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이 가까운 시간, 나는 아내와 딸을 데리고 우선 식사를 하기로 했다. 사카이마치도리와 이로나이모토도리(色內本通り)가 만나는 마르헨교차점 부근에 '베리 베리 스트로베리(VERY VERY STRAWBERRY)'라는 이태리 식당이 눈에 띄었다. 개항 이후 유럽문화의 영향이 시내 곳곳에 뿌리를 내린 오타루는 이태리 음식 등 유럽 음식도 수준 높기로 유명한 곳이다.

 

 

  우리는 홋카이도의 신선한 해산물이 들어간 스파게티를 주문했다. 스파게티 안에는 신선한 새우와 홍합, 오징어, 조개, 해삼, 버섯, 올리브, 토마토가 넉넉하게 들어 있었다. 여느 가이드북에도 나와 있지 않은 이 식당의 스파게티 맛은 서울 어느 명품 이태리 식당의 스파게티 맛에 뒤지지 않을 만큼 훌륭하다.

 

주인 아주머니는 일본인답지 않게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붙임성 있다. 달콤해 보이는 타르트 메뉴판을 보고 어떤 타르트가 있느냐고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너무 배가 부를 것 같아서 타르트는 주문하지 않았는데 스파게티를 다 먹을 즈음 잘라진 타르트 조각이 나왔다. 주인 아주머니에게 주문하지 않았다고 하자 흔쾌히 웃으면서 타르트를 다시 가져간다. 나의 서투른 일어 때문에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 같다. 스파게티와 함께 시원한 홍차를 들이켰다. 여름날의 갈증이 달아나는 듯 하다.

 

나는 가게 문을 열고 햇빛이 쏟아지는 오타루의 거리로 나섰다. 나의 심상에는 오타루가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오타루에 여름의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일본의 수많은 영화 속, 그림 같은 배경으로 등장하는 오타루. 나는 천지가 눈에 뒤덮인 일본 홋카이도 오타루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오타루의 눈 덮인 풍경을 노래로 그려낸 가수 조성모의 '가시나무 새'. 나는 한동안 그의 노래에 녹아 있는 오타루에 매료되어 있었다. 빨간 기차가 하얀 눈밭을 밀치며 나가는 모습이 음악과 어울려 너무나 아름다웠다.

 

나는 그 노래의 배경이 되었던 오타루 오르골도를 가기 위해 메르헨 교차로를 걷고 있었다. 순간 어디에선가 기차의 기적 소리가 울렸다. 머나먼 기억 속에 묻혀 있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소리는 괜히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그 소리는 캐나다의 시계 장인이 만든 증기시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오르골도 앞에 우뚝 솟은 증기시계에서는 매시간 마다 기적 소리와 함께 증기가 뿜어져 나온다. 가족과 함께 이 증기시계 앞에 서자마자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시간을 맞춘 듯이 눈앞에 나타난 증기를 보니 오늘 여행 운이 너무 좋은 것 같다. 지금은 물론 컴퓨터를 이용하여 이 증기시계 이벤트가 진행되고 있지만 세계에 3개 밖에 안 남은 증기시계를 아직도 작동시키는 사람들의 정성이 놀랍다. 증기시계를 둘러싸고 있는 1.5톤의 청동은 어찌나 알뜰히 보살폈는지 반짝반짝 윤이 난다.

 

백년의 역사를 간직한 붉은 벽돌의 오르골도 건물은 긴 역사 속에서 진한 갈색으로 변했지만 영화음악 속에서 보았던 모습 그대로이다. 영화음악 속, 눈 속에 묻혀 있던 오르골도는  작열하는 여름의 태양 아래에 있었다. 지어질 당시 그대로 남아 오타루시의 역사적 건축물로 지정된 오르골도의 외관에서는 잔잔한 운치가 느껴진다.

 

눈발 속의 오르골도에서는 우체국의 빨간 미니버스가 도착하고 있었다. 잘 생긴 우편 배달부 남자가 우편물을 들고 오르골도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이 오르골도에서 일하고 있는 '산소같은 여자'에게 다가온다. '산소 같은 여자'는 잘 생긴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라며 도자기로 만들어진 오르골을 떨어뜨린다. 그녀는 그가 떠난 후 가게의 의자에 앉아 상념에 젖는다.

 

 

나는 마음 속에 그려보았던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3층의 큰 공개홀 같은 느티나무 건물 안에는 3천개가 넘는다는 각양각색의 오르골이 있었다. 주변에 오르골을 파는 건물이 많이 있지만 왜 이 오르골도 본관이 가장 유명한 가게이고, 오르골도가 왜 오타루 운하와 더불어 오타루를 상징하는지 바로 이해가 되었다.

 

수많은 오르골들은 저마다의 음색을 퍼트리고 있었다. 오르골의 음악들은 모두 다르지만 한데 뒤섞이고 있었다. 은은한 오르골 소리는 이곳저곳에 있었으나 전혀 혼란스럽지 않았다. 근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공간 속에서 다양한 오르골의 음악들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오르골의 음악 사이에서 동양의 3개 국어가 뒤섞여 들린다. 오르골도 안에는 오직 한국, 일본, 중국의 3개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만이 있었다.

 

 '가시나무새'에 대한 상념이 깨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너무나 예쁜 가게 안에 들어선 신영이가 오르골들을 고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앙증맞은 오르골들이 저마다 다양한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이곳은 자연스럽게 지갑이 열리는 곳이었다.

 

 이왕 들어왔으니 집에 보관할 오르골 1,2개는 사고 선물용으로 아주 작은 오르골도 사가야 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 수많은 오르골 중에서 어떤 것을 사야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선물하기 좋은 오르골 종류가 많지만 일본의 물가 때문에 판매가격이 만만치 않다.

 

 

  앞발로 사람을 부르고 있는 고양이인 마네키네코(まねきねこ) 고양이와 같이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소재들이 오르골로 만들어져 있었다. 오르골도 안에는 보석함 오르골, 초밥 모양 오르골, 거울함 오르골, 대관람차 오르골, 유리천사 오르골, 증기시계 오르골, 원목 강아지 오르골, 첼로 오르골, 크리스탈 오르골, 벽걸이 장식 오르골, 부엉이 오르골이 지천이다.

 

신영이는 유독 스누피 강아지가 앉아있는 오르골을 사고 싶어 했다. 아내는 사진을 담을 수 있는 사진액자 오르골이 가장 실용적일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오르골 중에서 강아지 3마리가 액자 위에 앉아있는 오르골을 골랐다. 크지 않고 스누피도 귀여워서 집 거실에 두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강아지 오르골의 음악을 모두 들어보고 그중 마음에 드는 2개를 샀다. 그 액자 속에는 일본여행에서 찍은 베스트 사진을 담기로 했다.

 

 

  2층에 올라가니 1층에 전시된 수많은 오르골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장관이 펼쳐졌다. 2층에는 크리스탈 공예품이 조명을 받아 환상적인 빛을 내고 있고 귀여운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벽에 붙어 있었다. 유럽의 마을과 집들을 아기자기하게 복원한 미니어처 아래에는 유럽 각국의 역사를 설명하는 설명문이 자세하게 붙어 있다. 오르골의 본고장에 대한 일본인들의 동경이 묻어있는 작품들이다.

 

3층에는 자신이 선곡한 곡을 담아주는 오르골을 팔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오르골을 만들기 위해서는 예약이 필요했다. 나는 3층까지 구경하고 오르골도 밖으로 나섰다. 햇살을 받으며 많은 여행자들이 거리를 한가하게 걷고 있었다. 그리 번잡하지도 않으면서 사람 사는 마을 같은 정겨운 곳이다.

 

 '산소 같은 여자'가 눈을 맞으며 걸었던 길 위에 눈은 내리지 않았다. 그 사람이 걸었던 나트륨등 조명은 여름의 밝은 양지가 대신하고 있었다. 정말 얄밉게도 잘 다듬어진 가게들 사이로 오타루가 가장 번영했던 시절에 지어진 목조 가게들이 그 당시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내 옆에는 내게 정말로 산소 같이 소중한 2명의 여자가 있었다. 산소 같은 딸과 산소 같은 아내가 내 옆을 걷고 있었다. 나는 이 한가한 행복이 계속되기를 바랐다.


태그:#일본여행, #홋카이도, #오타루, #오르골도, #삿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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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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