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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기도문 암송을 11번 할것인가, 12번 할것인가를 두고 일어난 다툼으로 부족간에 살육을 벌이게 되는 상황을 다룬 피터브룩 연출 첫 내한 연극<11 그리고 12>
▲ 11과 12, 그 단순한 차이가 낳은 살육의 비극 단순히 기도문 암송을 11번 할것인가, 12번 할것인가를 두고 일어난 다툼으로 부족간에 살육을 벌이게 되는 상황을 다룬 피터브룩 연출 첫 내한 연극<11 그리고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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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7일부터 20일까지 LG아트센터에서 상연되었던 피터브룩 연출의 첫 내한 연극 <11 그리고 12>는 다국적 연기자들의 절제된 연기와 붉은 카펫 한장의 단순한 무대만으로 짙은 감동을 선사하였다.

특히 첫날인 17일 8시 저녁 공연은 우리나라 월드컵 대표팀의 16강 진출을 위한 아르헨티나전 경기시간(8시 반)과 겹친데다 봉은사 앞 도로의 붉은악마 응원 등으로 공연장으로 향하는 교통 또한 매우 혼잡했음에도 불구, 공연장 안은 관객으로 가득차 있었다.

피터브룩은 이미 현대 연극 연출의 최고 거장으로 불리우며 수많은 연극교과서들에 등장하는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릴 수 있는 연출가다. 스물 두살에 이미 로열오페라하우스의 공연감독이 되었고, 20대 중반에 초현실주의 화가 달리에게 무대디자인을 의뢰해 <살로메>를 공연하였다. 그는 40대 중반까지 세익스피어의 정극에서부터 웨스트엔드의 상업 코미디극, 프랑스 낭만극과 부조리극,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오페라까지 모든 장르를 섭렵했었다.

그런 그가 1970년, 45세의 나이로 영국을 떠나 프랑스로 거처를 옮기면서부터 '연극 본질로의 회귀'라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가장 유명해졌을 때 훌훌 털어버리고 그 자리를 박차 새로운 도전에 나선 것이다. 그리고 그 도전은 성공하였다. 그의 연극은 '빈 공간'의 연극으로 일컬어진다. 모든 불필요한 껍데기, 연출기법 그 자체를 제거하고 무의 공간으로 돌아가 순수한 연극 그 자체를 지향하게 된 것이다.

연출가 피터 브룩은 연극계에서는 이미 살아있는 전설이다.
▲ 피터 브룩 연출가 피터 브룩은 연극계에서는 이미 살아있는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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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파리에서 다국적 인재들의 실험집단인 CIRT(Centre International de Recherches Theatrales)를 창설, 미국 오프브로드웨이 배우를 비롯, 말리, 프랑스, 아프리카와 일본 배우들까지 함께 하여 처음 3년 동안은 수많은 워크숍과 실험을 시도, 파리에서 페르시아, 아프리카, 미국으로의 유랑을 해가며 '보편적인' 연극언어를 찾아 나섰고 그 여정은 지금까지 무려 40년간 계속 되어왔다.

이번에 그의 연출작으로 첫 내한 공연한 <11 그리고 12>는 9시간 상연으로 유명한 그의 초대형작 <마하바라타 The Mahabharata> 이후 꾸준히 관심을 가져온 아프리카 작가들 중 아마도우 함파테 바(Amadou Hampate Ba)의 자전적 소설을 마리 엘렌 에스티엔느(Marie-Helene Estienne)의 각색하여 2004년에 프랑스어로 상연된<티에노 보카(Tierno Bokar)>를 다시 영어로 재작업하여 2009년에 초연한 작품이다.

피터 브룩의 연극 <11 그리고 12>를 이끌어 가는 암쿠렐이 무대 첫머리에 등장하여 기도에 쓰는 염주알 하나를 들어 보이면서 "처음에는 아무 해도 없는 염주알이 커지고 커져서 폭탄이 되는 걸 제 눈으로 직접 봤어요"라고 말한다.
▲ 이 구슬이 커져서 폭탄이 된다 피터 브룩의 연극 <11 그리고 12>를 이끌어 가는 암쿠렐이 무대 첫머리에 등장하여 기도에 쓰는 염주알 하나를 들어 보이면서 "처음에는 아무 해도 없는 염주알이 커지고 커져서 폭탄이 되는 걸 제 눈으로 직접 봤어요"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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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원작자 아마도우 함파데 바는 극 중 주요 등장인물인 수피교 수도승 티에노 보카의 실제 제자였던 사람으로, 극이 시작됨과 동시에 나타나 나레이션을 통해 극을 이끌어가는 보카의 제자 암쿠렐은 원작자 자신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곳은 아프리카하고도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본디아그라다. 이곳은 원래 이슬람교의 한 종파인 신비주의, 수피교를 믿고 있으며 마을에는 종교 지도자 세이크 티자니와 그가 이끄는 사원이 있다.

이 사원의 수도승들은 새벽기도 후 특별기도문인 '새벽의 진주'를 11번 외우는 전통이 있었는데 어느날부터 우연히 12번 외우게 되었고, 지도자 셰이크 아메드 티자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특별한 유언을 남기지 않은 탓에 기도문 12번 외우는 것이 새로운 전통이 되어진다.

암쿠렐과 친구들은 틈만나면 스승인 티에노 보카에게 찾아가 세상 이치에 대해 물어본다.
▲ 티에노 보카와 제자들 암쿠렐과 친구들은 틈만나면 스승인 티에노 보카에게 찾아가 세상 이치에 대해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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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2번 기도를 11번 기도로 되돌려 놓기 위해 알제리에서 온 셰이크 라크다르가 후계자로 삼은 셰리프 하말라는 기도문 암송을 다시 11번으로 할 것을 주장하며 종교적 파벌이 형성되게 되어 마찰을 빚기 시작한다.

암쿠렐은 스승인 티에노 보카의 제자로 그의 조언에 따라 본디아그라를 식민통치하고 있는 프랑스의 식민학교를 가게 되고 거기서 교육을 받아 성장한 후 프랑스 식민통치의 '항시 해직가능 조건부 임시직' 말단 서기가 된다.

암쿠렐이 성장하여 어른이 되고 직장을 얻었을 시점, 기도문 암송을 11번으로 할 것을 주장하는 측과 12번으로 할 것을 주장하는 측의 대립은 점점 심해지고 격화된다. 심지어 셰리프 하말라의 아들 바바에게 이교도라며 발에 불을 붙이기까지 하고 바바는 이들을 모두 죽이게 된다.

암쿠렐은 스승의 조언에 따라 프랑스 식민학교로 진학한다. 학교를 졸업한 암쿠렐은 프랑스 식민정부의 하급관료가 되고 거기서 식민정부가 부족들과 셰이크 하말라를 탄압하는 것들을 목격하게 된다.
▲ 배를 타고 떠나는 암쿠렐 암쿠렐은 스승의 조언에 따라 프랑스 식민학교로 진학한다. 학교를 졸업한 암쿠렐은 프랑스 식민정부의 하급관료가 되고 거기서 식민정부가 부족들과 셰이크 하말라를 탄압하는 것들을 목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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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식민정부의 폭정을 보며 식민정부의 하급관료직을 그만두어야겠다고 말하는 암쿠렐에게 티에노 보카는 잘못된 처벌을 받기 일쑤인 희생자들을 대신해 정부와의 사이에서 중개를 하라며 조언한다.
▲ 티에노 보카에게 조언을 구하는 암쿠렐 프랑스 식민정부의 폭정을 보며 식민정부의 하급관료직을 그만두어야겠다고 말하는 암쿠렐에게 티에노 보카는 잘못된 처벌을 받기 일쑤인 희생자들을 대신해 정부와의 사이에서 중개를 하라며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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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에노 보카는 11번 암송을 주장하다 추방당한 하말라에게도 이유가 있을거라며 그를 찾아가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돌아와 부족들에게 11번 암송도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다 오히려 그 역시도 부족민 모두에게 외면받는 신세가 되고 만다.

셰리프 하말라는 식민지배를 하고 있는 프랑스 총독 브와송 장군에 의해 프랑스로 이송되어 거기서 죽음을 맞게되고 티에노 보카 역시 따돌림 받다 쓸쓸히 죽음을 맞게 되면서 마침내 11번과 12번을 둘러싼 분쟁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

티에노 보카는 기도문 암송 횟수에 대한 견해차를 좁히기 위해 셰리프 하말라를 찾아 나이오로로 간다. 거기서 두사람은 서로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고 결국 보카가 하말라의 11번 암송을 존중하게 된다.
▲ 하말라를 찾아가는 티에노 보카 티에노 보카는 기도문 암송 횟수에 대한 견해차를 좁히기 위해 셰리프 하말라를 찾아 나이오로로 간다. 거기서 두사람은 서로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고 결국 보카가 하말라의 11번 암송을 존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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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에노 보카는 셰리프 하말라의 기도문 11번 암송을 존중해 줄것을 주장했다는 이유만으로 부족민 모두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마침내 쓸쓸한 죽음을 맞게 된다.
▲ 쓸쓸한 죽음을 맞는 티에노 보카 티에노 보카는 셰리프 하말라의 기도문 11번 암송을 존중해 줄것을 주장했다는 이유만으로 부족민 모두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마침내 쓸쓸한 죽음을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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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11 그리고 12>에 나오는 기도문 암송 횟수를 둘러싼 분쟁과 같은 상황들은 굉장히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소재다. 멀리 가지 않고 당장 우리나라 역사만 보더라도 조선시대 당파싸움에서 국상 장례 절차상의 사소한 이견을 빌미로 귀양을 보내고 사약을 내리는 등의 사례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게다가 프랑스 식민정부가 부족들간의 이 분쟁을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더욱 공고화하는데 활용하는 장면 역시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한 장면이다. 너무나 많은 사례들이 있는데 굳이 예를 들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기자는 개인적으로 부조리극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부조리극은 말 그대로 극의 형식이 부조리하다는 것인데 실제로는 부조리한 극 형식을 빌어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부조리극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비록 연극 공연이라는 간접적인 방식을 취함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직접적인 표현으로 호소한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부조리한 극 형식으로 인해 해석의 여지가 더 많아야 할텐데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경우들을 더 많이 보았다.

반면 피터 브룩의 이 연극은 정극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과장이 전혀 없는 배우들의 절제된 연기와 단순미의 극치를 선사하는 간소한 무대 위에서 인류에 가장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부조리한 현상을 고발하고 있다. 지극히 보편적이기에 딱히 어느 누구를 고발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부조리에 일정 부분 가담하고 있는 관객 스스로를 성찰하게 하고 있다.

솔직히 남에게 화살을 돌릴 일이 아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 보라. 과연 자기 자신도 이러한 부조리에 일상적으로 동참하고 있지는 않은지? 남녀의 차이, 인종의 차이, 종교, 정당, 지역, 학벌 등등..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자신과의 차이로 인해 비관용적이며 비타협적, 차별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지를 말이다.

배우들은 결코 몰입하거나 열정적인듯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심지어 암쿠렐 역을 맡은 배우는 두 사람이 붉은 천을 감싸 배 모양으로 만든 위에 올라타 있는 장면을 보고 웃는 관객들을 향해 자신도 씨익 미소를 보여주기까지 했다. 내내 지속되는 내레이션과 함께 자신이 무대 위의 배우라는 것을 상기시켜주려는듯, 브레히트적 소외(alienation, 거리두기, 멀게 하기, 낯설게 하기) 효과에 치중한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접근법으로 인해 관객인 나 자신이 훨씬 더 객관화되고 타자화 되었지만 셰리프 하말라와 티에노 보카가 보여준 저항과 관용의 정신, 그리고 그들의 희생이 보여준 감동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눈물이 나오려할 정도로 슬퍼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감상에 빠지기 보다는 오히려 지극히 객관화된 상태에서 스스로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게끔 해 주었다. 평범할 수 있는 관용이라는 가치를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


태그:#11 그리고 12, #피터 브룩, #LG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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