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

현대시조의 역사가 백 년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5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그 백년여 동안 시조단은 대체적으로 평온했다. 1970년대를 기점으로 구중서의 <한국리얼리즘 문학의 형성>(1970), 임헌영의 <문학의 시대는 갔는가>(1978), 백낙청의 <민족문학의 새로운 고비를 맞아>(1983) 등의 논저들이 제기한 발전적 논쟁들로 '참여문학' '리얼리즘 문학' 또는 '민족문학' 등의 문제들이 들끓었던 시절을 기억하면 자못 시조단의 '평온'이 씁쓸한 뒷맛을 가지는 것은 필자만의 소회는 아닐 것이다.

 

'환멸과 희망이 공존하는 시대야말로 참된 문학은 진실성을 갖는다. 그래서 체제 내적 소산인 환멸의 독소를 배기(排氣)시키고 새 시대의 희망을 통풍하는 복음(福音)으로서의 문학을 이 시대는 뜨겁게 찾고 있는 것이다.'

 

임헌영은 그의 저서 <문학의 시대는 갔는가>(평민사, 1978) 서문에서 진지하게 문학의 현실 참여 문제를 제기했다. 문단이 불우하였던 국내의 비정상적인 현실 문제에 끝없는 이의와 문제점을 제기하며 시대와 불화할 때에도 시조는 한눈을 팔지 않았다.

 

굳이 목숨까지 내어 놓은 어느 시인과 옥살이를 마다하지 않은 소설가를 거론하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이 대목에서 현대시조가 왜 주변문학으로 주목 받지 못하였는가에 대한 작은 답을 스스로 찾아내는 데 인색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 시조가 늘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시절가조(時節歌調)'로서의 진정한 모습이 박현덕 시인의 기량에서 나온 것을 현대시조사의 주요한 이정표로 세우고자 한다.

 

2.

시인은 늘 시대와 불화하는 객체일 수밖에 없는가. 이 구차한 질문은 이미 선문답이 되고도 남는 말이다. 헝가리의 학자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시인은 시대의 중요한 관찰자요 파수군임을 포기하면 안 된다. 경제적으로 주목 받을 만한 발전을 이루어낸 국가의 구성원으로 자칫 우리가 이미 선진국의 일원이 된 것 같은 착각으로 거들먹거릴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허기를 피하고 많은 국민들이 겨우 고단한 삶을 면했을 뿐 아직도 노동자가 불법 파업 명목으로 몇 년 동안이나 도망 다니다가 올망졸망한 세 아이들의 눈망울을 남기고 자신의 몸에 스스로 불을 질러 목숨을 끊고, 가난한 노인이 생사확인도 안 되는 자식이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 수급자가 되지 못하며, 초등학생이 한 끼의 무상급식을 받으려면 통합지원서에 담임교사의 지원추천서, 학생복지심사위원회와 학교운영위원회의 심사를 받아야만 하는 몰인격의 절차가 필요한 나라인 것이다.

 

박현덕의 시집을 읽으며 필자는 아직도 이런 시편들이 써지는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때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이런 시를 썼을까'하는 질문에서 출발한 답은 빈부의 악순환과 무기력의 대물림이 현존하는 사회구조가 더욱 강화되었다는 결론에서 멈추어야 했다. 특목고와 사법시험의 합격자 분포가 서울 특정지역 출신자들에서 현저하게 높게 나타났다는 사실은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이제 개천에서 용이 나고 개똥밭에 인물 난다는 속담은 지난 시절의 말씀으로나 기억될 것이다.

 

공장은 감옥이다 허리 펴지 못하고

왼종일 납땜하다 런닝에 소금꽃 피고

퇴근길 몇 점 먹은 비계가

자꾸 목에 걸린다.

 

                                             - <우린 풀꽃이다1> 전문 -

 

이 역설적인 제목을 가진 시를 읽다 보면 우리는 마치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을 읽고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또 <송정리 시편>의 용보촌은 김명인이 교사 초임지인 보산리에서 눈에 불을 켜고 쓴 그의 첫 시집 <동두천>과 <머나 먼 곳 스와니>를 떠올리게 한다. 더 나아가 김명수의 <월식> <하급반 교과서>는 물론이요,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이문구의 <우리 동네>, 조금 더 멀게는 손창섭의 <잉여인간> 등을 연상케 하고도 남는다.

 

박현덕의 이번 시집이 위의 현실 참여적 작품들과 큰 차이가 나지 않게 읽히는 것은 지금도 약자가 살아가는 세상은 달라지기는커녕 더욱 험난한 현실을 맞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반 정도가 '자신은 중산층' 이라고 생각한다는 보수 언론의 여론조사는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 것인가. 그렇다면 시인 박현덕이 소위 진보적 삐딱한 시각으로 세상을 곡해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지난 달 시사 주간지 <한겨레 21>이 탐사기획으로 다루었던 '영구 빈곤 보고서'를 살펴보면 우리 사회의 빈부격차를 실감할 수 있다. 영구 빈곤의 둥지, 무기력의 대물림, 격리당한 아이들의 미래 등의 소제목으로 탐사한 기사들은 국민소득 2만불 시대가 무색할 정도로 아직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혀 있으며 빈곤층이 그것을 극복하기란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

 

이러한 불균형적인 현실에서 박현덕 시인은 누구보다 참되고 신실한 시인의 눈으로 그들을 보듬어 안고 함께 뒹굴며 조금이라도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시인의 말에 자서한 것처럼 '비탈진 언덕에 올라/ 다시 한 그루의/ 유실수를 심'은 것이리라.

 

3.

<스쿠터 언니>의 해설에서 고명철은 "시조와 사회학적 상상력의 관계가 밀접하다"라고 전제하고 "조선 후기 중인 가객들에 의해 사설시조가 널리 퍼지면서 현실에 대한 비판적 풍자를 보이기도 하였다"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시조의 시학에서 그것을 아예 무시하고 있지는 않는지, 아니면 시조의 시학에서 본령이 아닌 부차적인 것으로 제껴두려는 게 아닌지 곰곰 숙고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라며 시조단의 방관을 꼬집고 있다. 그러면서 "<스쿠터 언니>를 통해 그는 시조의 영역을 확장시켜, 시조가 본래 지닌 사회학적 상상력의 숨결을 지금, 이곳의 시조 쓰기에 불어 넣고 있다"며 박현덕의 작업을 '시조의 정치학'이라 평하고 있다.

 

탈출과 완결이라는 미학의 양극은 많은 논쟁을 일으키면서 서로 조우하고 길항하며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다. 순수와 참여의 논쟁은 그 대표적인 산물로 특히 산업화가 유발시킨 문제들은 우리 시대가 피해 갈 수 없는 중간 경유지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것이든 하나가 강조되면 둘은 상생하기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부딪치며 조금씩 자기의 자리를 양보하고 상대의 터를 인정하면서 대하를 이루는 것이다.

 

불꽃 튀기며

지지지지

외식 가잔 아우성도

 

불꽃 튀기며

지지지지

틈새 보인 가정도

 

이십년 비정규직으로

살아온 것

메꾸고 싶다

                                              - <용접 1> 전문 -

 

시제목인 '용접'은 두 금속을 녹여 붙인다는 공업 용어이다. 전기의 힘을 빌리거나 가스의 힘을 빌려 강하고 단단한 두 금속체를 녹여서 하나로 잇는 작업인데 두 금속 물체는 쉽게 이어지지 않는다. 고온의 힘과 기술만이 두 물체를 융합시킬 수 있는 것이다.

 

 가정이라는 한 곳에서는 아내와 자식들이, 다른 한 곳인 직장에서는 노동이 한 비정규직 사내를 요구한다. 그러나 어느 한 곳에서도 그는 환영받지 못하는 서글픈 존재일 뿐이다. 외식 한 번 제대로 시켜주지 못하는 가장이며 직장에서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비정규직인 처지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용접을 통하여 조화할 수 없는 두 현실을 융합시키고 싶은 것이다. 뒤틀어져 삐그덕 거리는 양극을 '메꾸고 싶은' 것이다.

 

'비정규직'이라는 용어가 지금은 우리에게 낯익은 말이지만 살기가 더 곤궁했던 70년대에는 그래도 이런 차별적 대우는 많지 않았다. 최저임금이 형편없이 낮기는 하였지만 직원들은 거의 비슷비슷한 박봉을 받으며 일했다. 그러나 노동운동이 본격화하고 고용과 노동조건 개선의 문제가 강력하게 제기되면서 오히려 시한부적 성격을 띤 이런 용어가 노동계를 휘젓게 된 것이다. 마치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는 그레셤의 법칙처럼 질은 좋지만 고임금의 인재들이 설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이런 극단적 흐름은 철저하게 자본주의적 원칙에 기초한 비인간적이며 반사회적인 결과를 초래하며 많은 노동자들의 명줄을 옥죄는 퇴행적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4.

<스쿠터 언니>라는 시집 제목은 아주 낯설다. 아니 낯이 설다기 보다는 누구나 다 알면서도 입에 올리기 싫어하는, 다의적(多義的)인 해석이 가능한 현실을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스쿠터를 타고 다니는 언니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어린 아이가 아니면 다 알지만, 애써 외면하는 우리 시대의 치부를 시집 제목으로 삼은 것 자체가 많은 것들을 시사한다. 이는 다분히 고발적이며 역설적으로는 반성의 의미를 짙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검사와 스폰서'만큼이나 눈 가리고 아웅하는 사회를 시인의 이름으로 응징한다는 뜻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시집 장정을 펴면 바로 검은 색 배접지가 섬뜩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 '죽은 정의'를 애도하는 출판 기획자의 깊은 의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확대 해석일까.

 

시집에는 많은 역 이름이 등장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울, 부산, 광주역 등이 아닌 언저리에 있는 역들만 나온다. 남광주, 송정리, 영등포, 가리봉역들이 그것이다. 이곳에는 오래 전부터 아직까지 사창가가 형성되어 있거나 막일꾼이 모여 있는 허름한 풍경이 보일 뿐 민자역사의 위용은 어디에도 없다.

 

송정리역 앞 1003번지

맨몸으로 버티는

 

퇴폐이용원

그만둔

스물넷

누이가 산다

 

밤마다

환장하게 피어

쪽방 밝힐

자궁꽃

                                             - (송정리 詩篇 1) 전문 -

 

'맨몸으로 버텨야' 하는 삶이 오죽할까. 남자도 아닌 젊은 처자임에야 일러 무엇하겠는가. 이 시집에 실린 대부분의 시편에는 오로지 '맨몸으로 버텨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또한 그 슬픈 영혼들에게 바치는 시인의 헌사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밤마다/ 환장하게 피어/ 쪽방 밝힐/ 자궁꽃' 이렇게 이 시의 종장을 읽고 나면 헉 하고 숨이 막힐 따름이다. '환장(換腸)' 이라는 단어 하나가 '피어' 밝힐 '자궁꽃'을 더욱 슬프고 애처롭게 들러리 서고 있는 모습이 눈물을 머금게 한다. 그러나 아직 이 정도의 장면에 눈물을 흘릴 일이 아니다.

 

자동차 프레스에

압착된

오른팔은

 

종합병원 음식물

쓰레기통에 들어갔고

 

가끔씩 파키스탄 향해

철새처럼 날아간다

                                                     - <불법체류자>의 둘째 수 -

 

일요일 아침 철야하고 예배당 가는 길

신나에 취해 가랑잎처럼 흔들흔들 걸어간

소년의 축 처진 어깨 성경이 매달려 있다

                                                     - <예배당 가는 길>의 셋째 수 -

 

1960년대에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미국의 경제학자인 로스토우의 이론을 바탕으로 기획된 불균형 경제이론으로 이미 실행 초기 단계에서부터 심각한 문제점을 감수할 각오를 해야만 하는 이론이었다. 물론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한국의 상황을 고려한다고 하여도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부작용들은 예상된 것들이었다. 이제 그것들의 잘잘못을 따지거나 공룡화된 재벌기업 중심의 경제성장을 무너트릴 수는 없을 테지만 그 부작용을 최소화 하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수십 년 전엔 우리가 기꺼이 짊어졌던 고된 노동을 해외인력이 떠안은 지도 제법 오래 되었다. 우리가 아메리칸의 꿈을 품고 태평양을 건넜던 것처럼 동남아시아의 많은 노동자들도 '코리안 드림'을 꿈꾸다 다치고 죽는 험한 지경에 놓여 있는 것이다. 불법체류자의 입장에서 의료혜택이나 2세 교육을 지원받을 수 없는 그들의 입지는 바로 얼마 전 우리들이 미국에서 겪은 그 상황과 다를 바 없다. '압착된 오른 팔'과 '신나에 취해 축 처진 어깨'에도 시인은 '철새' 와 '성경'을 얹어 주었다. 비록 육체적, 금전적 고통을 나눌 수는 없지만 시대의 증인으로서 이들의 아픔을 분담하고 있는 것이다.

 

 

5.

<스쿠터 언니>의 시편들은 비록 직설적이고 거칠지만 그들이 처한 상황을 보듬고 나누는 데는 더 없이 따스하다. 많은 행들이 '~다' 로 끝나는 간결함과 수없이 생략된 조사들의 자리에는 냉정히 더듬어 보라는 의지가 조붓하게 숨겨져 있다. 시인은 남도의 소읍에 살지만 그의 생각과 예사롭지 않은 눈길들은 낮고 험난한 시절의 샛길에서 종종거리며 잰걸음을 치고 있다. 어느 시인이 세상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이야기 하고 싶지 않으랴. 그러나 보기 좋은 것들은 누가 거들어 주지 않아도 스스로 아름답고 황홀하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들에게는 작은 손짓과 눈웃음마저 커다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이 작은 시집에 과한 이론과 편파적 응원을 보냈다고 탓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시조 백년이 모두에 기술한 바와 같이 '평온' 하였다면 <스쿠터 언니>로 인하여 난장의 한복판에 따듯하게 내려와 진정한 시절가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만으로도 필자는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박현덕 시인이 심은 유실수가 '떨어지는 꽃의 쓰라림과/ 폭풍을 껴안고' 험한 세파를 잘 넘어갔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이 시집에 점철된 험하고 힘든 고난의 행간들이 아름답고 박진감 넘치는 박현덕의 새 시들로 가득해지기를 희망한다.


스쿠터 언니

박현덕 지음, 문학들(2010)


태그:#박현덕, 정용국, 스쿠터 언니, 문학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시인.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조시인협회 사무총장.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차장.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