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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레버만의 〈예수를 그린 사람들〉
▲ 책겉그림 드레버만의 〈예수를 그린 사람들〉
ⓒ 피피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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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영화는 원작만큼이나 더 큰 감동과 교훈을 준다. 한 편의 명화도 때론 원작보다 더 큰 상상력과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도 성경의 본래 이야기보다 더 큰 감동과 교훈을 안겨준다. 등이 굽은 힘없는 아버지가 무일푼 대머리가 된 아들을 품는 모습은 성경보다 더 풍부한 상상력과 자극을 제공한다.

샤갈의 <예수 고난 십자가>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아비규환에 떨고 있는 수많은 인간을 연민의 정으로 바라보는 모습을 담아낸다. 그에 비해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 에밀 놀데의 <십자가에 못박힘>은 화폭 가득 채운 10명의 주인공과 십자가를 진 예수를 그려놓을 뿐이다. 그림을 감상하는 관람객들이 화폭의 실제 주인공들이 되어 오늘 이 시대의 예수로 살기를 바라는 의도일 것이다.

유럽의 베스트셀러 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오이겐 드레버만의 <예수를 그린 사람들>(피피엔)은 세계적인 화가들이 그린 예수의 그림을 통해 자기만의 철학과 문학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예수의 일생을 해석하고 있다. 책 속에 들어 있는 50점이 넘는 그림 해설과 함께 인간 예수의 고뇌와 그 진실들을 깊이 들여다 보게 해 주며, 곧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할 모습도 함께 생각하도록 이끌어 준다.

"복음서들마다 유토피아와 같은 세계를 구가하는 시적 비전을 품고 있다. 그러한 세상은 나사렛 예수의 모습이 없었다면, 동경하기는 하지만 이룰 수는 없는 유토피아로 끝나버렸을 것이다. 그가 몸소 실천했던 인간의 꿈이었기에 그 꿈은 인간 구원의 틀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가 몸소 살고 행동함을 통해 보여준 구원의 길이었다. 기독교 미술 작품들은 모두 이러한 비전을 담았다. 동경하는 꿈의 세계를 그렸고, 변화의 기적을 현재의 순간으로 끌어냈다."(9쪽)

드레버만은 예수의 일생과 관련된 모든 사건들이 현재성으로 되살아날 때에 그 의미가 명백해지고 명맥을 잇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아기 예수의 동정녀 탄생도, 오병이의 기적 사건도, 파도와 풍랑을 잠잠케 한 사건도, 그의 십자가 사건도, 그리고 부활사건도 오늘 우리 시대에 재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 삶에 더 구체화시킬 수 있는 자극제가 바로 그 그림들이란 것이다.

〈거룩한 밤〉
▲ 놀데의 작품 〈거룩한 밤〉
ⓒ 피피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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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버만이 읽어나가는 그림들 중에 내게 큰 감동과 색다른 교훈을 안겨 준 그림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둘러 싼 에밀 놀데의 <거룩한 밤>과 렘브란트의 <저녁의 성스런 가족>, 부자 농부의 이야기를 그린 얀 프로보스트의 <구두쇠와 죽음>, 예수를 배신한 베드로의 통곡을 담고 있는 오토 딕스의 <베드로와 수탉>이었다.

〈저녁의 성스런 가족〉
▲ 렘브란트의 작품 〈저녁의 성스런 가족〉
ⓒ 피피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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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놀데의 <거룩한 밤>과 렘브란트의 <저녁의 성스런 가족>은 각기 예수의 탄생과 그 가족을 그려주고 있다. 놀라운 것은 에밀 놀데의 그림 속에는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아기 예수가 왕성한 힘을 발휘하는데 반해, 렘브란트의 그림 속 가족은 힘없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드레버만은 놀데가 살육과 광기의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게 하려는 부모의 의지를 담아내고 있고 렘브란트는 힘든 여건 속에서도 지금 그곳에 함께 하고 있는 아기 예수의 신비를 맛보도록 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고, 밝혀준다.

얀 프로보스트의 〈구두쇠와 죽음〉
▲ 얀 프로보스트의 작품 얀 프로보스트의 〈구두쇠와 죽음〉
ⓒ 피피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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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부자 농부의 이야기를 그린 얀 프로보스트의 <구두쇠와 죽음>은 사실 성경의 누가복음12장에 나오는 인물을 그린 작품이다. 부자는 작은 헛간을 헐고, 그 자리에 더 큰 사업 확장의 자리를 꾸미려 한다. 마침내 모든 곡식들을 창고에 들이고 인생을 즐기려하는데 그때가 바로 그의 영혼을 정리해야 하는 때였던 것이다.

보통의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죽음은 저편에 있는 세상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프로보스트는 그 부자 바로 옆에 해골이 된 그 영혼을 그려놓음으로써, 죽음은 언제나 함께 따라다니고 있는 것임을 부각시켜 준다. 더욱이 그가 셈하고 있는 채권 금액도 송장의 손과 맞닿아 있음도 강조하고 있다.

얀 프로보스트의〈구두쇠와 죽음〉
▲ 얀 프로보스트의 작품 얀 프로보스트의〈구두쇠와 죽음〉
ⓒ 피피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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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자하니, 우리나라의 최고 갑부에 올라 있는 모 그룹 회장은 하루에 한 끼 식사에 세 시간의 잠을 잔다고 한다. 그만큼 스트레스와 바쁜 업무로 인해 그 작은 식사와 시간 관리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식사와 잠자는 그 시간이 직원들의 복지와 후생을 위한다면 더할 바 없이 아름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과 자기 혈족의 배만 채우기 위한 관리라면 그것은 <구두쇠와 죽음>을 곱씹어 볼 문제임에 틀림없다. 아니 그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서도 성공과 출세에 혈안이 돼 있는 오늘날의 신앙인들이 눈여겨봐야 할 그림일 것이다

오토 딕스의 석판화 <베드로와 수탉>은 예수를 배신한 것을 뉘우치고 밖에 나가 통곡하고 있는 베드로의 모습을 담고 있는 그림이다. 그것은 성경의 마가복음 14장 31절의 이야기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베드로는 평소 그가 가장 하지 말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던 바를 자신의 의지로 막지 못했음에 대해 망연자실했다. 그에 따른 통곡과 눈물이 거침없이 쏟아진 것이다.

놀라운 건 <베드로와 수탉>에서 보여주는 닭의 크기와 몸짓과 소리 지르는 입의 모습에 비해,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 안고 있는 베드로의 모습은 한쪽 모퉁이에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인간은 때로 짐승보다 못한 내면과 실상을 지니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거대하고 막강한 수탉은 마치 초월적 힘을 지닌 봉홧불처럼 베드로의 곁에 서서 사람들의 골수까지 스며들도록 크게 울어댄다. 무자비하게 보이면서도 일깨우는 듯, 요청하는 듯, 또는 찢어질듯한 수탉의 울음소리는 베드로를 넘어 온 세상에 울려 퍼진다. 두려움과 죄의 세계, 이미 때늦은 후회의 세계 위로 빚에 젖어 축축한 몸의 태양이 무겁게 떠오른다. 우리의 부끄러움을 영원히 감추어주어야 할 밤을 물리치고 새로 다가오는 아침을 우리는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140쪽)

아무쪼록 70여권에 이르는 대 저술과 사회 각층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드레버만의 이 책을 통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속의 예수를 이 땅에 되살아냈으면 한다. 그것은, 드레버만의 바람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그때 그 시절의 신비로운 예수를 오늘 이 자리의 예수로 현존케 할 때에 가능할 것이다. 그만큼 그리스도인들 각자가 자기 삶에 있어서 사랑과 동정과 연민을 지닌 다양한 인간애의 예수를 부활시킬 때에 가능하지 싶다.


예수를 그린 사람들 - 명화를 통해 느끼는 기독교의 진실

오이겐 드레버만 지음, 도복선 옮김, 피피엔(2010)


태그:#드레버만, #예수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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