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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수원 골목길에서

수원에는 칠보산이 있고, 칠보산 자락 한켠에는 제도권학교가 아닌 대안학교인 칠보산자유학교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아이들과 함께하는 분들을 만날 일이 있어 인천부터 자전거를 타고 찾아가 볼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날이 몹시 덥고 후끈후끈하기 때문에 자칫 자전거로 달려가다 기운이 다 빠지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어떻게 할까 하고 망설이다가, 인천에서는 주안역까지만 자전거로 달리며 골목마실을 하고, 주안부터는 전철을 타고 구로역에서 갈아탄 다음 수원에 닿기 앞서 시골 언저리에서 내린 뒤 수원 골목길을 구비구비 돌아서 가 볼까 하고 생각합니다. 인천부터 수원까지 내처 달릴지라도 전철로 돌아돌아 가는 시간하고 얼추 비슷하지만, 전철에 몸을 맡기고 쉬엄쉬엄 간 다음 수원 골목을 느긋이 돌아보아도 좋겠다고 느낍니다.

아이하고 아이 엄마는 집에 있고, 모처럼 아이 아빠 혼자서 전철을 타고 나들이를 나옵니다. 이렇게 아빠 홀로 나들이를 나오는 일이란 몹시 드문 요즈음입니다. 언제 이렇게 다녀 보았나 싶을 만큼 늘 세 식구가 집에서고 집 바깥에서고 함께 움직이고 있습니다. 혼자 움직이니 홀가분해서 좋다고 느끼는 가운데 어쩐지 집식구한테 미안하고, 나 혼자 좋은 재미(?)를 보는가 싶기도 합니다. 아이 볼 근심을 하지 않는데다가, 전철에서 책 하나 펼치고 찬찬히 읽으니 마치 딴 나라에 온 듯하기도 합니다.

수원역에 닿기 앞서 호젓한 전철역에서 내립니다. 내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수원 시내가 어디께인가 하고 어림하면서 따뜻하다못해 무더운 여름 햇살을 등에 이고 자전거를 달립니다. 수원도 제법 넓어 어느 쪽은 복닥복닥 도심지이지만, 어느 쪽은 산골이거나 논밭으로 길게 이어져 있곤 합니다.

수원 골목에서도 빈자리 알뜰히 살려 텃밭을 일구는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수원 골목에서도 빈자리 알뜰히 살려 텃밭을 일구는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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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밭과 아파트와 도심지가 야릇하게 어우러져 있는 수원입니다.
 논밭과 아파트와 도심지가 야릇하게 어우러져 있는 수원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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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밭을 지나고 도심지를 살짝 지난 다음 화서동으로 접어들고 고등동으로 이어집니다. 인천 골목동네와 견준다면 넓이가 인천보다 좁다 할 만하지만 수원 화서동이나 고등동 골목 또한 제법 넓습니다. 그리고, 화서동과 고등동 골목 또한 이곳에서 일찍부터 뿌리내리며 살아온 사람들 자취가 곳곳에 알뜰히 서려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해묵은 자취와 뿌리 내음'이 하루 빨리 새 아파트로 바꾸어야 할 모습이라고 느낄 수 있을 텐데, 어떤 사람은 이 '오래된 자국과 뿌리 빛깔'이란 가난하고 수수한 사람들이 조촐하게 어우러지고 어깨동무하면서 일군 따사롭고 넉넉한 보금자리로 느낍니다.

골목 곳곳에 꽃그릇이 있고, 빈틈 하나하나 알뜰히 살피며 빨랫줄을 드리우며, 흙 한 뼘 없는 땅이라 할지라도 어디에선가 흙을 퍼 옮겨서 조그맣게 텃밭을 일굽니다. 골목동네란, 또 골목동네 사람들 삶이란 더없이 애틋하면서 곱습니다.

 (2) 헌책방에서 만나는 빛고운 책들

골목마실을 더 하고 싶으나, 더 머물다가는 칠보산자유학교로 들어가는 시간이 많이 늦어질 듯합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남문 둘레 헌책방 <오북서점>으로 찾아갑니다. 골목마실을 하느라 퍽 오래 골목을 돈 탓에 헌책방에서도 오래 머물 수는 없습니다. 아쉽구나 아쉽구나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한동안이라도 수원 골목을 돌고 수원 헌책방까지 찾아올 수 있었으니 얼마나 즐겁고 고마운 하루인가 하고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더 오래 더 느긋하게 둘러볼 겨를은 없지만, 더 오래 더 느긋하게 둘러볼 수 있다고 더 즐거울 헌책방마실이 되지는 않습니다. 살짝 둘러보더라도 제대로 둘러보고, 오늘은 바지런히 돌아보며 살 책만 고른 다음 집에서 이 책들을 읽자고 다짐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고를 책은 바삐 고르고, 집으로 돌아가서 아이랑 부대끼다가는 아이가 잠들고 난 다음 비로소 느긋하게 책을 읽자고 헤아립니다.

헌책방 <오복서점>은 '오북'이라는 누리집도 있습니다.
 헌책방 <오복서점>은 '오북'이라는 누리집도 있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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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사와 메구무/김석희 옮김-그대는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자유포럼,1999)라는 책 하나 만납니다. 저는 사기사와 메구무 님을 <개나리도 꽃 사쿠라도 꽃>이라는 산문책으로 처음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알아보고 이 책을 읽으며 사기사와 메구무 님 소식을 알아보니 지난 2004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당신 작품 가운데 우리 말로 옮겨지며 사랑받은 책이 얼마 안 되는데, 그나마 당신이 숨을 거둔 뒤로는 당신 책들은 하나같이 판이 끊어지고 다시는 나올 낌새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는 이회성 님이라든지 이양지 님 작품도 매한가지입니다. 이회성 님 작품이나 이양지 님 작품을 찾아 읽으려면 헌책방을 바지런히 살펴보아야 하고, 헌책방에서 여러 해에 걸쳐 차근차근 찾아볼 수 없다면 일본말을 익혀 일본책으로 사서 읽어야 합니다.

.. "뭐랄까, 그 사람은 재일 한국인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아예 모르고 있다는 느낌이야." … 적어도 마사미는 자신의 국적이나 가족을 부끄럽게 여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단지 다른 대다수 사람과는 조금 다르다는 느낌이 있을 뿐이었다. 그 느낌조차도 우리 집에는 성이 두 개 있다는 유치하고 직감적인 것이었다. 물론 성장하면서 처음으로 지문 날인을 경험하고, 운전 면허를 취득할 때의 불편함을 알게 되자, 그 느낌은 어린 시절에 비해 조금 달라졌다. 좀더 현실적인 문제, 예를 들면 투표권이 없는 것과 취직 차별, 주거 차별 같은 불합리한 대우에 대해서는 화가 나기도 했다 ..  (44, 110쪽)

일본사람들은 일본땅에 일본사람 아닌 조선사람이나 한국사람이 함께 살고 있음을 거의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국땅 한국사람들은 한국 아닌 나라에 한국사람이 살고 있음을 거의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국땅 한국사람들은 한국 아닌 나라에 살고 있는 한국사람을 거의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같은 한국땅에서 살고 있으나 사람 대접을 못 받는 슬프고 고단한 이웃사람들 삶 또한 거의 생각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더 배부른 사람이 되고자 할 뿐, 내 배가 불러 갈수록 내 이웃 또한 밥 한 술 나누어 먹으면서 서로서로 즐겁고 느긋한 삶을 꾸리는 아름다운 길을 걷자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아니, 생각할 겨를이 없이 몹시 바쁜 우리들이라고 해야지 싶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곳이란 오로지 내 돈을 벌고 내 이름을 높이며 내 힘을 부풀리는 쪽일 뿐이지 싶습니다. 우리들 누구나 아름다운 목숨을 간직하며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으나, 바쁘고 힘들다는 핑계가 앞서면서 아름다운 삶과 넋과 말을 꽃피우지는 못한다고 보아야지 싶습니다.

알뜰살뜰 꽂혀 있는 책들.
 알뜰살뜰 꽂혀 있는 책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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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사미가 정말 쓰고 싶었던 것은 '나는 곤혹스럽다'는 거였다. 이 나라 사람들의 수선스럽고 거친 태도, 시끄러움, 뻔뻔스러움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아무리 자신을 타일러도 역시 익숙해질 수가 없다고. 한국 국적을 갖고 있는 내가 아직 한국말을 잘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왜 이렇게까지 주눅이 들어야 하느냐고. 일본에 있을 때는 한국인임을 부끄럽게 여긴 적이 한 번도 없는 내가 내 나라에 와서 이렇게 부끄러움을 느끼는 건 어찌된 일이냐고 … 여긴 한국이니까 한국말로 하라고, 길거리나 가게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훈계를 들은 경험은 모두 갖고 있었지만, 선진국인 일본에서 일부러 건너와 도대체 뭘 배우려 하느냐는 빈정거림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남학생들 가운데 병역에 대해 싫은 소리를 들은 적이 없는 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남자의 의무인 병역은 교포에게는 면제된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탓이다 ..  (135∼136, 162쪽)

<일본군 위안부와 나치 독일수용소의 강제 성노동>(동북아역사재단,2007)이라는 두툼하고 큰 책을 마주합니다. 이런 책도 나온 적이 있구나 하고 새삼 곱씹습니다. 좀더 널리 알리고 좀더 널리 읽힐 수 있는 책으로는 되지 못했다고 느끼는데, 이런 책은 몇몇 연구자들이나 학자들이나 교수들한테만 돌린 다음 사라지도록 하기보다, 교과서처럼 삼으며 이 나라 아이들한테 찬찬히 읽히며 우리 역사를 가르치는 길잡이로 삼는다면 얼마나 좋으랴 싶습니다. 이와 같은 책은 나라에서 학교마다 한 권씩 돌리도록 하든지, 학급마다 한 권씩 갖추도록 해서 이 나라 아이들이 우리 발자취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알뜰히 받아들이도록 돕는다면 얼마나 기쁘랴 싶습니다.

겉그림.
 겉그림.
ⓒ 동북아역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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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책 <유경선-연변, 낯설지 않은 땅>(수문서관,1989)을 집습니다. 집에 한 권 갖고 있으나 부러 한 권 더 장만합니다. 빼어나게 좋은 사진이 아니요, 썩 훌륭한 사진책이 아닙니다. 그저 연변땅 한겨레 삶을 사진으로 담으려고 했던 책이기에 장만합니다. 1989년이든 1999년이든 2009년이든 거의 똑같았는데, 스스로 녹아들거나 어깨동무를 하면서 하나되려는 넋으로 사진을 찍는 분을 만나기란 퍽 힘듭니다. 연변에서 연변사람을 사진으로 찍든, 한국에서 한국사람을 사진으로 담든, 일본에서 재일조선인을 사진으로 엮은, 저마다 다 다른 사람이면서 모두 같은 고운 목숨임을 헤아리는 사진쟁이는 참으로 드뭅니다. 글쟁이도 드물고 그림쟁이도 드뭅니다. 살가이 손 맞잡고 따스히 눈길 나누는 '쟁이'는 참 드뭅니다.

또다른 사진책 <임석재-古寺巡禮>(서문당,1988)를 집습니다. 문화재가 된 옛절을 사진으로 담는 일은 틀림없이 뜻이 있기는 있는데, 뜻만 있다고 해서 사진으로 잘 담을 수는 없을 텐데, 뜻과 넋과 일과 땀과 사랑과 믿음이 고루고루 어우러지도록 거듭났다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싶습니다. 옛절은 틀림없이 옛절답게 예스러운 멋을 풍기도록 사진으로 찍어야 했을 텐데, 옛절을 지은 사람들과 옛절을 드나는 사람들과 옛절과 마주하던 사람들 삶자락과 손길을 사진으로 녹여내는 매무새를 바라기란 아직 이 나라에서는 참 힘든 노릇일까요.

그래도 이렇게 담은 사진 하나 있으니 고맙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우리 나라 옛절을 담은 사진은 한국 사진쟁이가 담은 사진보다 일본 사진쟁이가 담은 사진이 한결 멋스럽고 곱기 일쑤입니다. 한국 사진쟁이는 언제라도 어렵지 않게 우리 옛절을 찾아들 수 있는데, 멀리서 비행기 타고 찾아오는 일본 사진쟁이보다 우리 옛절을 제대로 못 담고 있습니다.

곰곰이 살피면, 한국 사진쟁이이든 일본 사진쟁이이든 이 나라 옛절을 찾아들며 사진을 찍을 때에는 서로 똑같이 처음에는 '손님'이나 '구경꾼'으로 찾아들밖에 없습니다. 옛절에서 살고 있거나 옛절 둘레에서 살고 있지 않으니까요. 언뜻 보기에는 한국 사진쟁이가 우리 옛절을 훨씬 아름다우며 멋스러이 담아야 옳지 싶지만, 이 나라 사진쟁이는 일본 사진쟁이보다 '손님'처럼 옛절을 찾아들 뿐 아니라, 내 삶으로 삭이지 못한 채 '구경꾼' 사진으로 머뭅니다. 더 가까이에서 더 살가이 담을 수 있는 한국 사진쟁이가 외려 '임자'가 되지 못하고 '절집 사람'이 되지 못해요.

헌책방에서는 우리 삶을 북돋우는 책을 때와 곳을 아우르며 넓게 만날 수 있습니다.
 헌책방에서는 우리 삶을 북돋우는 책을 때와 곳을 아우르며 넓게 만날 수 있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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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동준-배동준 사진집(풍경)>(신진사진인쇄공사,1999)도 구경합니다. 퍽 예전부터 사진을 즐겨 온 분 작품인데, 처음 사진을 즐기던 때 작품은 제법 볼 만하지만, 60년대와 70년대와 80년대와 90년대로 접어드는 사진을 돌아보니, 이분은 날이 갈수록 사진이 외려 뒷걸음입니다. 앞걸음이 아닌 뒷걸음입니다. 날이 갈수록 사진에 잔재주만 늘고 손재주만 붙습니다. 사진에 사랑을 담거나 믿음을 싣지 못합니다. 사진에 당신 삶을 담거나 당신 꿈을 싣지 못합니다. 땀방울이나 눈물방울을 찾아볼 수 없는 사진입니다. 웃음이나 기쁜 외침을 찾아보기 어려운 사진입니다.

사진잡지 <한국사진>이 열 권 남짓 보여 모두 집어듭니다. 이 가운데 1994년 5월에 나온 167호를 들여다봅니다. 167호에는 일본 사진쟁이 토몬 켄 님 글을 김영길 님이 옮겨서 실어 놓습니다. 이 나라 사진쟁이들 가운데 일본에서 손꼽히는 사진쟁이 토몬 켄 님을 제대로 알거나 살피거나 알아보거나 배우는 사람이 아주 드문데, 뜻밖에도 1994년에 이분 글 한 토막을 옮겨서 실은 적이 있군요.

잡지 겉그림.
 잡지 겉그림.
ⓒ 한국사진작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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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자(行者)의 경우에 있어서의 문제점은 빠른 동작, 카메라를 모티브로 향해 정확히 찍는 방법론에 문제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비트에 따른 행자를 보는 끼네시마 군의 '눈'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행자, 신앙에 매달려 살아가는 사람, 신앙을 매물해서 살아가는 사람, 행자, 그러한 많은 광신자이거나, 또는 산에 사는 도사, 행자. 이런 것들을 모티브로 할 경우, 단순한 관광사진이나 기록사진이 아닌 이상, 그 인간성을 도려내지 않고서는 의미가 없다. 적어도 사진이 예술성을 얻고 그러한 방향으로써의 사진을 발전시키려면 더욱더 그러한 인간성을 생각하지 않으면 발전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눈·코, 그리고 하얀 두건, 요켠대 눈에 보이는 물건 그 자체를 찍을 수밖에 방법이 없다. 이것으로써 처음으로 모티브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 하는 작가의 눈이 문제가 되어지는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관광사진을 희망하는 사람은 풍속적인 것에 흥미를 갖고, 예술을 지향하는 사람은 인간적인 것에 몰입해 가는 것이다 … 모티브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에 따른 작가의 눈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 진실 속에서 곤란을 겪는 우리들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 우리들의 트레디션, 전통의 본질을 가장 단순하게, 그리고 심플하게 말하자면, 우리들 일본인은 '르브르'도 갖고 있지 않고, 프랑스혁명 또한 겪어 본 일이 없다 … 게다가 우리들은 더욱 앞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지 않은가. 이러한 핸디캡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넘어야 할 산들, 헉헉대면서 나아가야 할 길 ..  (62∼63쪽)

토몬 켄 님 말이 아니더라도 "사진을 발전시키려면 더욱더 그러한 인간성을 생각하지 않으면 발전은 없"습니다. "무엇을 볼 것인가"조차 살피지 못하는 사람한테 '어떻게 살고자 하는가'를 따지거나 물을 수 없습니다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고자 하는가를 맨 먼저 따지거나 살피거나 물으면서, 내가 두 손에 사진기를 쥔 사람이라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찍어 무엇을 어떻게 나누려 하는가'를 따지고 살피며 물어야 합니다. 내 삶을 내 깜냥껏 담는 사진이지, 다른 사람 삶을 구경하며 다른 사람 손재주를 흉내내어 다른 사람한테 우쭐거리듯 내보이려고 담는 사진이 아닙니다.

글을 쓸 때에도 마찬가지요,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출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누구한테 자랑하려고 글을 쓰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 앞에서 젠체하려고 책 하나 내놓지 않습니다. 나 스스로 아름다운 길을 걷고 있기에 시나브로 엮을 수 있는 빛나는 책 하나입니다. 나 스스로 웃고 우는 맑고 밝은 삶을 일구기에 찬찬히 여미는 싱그러운 책 하나입니다.

<오복서점>에 있는 책들은 가지런하게 꽂히고 쌓여 있습니다.
 <오복서점>에 있는 책들은 가지런하게 꽂히고 쌓여 있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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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책 하나 마주하면서

어느 도서관에 있다가 버려진 책들이 헌책방 책시렁 한켠에 나란히 꽂혀 있습니다. 척 보아도 이 책들은 도서관에서 사랑받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서관에서 버려진 책은 겉이 낡거나 빛이 바랬다거나 어디가 헐거나 하지 않습니다. 도서관에서 버려진 책은 아주 말끔하고 깨끗합니다. 왜냐하면, 한국땅 도서관에서 버리는 책들은 '사람들이 한 번도 안 빌려서 본 책'들이기 일쑤인데, 스물 몇 해에 걸쳐 어느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기에 책이 아주 정갈하게 간직되어 있다고 할 만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책들이 헌책방에 들어오면,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반갑고 사랑스러울 책을 찾는 사람들은 고맙습니다. 고마운 한편으로 슬프지만.

<백영현-우리 아이들>(녹두,1986)이라는 책을 만지작거립니다. 이제 와 돌아본다면 꽤 낡은 생각이 담긴 책이라 할 사람이 있고, 이렇게 좁은 생각으로는 우리 누리에서 살아갈 수 없다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가르치며 이와 같이 살아내는 사람이 있어야 하며, 이와 같은 책 하나 또한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휩쓸려 흐르지 않는 목소리 하나 있어야 하고, 튼튼히 내 넋을 가꾸거나 지키면서 생각하고 말할 줄 아는 몸짓 하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겉그림.
 겉그림.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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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여러분들의 입에 달고 다니는 노래가 있읍니다. 시도 때도 없이 흥얼거리는 "제이 스치는 바람에 ……."라는. 제목도 이상한 <J에게>라는 노래 말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영어 알파벳 제이가 왜 양념처럼 끼어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열심히들 부르고 있읍니다. 즐겨 부르는 노래는 그것뿐만 아니지요. 텔레비전 만화 영화의 주제곡, 선전하는 노래, 외국 노래, 가수 노래 ……. 교과서에 실린 동요, 학교에서 배워 준 우리들의 노래는 수업 시간의 노래로만 사용되고, 소풍 때나 오락 시간에는 춤을 섞어 부르는 가수 노래가 판을 치고 있읍니다. 왜 우리들의 노래인 동요는 시시한 것이고, 유행가는 재미있고 신나는 것으로 되어 버렸나요? 언어의 가장 아름다운 표현 수단은 노랩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들의 몫인 동요는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노래고요. 유행가 가사라는 것을 보면 보편적으로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 자기 혼자 슬프고 고독한 앞뒤 맞지 않는 이야기, 실패한 사랑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그 곡 역시 높은 음과 낮은 음의 기복이 심해서 한 곡만 불러도 얼굴이 벌겋게 되고, 목이 아프도록 만들어져 있읍니다. 뜻도 모르고 음만 높은 노래는 어른들이나 불러 목 아프게 하고 우리는 우리 노래를 부릅시다. 놀 때도, 일할 때도 기쁘거나 괴로울 때도, 우리의 노래 동요를 부릅시다 ..  (154∼155쪽)

<임석재-사진 사상>(해뜸,1986)이라는 책은 예전에 읽었지만, 제가 갖고 있는 책하고 겉그림이 달라서 집어듭니다. 오늘 만나는 책은 첫판인데, 첫판은 겉그림을 하늘빛으로 입혔군요.

<김종옥 글·사진-사랑과 구원의 발자취>(한국방송사업단,1984)는 한국방송에서 '세계 2대 종교 불교와 기독교 성지'를 찾아나서면서 엮은 두툼한 사진책입니다. 이제 우리 나라 방송사들은 스스로 나라밖으로 깊고 너른 취재를 다녀와 깊고 너른 이야기를 보여주곤 합니다. 몹시 좋은 장비를 갖추고 여러모로 찬찬히 살피면서 취재를 해서 방송 하나 담습니다. <사랑과 구원의 발자취>는 나라밖 방송사에서 나라밖 사람들 눈길로 살펴본 이야기가 아니라, 나라안 사람 스스로 생각하고 바라본 이야기를 담습니다.

흩어지면 안 될 책들은 끈으로 묶어서 얹어 놓습니다.
 흩어지면 안 될 책들은 끈으로 묶어서 얹어 놓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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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런 알찬 열매들을 그때그때 고운 책 하나로까지 마무리짓는 흐름은 거의 찾아보지 못합니다. 알찬 열매를 더 알차게 가다듬으며 책 하나로 아우르는 손길은 웬만해서는 찾아보지 못합니다. 방송국 일꾼이 알차게 일구는 풀그림 하나를 알차며 야무진 책 하나로 옮겨내는 몸짓은 좀처럼 찾아보지 못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방송국에서야말로 과학백과사전이라든지 교육백과사전이라든지 종합백과사전을 하나 여밀 수 있습니다. 꽤 넉넉한 돈과 꽤 많은 사람 품을 쓰며 이곳저곳 다니며 찍어내어 그러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더없이 훌륭하고 놀라운 책 하나 길어올릴 수 있습니다.

<다까이 또시/편집부 옮김-나의 여공애사>(백산서당,1984)라는 책을 집습니다. 이 책 또한 도서관에서 기꺼이 내다 버린 책입니다. 도서관에서 기꺼이 내다 버려 주었기에 저로서는 고맙고 반가우면서 슬프게 마주하는 책입니다.

겉그림.
 겉그림.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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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아버지는 숯을 굽는 분이었는데 끼후와 시즈오까의 산을 전전하며 일을 하셨기 때문에 나도 어릴 때부터 산에서 자랐고 국민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읍니다. 나의 학력은 국민학교 3개월이 고작입니다. 문법도 모르고 글도 그다지 모르지만, 78살인 지금 이제까지의 삶을 돌이켜보면, 사회적으로는 가난하다고 차별받고 부모님들로부터는 여자이니까 얌전하게 굴라는 꾸지람을 받으며 살아왔읍니다. 그리고 10살 때 방직공장 여공이 되어 일하다 학력이 없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쫓겨난 적도 있지만 <여공애사>를 집필하던 남편을 돕고자 여급으로 일을 하며 필사적으로 살았었읍니다. 하지만 아무리 일을 해도 평생 가난했고, 게다가 오랜 전쟁과 그 뒤의 숱한 고생이란. 나름대로 생각컨대 나는 배운 건 없었지만 나쁜 짓은 결코 하지 않았읍니다. 여공으로 10년, 여급으로 1년 반, 무허가상으로 5년, 품팔이꾼으로 20년, 그 중의 20년은 주부노동자였읍니다. 그리고는 지금 집도 없고 연금도 없읍니다. 송두리째 짜내 봐도 아무것도 없고 이제는 노동할 힘도 없이 오직 죽음만을 기다리게 되었읍니다 ..  (글을 마치면서)

여자 노동자 삶은 여자 노동자로 일하며 살아온 사람이 적바림하거나 갈무리할 수 있습니다. 온몸으로 겪고 두 손으로 부대낀 기나긴 나날을 스스로 곱씹고 돌아보아야 비로소 한 줄 두 줄 적바림합니다.

농사꾼으로 일군 삶이라든지 교사로 일군 삶이라면, 농사꾼으로 일한 사람 스스로 적바림하거나 교사로 일한 사람 스스로 적바림할 때라야 비로소 제대로 적바림합니다. 청소부 삶이나 가정주부 삶 또한 매한가지입니다. 이네들 삶을 어느 누가 나서서 기꺼이 적바림해 주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말로만 들어서는, 이야기를 자료로 들춰 보아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증언집이라든지 자료집이라는 틀로 이러한 '밑바닥 가난한 사람 삶' 이야기를 엮은 책이 나오기는 하는데, 이러한 책은 밑바닥 가난한 사람 목소리일 수 없습니다. 밑바닥 가난한 사람 목소리 가운데 이네들한테서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당신 나름대로 고르고 솎아서 갈무리한 글모임일 뿐이에요.

그리 넓지 않으나 여러모로 알차게 책을 갖춘 좋은 헌책방 <오복서점>입니다.
 그리 넓지 않으나 여러모로 알차게 책을 갖춘 좋은 헌책방 <오복서점>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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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공애사>는 오랜 나날을 여자 노동자로 밑바닥 가난한 삶을 일구어 온 그대로 당신 삶을 돌아보며 적바림한 글을 모읍니다. 당신 스스로 잘났다고 여긴 적이 없고 못났다고 뉘우친 적 또한 따로 없이 하루하루 살림을 이으며 바쁘고 고된 가운데 적바림한 글을 모읍니다. 이러한 책을 마주하여 읽을 때에는 나 스스로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옳게 돌아보고 제대로 살피는 가운데 꾸밈없이 껴안아야 합니다. 마음을 열고 귀를 열며 눈을 뜨고 손을 내미는 매무새가 된 다음에 읽어야 합니다. 지식으로는 읽을 수 없는 책이고, 지식으로는 쓸 수 없는 책이며, 지식으로는 다루거나 나눌 수 없는 책이에요.

글쓴이 마음이 되며 읽는 책 하나입니다. 글쓴이 삶처럼 내 삶을 일구며 읽는 책 하나입니다. 글쓴이가 나누고 섬기며 껴안은 사랑처럼 내 둘레 사람들하고 사랑을 나누고 믿음을 섬기며 온몸으로 껴안으며 읽는 책입니다.

책 하나 아름다이 일군 사람이 흘린 땀방울을 오롯이 읽고, 책 하나 다부지게 이룬 사람이 맺은 열매를 맛나게 먹습니다. 이렇게 읽은 땀방울은 나 스스로 내 터전에서 나부터 땀방울 오롯이 흘리자고 마음먹도록 기운을 북돋웁니다. 이렇게 먹은 열매는 내 깜냥껏 내 삶터에서 내가 먼저 맛는 열매를 맺어 내 이웃하고 오순도순 나누자고 생각하도록 사랑을 부추깁니다.

"이 책들 다 들고 가실 수 있겠어요? 놓고 가셔요. 택배로 부쳐 드릴 테니까요." "아이고, 그러게요. 참. 가방에 다 못 넣을 듯한데. 그래도 넣을 수 있는 데까지 넣고, 정 안 들어가면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다 부치고 가볍게 가셔요. 자전거까지 타고 가시는데."

사진잡지 <한국사진>하고 <사랑과 구원의 발자취>는 가방에 넣지 못합니다. 다른 책은 모두 가방에 우겨넣습니다. 가방을 메니 휘청. 그래도 자전거에 몸을 싣고 팔달문을 돌아 칠보산으로 갑니다. 따갑게 내리쬐는 땡볕을 고스란히 받으면서 수원 도심지를 벗어나 다시 논밭 사잇길을 달리고, 논밭 사잇길이 끝날 무렵 칠보산 자락으로 접어들어 학교에 닿습니다. 자전거에서 내리고 가방을 내리니 제 옷자락뿐 아니라 가방 등판까지 온통 땀투성이입니다. 다리가 살짝 후들후들 떨립니다.

좋은 책 하나 마주하면서 우리들 누구나 좋은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빕니다.
 좋은 책 하나 마주하면서 우리들 누구나 좋은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빕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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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경기도 수원시 <오복서점> / 031) 243-5375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호미,2010)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2007∼2010)



태그:#헌책방, #오복서점, #책읽기, #삶읽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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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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