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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이 36.4도를 기록할 때 나는 밀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노무현대통령묘소에 있었습니다. 무더웠지만 많은 사람들이 찾았습니다. 대부분 가족과 함께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무더운 날, 땀을 비오듯 쏟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부엉이 바위를 오르고, 1000원짜리 국화꽃을 모든 가족 손에 들려주며 참배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대통령노무현'보다는 '인간 노무현'을 그리워하여 그랬을 겁니다. 세월이 흘러 언젠가는 국민 가슴속에 남아있는 '인간노무현'은 사라지고 '맨몸 노무현'만 남겠지요. 그 때가 되면 어떤 역사가가 펜을 휘둘러 평가를 하겠지요. 역사적으로 노무현은 어떻게 그려질까요?

너럭바위 형태인 비석을 봉분처럼 올려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라는 유언을 절묘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묘소는 전체적으로 우리의 궁궐에 들어있는 생각, 즉 "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게 조성되었다"고 유홍준 위원장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 노무현대통령 묘 너럭바위 형태인 비석을 봉분처럼 올려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라는 유언을 절묘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묘소는 전체적으로 우리의 궁궐에 들어있는 생각, 즉 "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게 조성되었다"고 유홍준 위원장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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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당신은 '운명이다'라고 말하고 홀연히 떠나갔습니다. 후대에 대한 깊은 믿음이 없었다면 그렇게 서럽게 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당신이 꿈꾸었던 세상, 진보의 미래, 사람 사는 세상, 살아온 삶 등 모두 역사적 판단에 맡긴 것이지요. 후대에게 과제를 남기고 떠났습니다.

백제와 가야국처럼 패망국인 경우 승자의 논리에 따라 역사가 어둠 속에 묻혀 버립니다. 인조반정에 의해 쫓겨나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폭군으로 남아있는 광해군은 다른 조선 왕과 함께 하지 못하고 경기도 진접읍 영락교회공원묘원 뒤편에 외롭게 누워 있지요.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완전히 빼앗긴 북인 정인홍은 합천 가야면에 쓸쓸히 잠들어 있습니다. 그의 스승 남명조식까지도 왜곡된 평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우리의 기억에 폭군으로만 남아있는 광해군은 경기도 진접읍에 쓸쓸히 잠들어 있습니다
▲ 광해군 묘 우리의 기억에 폭군으로만 남아있는 광해군은 경기도 진접읍에 쓸쓸히 잠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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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을 정인홍묘소로 돌려봅니다. 5년 전 광해군 묘를 찾아갈 때처럼 막막한 기분이 듭니다. 마치 세상사람들이 알면 안 되는 곳이라도 되는 양 제대로 된 표지판 하나 없습니다. 거의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조그마한 표지판 하나 달랑 서있습니다. 동시대를 살았던 광해군과 정인홍, 모두 역사적으로 홀대받는 것이 흡사합니다.

정인홍묘소는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에 있습니다. 묘소 근처에나 가야 조그마한 표지판 하나 달랑 세워져 있습니다
▲ 정인홍묘소 표지판 정인홍묘소는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에 있습니다. 묘소 근처에나 가야 조그마한 표지판 하나 달랑 세워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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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는 합천 가야면 야천리에 있습니다. 가야면에서 가야산국립공원 쪽으로 1km남짓 가면 묘소를 알리는 조그마한 표지판이 나옵니다. 표지판대로 50m정도 내려가면 묘지가 간소한 석물과 함께 보입니다. 일반 묘지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무릎까지 자란 풀은 분위기를 더욱 사납게 합니다. 현재 정인홍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이렇습니다. 

광해군하면 폭군을 떠올리듯 정인홍하면 역적을 떠올립니다.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쿠테타 세력 서인들은 광해군과 정권을 쥐고 있던 대북파에게 피의 보복을 가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정인홍은 '역적괴수'이었던 게지요. 정인홍에게 내려진 판결문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습니다.

"뱀과 같은 교활한 성품과 도깨비 같은 마음을 지닌 역적괴수 정인홍은 처음에는 선비들 사이에서 명망을 도둑질했지만 한낱 권세나 뽐내는 품관(벼슬아치)이었다. 중간에는 의병이라 핑계를 대고서 힘으로 향촌을 눌렀으며 모질고 둔한 무리들을 긁어모아 괴이한 학문을 퍼뜨렸다.(중략)  

인목대비를 폐하자는 논의가 일어날 적에는 먼저 폐하고 뒤에 중국에 알리자는 논의를 앞장서 주장하면서 지난날의 간악한 여자로 비유하기까지 하고 또 불공대천의 원수라고 말하며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는 화가 그의 말에서 결정되었다. 이토록 강상(綱常)이 끊어지게 하고 사람의 도리가 막히게 했으니 사람으로 악독함이 누가 이보다 더하랴? 늙어서도 죽지 않은 것은 천심이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리라."(한국사의 아웃사이더, 이이화 P133-134에서 재인용)

쿠테타 세력이 정적에게 내린 사형선고문입니다. 스승의 학문을 받은 것이 '괴이한 학문'을 했다는 죄목이고 의병활동을 하면서 의병과 양곡을 모은 것이 '향촌을 힘으로 눌렀다'는 죄목이 된 것입니다. 특히 인조반정의 대의명분이 된 폐모살제(廢母殺弟)에 연루되었다는 주장은 여러 정황상으로 근거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서인들은 기어이 역모자로 만들어 냅니다.

무릎까지 자란 풀은 분위기를 더욱 사납게 합니다. 광해군도 그렇지만 죽어서도 제일 대법 받지 못한 역사적 인물 중에 하나일겁니다
▲ 정인홍 묘소 무릎까지 자란 풀은 분위기를 더욱 사납게 합니다. 광해군도 그렇지만 죽어서도 제일 대법 받지 못한 역사적 인물 중에 하나일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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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은 성리학적 도리와 명에 대한 존명사대주의를 표방하면서 왕위찬탈사건(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과 함께 대북파를 철저히 숙청하고 폄하하였습니다. 대북파는 조선이 끝날 때까지 정계에 등장하지 못하였습니다. 정치적 생명뿐만 아니라 모든 사상이 단절된 것이지요.

이이화 선생은 이 두 세력을 '보수적 사림파와 진보적 사림파, 자주파와 사대파, 혁신세력과 보수세력, 산림처사파와 권력추구파'로 양분하고 있습니다. 결국 인조반정은 이 양대 세력간의 충돌이었습니다. 권인호 교수도 <조선중기 사림파의 사회정치사상>에서 동인-북인-대북으로 이어지는 진보적 색채를 가진 영남 강우학파(조식과 정인홍을 비롯한 조식의 제자들)를 보수적 사림파와 구분하여 진보적 사림파라 했습니다.

진보적 사림파 중 정인홍, 곽재우, 김면 등은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서 진보적 사회정치사상을 실천하였습니다. 특히 정인홍은 명나라의 원병에 대해서도 자주국방의 중요성을 말하며 명에 대한 사대사상에 맞서 자주의식을 발휘하였습니다. 왕과 왕비, 세자책봉에 있어서 명의 간섭을 배제하려 하는 등 대외적으로 자주적 정치의식을 높였습니다.

선조말기와 광해군 시대의 개혁정국에서는 그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습니다. 특히 외교적 정치사상은 괄목할 만합니다. 명과 후금사이에서 중립노선을 견지하여 북방여진족의 호란(胡亂)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였습니다. 대민정책은 민본사상을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대동법을 시행하여 백성들이 가장 고통스러워했던 공물의 폐해를 줄였습니다.

진보적 사림파의 중심에 있던 정인홍은 '역적괴수'가 아니라 진보적, 자주적, 개혁적인 정치가였습니다. 단재 신채호는 정인홍 평전을 쓰지 못한 점을 못내 아쉬워했습니다. 이제는 다른 역사가가 쓸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제야 E.H.카가 말한 '발언권'과 '순서(order)를 얻은 게지요. 

자연히 정인홍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그의 스승 남명 조식으로 이어집니다. 남명은 합천에서 태어났지만 산청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산청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61세 때이니 산청에서 11년을 보낸 셈입니다. 산청의 인물이 될 만큼 산청에 그에 관련한 사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남명이 강학(講學)하고 후학을 가르친 산천재가 덕천강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서북쪽으로 멀리 천왕봉이 있고 가까이에는 덕천강이 흘러 세상의 잡티가 걸러질 듯합니다. 산천재의 암팡진 모습은 '방울을 차고 다니면서 그 소리를 들으며, 늘 자기를 깨우치고 칼을 머리맡에 두고 의리의 결단을 생각했다'는 남명선생을 보는 듯합니다.

멀리 천왕봉이 있고 가까이에는 덕천강이 흘러 세상의 잡스런 것들이 발붙이지 못할 듯합니다. 남명선생을 대하듯 매우 암팡지게 생겼습니다
▲ 산천재 멀리 천왕봉이 있고 가까이에는 덕천강이 흘러 세상의 잡스런 것들이 발붙이지 못할 듯합니다. 남명선생을 대하듯 매우 암팡지게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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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을 거슬러 조금 오르면 덕천서원이 있습니다. 이 서원은 1926년에 복원한 것이어서 건물로서의 가치는 가벼우나 서원 앞 은행나무는 이 서원의 연륜을 대변해 줍니다. 강우학파의 중심서원으로 정조 때 채제공이 원장으로 있을 만큼 성황을 이루기도 하였습니다. 서원 앞 강가에 남명선생 생전에도 있었다는 세심정(洗心亭)이 있습니다. 세심정에 올라 덕천강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남명을 떠올려 봅니다.

남명선생의 학식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웠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없어졌다가 1920년대에 다시 세워졌습니다. 서원 앞에 선생이 심었다는 400년 묵은 은행나무가 서원의 연륜을 말해줍니다
▲ 덕천서원 남명선생의 학식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웠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없어졌다가 1920년대에 다시 세워졌습니다. 서원 앞에 선생이 심었다는 400년 묵은 은행나무가 서원의 연륜을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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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은 "배운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배움만 못하고 오히려 죄악을 범하는 것"이라며 실천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런 정신은 제자들에게 이어져 제자일부는 의병활동에 직접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성리학에만 매몰되지 않고 노·장학 등 다양한 사회정치사상을 받아들여 진보적인 학문관을 견지하였습니다. 비록 처사(處士)로 남아있었지만 백성의 안위를 살피고 국정을 쇄신하는 한편 정치적 폐단과 이를 개혁할 대안을 제시하였습니다. 사회정치적인 면에서  비판적 유학사상을 견지한 진보적 사림파를 대표하였습니다.

남명선생 생전에도 있었다 전해지며 이 정자에 오르면 덕천강에 더 가까이 할수있습니다
▲ 세심정 남명선생 생전에도 있었다 전해지며 이 정자에 오르면 덕천강에 더 가까이 할수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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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과 퇴계는 같은 해에 태어나, 학문과 학맥에서 서로 동등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지금 퇴계와 남명을 비교하면 남명이 초라해 보입니다. 남명이 평생 처사로 남아있었던 반면 퇴계는 그렇지 않았고 그 무엇보다 그의 제자 정인홍에 대한 역사적 폄하가 그의 스승에게 전가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산천재 뒷동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묘소는 선생이 생전에 직접 고른 것이라 하는데 덕천강과 덕산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여 그냥 보아도 명당처럼 보입니다
▲ 남명묘소 정경 산천재 뒷동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묘소는 선생이 생전에 직접 고른 것이라 하는데 덕천강과 덕산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여 그냥 보아도 명당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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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분위기를 남명묘소 비석이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 신도비는 정인홍이 세웠지만 그가 실각한 후 넘어졌고 송시열의 신도비는 우여곡절 끝에 남명기념관 내 한쪽 구석에 서있습니다. 미수 허목의 신도비도 세워졌다 쓰러지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권력의 부침에 따라 서있다 쓰러진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 만해도 군데군데 총상을 입은 3기의 비석이 묘소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래도 똑바로 서있어 다행입니다.

이 3기의 비석은 얼마전 까지만 해도 묘소 기단석에 쓰러져 있었으나 이제는 똑바로 세워져 있어 남명의 사상이 살아나는 듯합니다
▲ 남명묘소앞에 쓰러져 있었던 비석 이 3기의 비석은 얼마전 까지만 해도 묘소 기단석에 쓰러져 있었으나 이제는 똑바로 세워져 있어 남명의 사상이 살아나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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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노무현대통령묘역으로 돌아와 봅니다.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중에 한 대목이 어렴풋이 생각납니다.

"오늘날의 모든 언론인들은 여론을 움직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적절한 사실을 선택하고 배열하는데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흔히 사실은 스스로가 말한다고들 한다. 이것은 물론 진실이 아니다. 사실이라는 것은 역사가가 불러줄 때만 말을 한다. 어떤 사실에게 발언권을 줄 것인가, 또 어떤 순서로 어떤 맥락에서 말하도록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역사가인 것이다. 사실이라는 것은 자루와 같다. 그 속에 무엇인가 넣어 주지 않으면 사실은 일어나지 않는다."(청춘의 독서, 유시민,웅진지식하우스 P302에서 재인용)

세월이 흘러 '인간노무현'에 대한 그리움이 가실 즈음 '노무현의 죽음'은 '발언권'을 얻을 수 있을까요? '노무현의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도록 역사가가 불러줄까요? 올바른 '맥락'에서 왜곡되지 않게 역사가는 '노무현의 죽음'에 대해 말을 해줄까요?

남명 조식 선생은 400년이 흐른 이제야 '발언권'을 얻었고 정인홍은 이제야 제대로 된 '맥락'에서 말할 수 있도록 역사가가 불러줬습니다. 세월이 흘러 권력의 부침에 따라 남명묘소의 비석처럼 '아주 작은 비석'이 쓰러질지 모릅니다. 잘못하면 정인홍이 '역적괴수'이었듯 노무현은 '논두렁에 명품시계를 버린 파렴치한'으로만 남게 될지 모릅니다.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제 더 이상 미안해 하지 맙시다. 이제부터가 더 중요합니다. 앞으로 지켜 주면 됩니다. 역사는 흐릅니다. 강물처럼. 역사는 압니다. 그 때 그 사실을.

예전부터 호랑나비는 기쁨과 행복을 상징합니다. 불가(佛家)에서는 지혜와 길상을, 기독교에서는 부활을 상징한다 합니다. 호랑나비도 곧 날아오르겠지요? 묘소에 지혜가 넘치고 기쁨과 행복이 가득하길 기대해봅니다
▲ 노무현대통령 묘소를 찾은 호랑나비 예전부터 호랑나비는 기쁨과 행복을 상징합니다. 불가(佛家)에서는 지혜와 길상을, 기독교에서는 부활을 상징한다 합니다. 호랑나비도 곧 날아오르겠지요? 묘소에 지혜가 넘치고 기쁨과 행복이 가득하길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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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나비 한 마리가 묘지 돌에 앉아 있습니다. 곧 날아가겠지요. 나비의 날갯짓을 기대해 보며 가만히 쳐다보았습니다. 이제 곧 날아갈 겁니다. '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의 꿈'이 나비효과로 온 나라에 퍼져 나가면 그 때는 어떤 역사가가 펜을 잡아도 왜곡된 역사는 나오지 않을 겁니다.


태그:#노무현대통령묘소, #정인홍묘소, #남명조식묘소, #광해군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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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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