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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부터  머리가 아프네요. 지금은 할 말이 없습니다."

'민주노조' 활동을 하다가 1987년 6월 8일 외출 후 실종된 뒤 1988년 3월 2일 창원 불모산에서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된 고 정경식(1959~1987, 실종 당시 28세) 노동열사의 어머니 김을선(78)씨가 한 말이다.

의문사한 고 정경식 노동열사가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을 받았다.
 의문사한 고 정경식 노동열사가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을 받았다.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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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23일 정경식 열사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정경식 열사에 대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4년 6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10년 6월 각각 '진실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는데, 이번에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어머니 김을선씨는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밝혔다.

어머니를 비롯한 유가족들은 정경식 열사 죽음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며 그동안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 유가족들은 시신을 유골로 보관해 왔다. 유골함은 2년 정도 경남 창원(옛 마산) 진동에 있는 집에 모셔져 있다가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에 의해 모란공원 납골장에 임시 안치되어 있다.

요즘 유가협 사무실(한울삶)에 머물고 있는 김을선씨는 24일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섭섭하다"고 말했다. 그동안 억울했던 심정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김을선씨는 "유골함은 고 박종철 열사 아버지와 전태일 열사 어머니 등 유가협 회원들이 집에 와서 가져가 납골장에 임시 안치해 놓은 상태"라고 말했다.

이번 결정에 따라 정경식 열사의 장례식이 23년 만에 열릴 것으로 보인다. 민주노총 경남본부를 비롯한 창원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은 정경식 열사가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김을선씨는 "민주노조장(葬)으로 장례를 치렀으면 한다"면서 "그동안 병원 수술도 받고 해서 기력이 많이 떨어졌다. 여러 사람들이 논의해 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영만 전 열린사회희망연대 의장은 "그동안 우리 사회가 민주화가 되었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정경식 열사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다. 그동안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고, 인정된 것도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국가에서 인정한 것이다. 시민사회단체들이 뜻을 모아 장례를 치렀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천욱 민주노총 경남본부장은 "정경식 열사가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된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다. 지도위원과 금속노조 경남지부 등과 의논해서 장례를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정경식 열사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많은 관심을 보였던 안경호 진실화해위 조사관은 "정경식 열사가 실종되기 전까지 했던 활동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된 것"이라며 "앞으로 증서가 나오고 명예회복을 하게 될 것이다. 유가족들에게 생활지원금이 지급된다"고 말했다.

정경식 열사의 아버지 고 정재현씨는 아들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 원인을 밝혀내지 못한고 지난 2008년 1월 숙환으로 별세했다.

1987년 6월 8일 실종 뒤 이듬해 봄 불모산에서 주검으로 발견돼

정경식 열사는 1959년 마산 진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산기계공고 1학년을 중퇴하고, 군 복무를 마친 뒤 1984년 5월 대우중공업(두산인프로코어→두산DST) 2공장 특수생산부에서 일했다.

입사 이듬해에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한 고인은 1987년 대우중공업 최초의 집단행동인 '중식거부투쟁'에 참여했다. 또 그는 '민주노조 건설을 위한 활동가 모임'에 참석해 대의원과 지부장 선거에 나서기도 했다.

1987년 5월 노조 위원장 선거에서 회사측에서 내세운 후보가 당선되었고, 선거 이후 회사측 후보를 지지했던 사람과 정경식 열사가 시비가 붙어 폭행사건이 발생했다. 고인은 합의를 위해 폭행사건의 당사자를 만나고자 회사에서 외출했다가 실종되었다. 그때가 1987년 6월 8일이다. 정경식 열사의 시신은 1988년 3월 2일 창원 불모산에서 발생한 산불을 진화하던 중 유골로 발견되었다.

아들이 실종된 뒤 부모들은 대우중공업 등 창원시내를 돌며 갖은 노력을 다했다. 동네 주민들까지 나서서 청와대와 경찰 등에 진정서와 탄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창원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은 1988년 2월 '대우중공업 정경식 실종사건 진상규명대책위원회'(위원장 김석좌 신부)를 구성해 활동하기도 했다.

유골이 발견된 뒤 검찰은 자살로 내사종결했다. 어머니 김씨는 1999년부터 2000년까지 여의도에서 '의문사법 제정'을 촉구하며 진행된 천막농성에 참석하기도 했다.

다음은 어머니 김을선씨가 2002년 6월 8일 '의문사위원회'에서 했던 발언의 일부다.

"오늘 6월 8일이 경식이의 기일(忌日)입니다. 오늘 민주열사 합동추모제에 참석하기 위해 어젯밤에 마산역에서 밤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서울에 있는 경식이를 보러 올라오면 얼마나 좋겠노' 하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그동안 제가 십여 년 동안 생선가게를 하면서 우리 자식 경식이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의문사한 다른 아버지·어머니들의 자식들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해서 수십 차례 상경을 하였는데, 진동에서 생선장사를 하면서도 몸은 서울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 무엇보다도 저는 이제라도 우리 경식이를 해친 사람이 양심선언을 한다면, 죽은 경식이가 살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만 된다면, 경식이의 영혼도 위로해주고 편안하게 장례도 치러줬으면 하는 것이 가장 큰 바람입니다."


태그:#노동열사, #민주화운동, #고 정경식 노동열사, #유가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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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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