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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평야 들판을 달리는 자동차와 그 위를 날아가는 비행기
 김포평야 들판을 달리는 자동차와 그 위를 날아가는 비행기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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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세 번째다. 김포평야 들판에서 길 잃은 강아지처럼 헤매고 돌아다닌 게. 한 번은 김포공항 활주로 외곽을 순환하는 길을 찾아 들판에 들어섰다가 활주로 근처도 가보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또 한 번은 김포 들판을 가로질러 김포 시내로 들어서는 길을 찾아가다가 2시간 가까이 농로를 헤매다 되돌아오기도 했다.

그 길이 모두 그 길 같고, 어느 길을 가든지 농로 한가운데에서 경인운하 공사 현장과 마주쳤다. 굴삭기와 트럭들이 하천 제방을 가로막고 서서 자전거가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았다. 그 공사 때문에 하천(굴포천) 너머 반대편 농로로 넘어갈 수가 없다.

경인운하 공사 현장. '한강과 서해의 만남 경인아라뱃길' 입간판
 경인운하 공사 현장. '한강과 서해의 만남 경인아라뱃길' 입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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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더 김포평야를 찾아간 게 지난 주 금요일(3일) 아침이다. 아침부터 날이 흐린 게 한 차례 굵은 비가 쏟아질 게 분명했다. 빗길 자전거여행이 처음은 아니지만, 요즘처럼 순식간에 온몸을 적셔버리는 장대비는 적응하기 힘들다. 빗물에 젖은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도 서너 시간이 지나면 몸이 몹시 괴롭다.

중학교 시절, 낚싯대를 들고 친구들과 함께 김포 들판을 여기 저기 가로지르는 하천을 떠돌아다니다,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채 들판 한가운데에서 소나기를 맞아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새 3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것도 추억이다. 어떻게 보면, 오늘 빛바랜 기억을 되살리기에 딱 좋은 날이다.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아무 때나 찾아오는 게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상암동에서 가양대교를 건너 한강변 자전거도로를 타고 방화대교를 향해 올라가는 길에 점점이 비가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방화대교를 지나 행주대교에 다가갈 무렵에는 사방이 물인 듯 공기인 듯,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으로 퍼붓는다. 그렇게 해서 빗속을 뚫고 9호선 개화역 앞에 도착했다. 이제부터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시 미로를 헤매다 나올 게 분명하다.

가양대교 남단 한강공원 자전거도로 진입구.
 가양대교 남단 한강공원 자전거도로 진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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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역 앞에서 다시 한 번 지도를 확인했어야 하는데, 기억에 의지한 게 잘못이다. 사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지도를 꺼내 수시로 살피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지도에 그려진 대로라면 개화역 역사를 오른쪽으로 돌아서 천변(대두둑천) 왼쪽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첫 번째 다리를 건너 벌말 쪽으로 건너가야 하는데, 그만 역사 앞을 지나쳐 공항 쪽으로 내처 달렸다.

처음엔 몰랐다. 이 길이 김포공항 활주로를 빙 돌아 나오는 길이라는 것을. 이렇게 비가 내리는 악조건 속에서도 활주로로 내려 앉는 비행기가 있다. 눈앞에서 비행기가 내리고 뜨는 광경이 꼭 스크린에 비친 영화 속 장면 같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서 뜻하지 않은 광경과 마주친 셈이다. 그 후로 길을 잘못 들었다는 걸 알고 나서도, 그 길을 좀처럼 포기할 수 없었다.

활주로 근처, 착륙 직전 낮게 떠가는 비행기.
 활주로 근처, 착륙 직전 낮게 떠가는 비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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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주로 유도등 위로 굉음을 내며 내려앉는 비행기의 동체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그때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이 길이 바로 내가 맨 처음 김포평야로 자전거여행을 떠나던 날, 나를 비행장 한쪽 언저리에서 헤매게 만든 길이라는 것을. 그런데 이렇게 비가 퍼붓는 날, 지도 한 장 없이, 미처 의식도 못한 채 여행을 마치게 될 줄은 몰랐다.

펑크를 낸 나무 가시. 길이 약 0.5cm. 사진을 찍어놓고 보니 무슨 상어 이빨 같다.
 펑크를 낸 나무 가시. 길이 약 0.5cm. 사진을 찍어놓고 보니 무슨 상어 이빨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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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로 태풍 곤파스가 지나간 흔적이 역력하다. 하천 제방길이 부러진 나뭇가지들로 몹시 어지럽다. 곳곳이 움푹 파인 물웅덩이다. 평소처럼 미니벨로를 타고 왔더라면, 주행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산악자전거를 타고 온 게 다행이다. 그런데도 그 길에서 자전거 바퀴에 펑크가 나는 걸 피할 수 없었다. 타이어를 살펴보니, 표면에 나무 가시가 두 개나 박혀 있다. 길 위에 떨어진 나뭇가지들을 마구 밟고 지나다닌 게 화근이다.

그 길을 돌아서 다시 9호선 개화역 앞으로 돌아오는데, 돌아오는 길을 찾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비가 계속해서 내렸다면 아마 그쯤에서 여행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때 여보란듯이 날이 개기 시작했다. 오전 내내 비 맞고 돌아다닌 길, 해 뜨자마자 돌아가는 게 너무 아까웠다. 그렇게 해서 이번에는 애초 계획한 대로 김포시까지 땡볕 자전거여행이 시작됐다.

대두둑천을 건너는 녹슨 다리.
 대두둑천을 건너는 녹슨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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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김포시까지 가는 길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김포대로(48번 국도)를 따라 자동차들과 함께 달리는 길이고, 또 하나는 김포평야 논길을 따라 유유자적 여행을 즐기는 길이다. 자전거 여행자들이 농로를 찾게 된 것은 김포대로를 피해 강화까지 갈 수 있는 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김포대로는 오가는 차량이 많고, 다른 도로와 교차하는 지점이 많아 자전거여행자들에게 위협이 되는 요소가 너무 많다.

농로는 길이 조금 복잡하고, 노면이 별로 좋지 않은 데다, 대로를 달리는 것보다 시간이 좀 더 많이 걸리는 게 흠이다. 그런데도 자전거여행자들이 굳이 농로를 비집고 들어오는 건, 아스팔트길에서 다른 차들에 쫓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길이 사람의 마음을 더 없이 편안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비가 갠 뒤 푸른 하늘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김포평야.
 비가 갠 뒤 푸른 하늘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김포평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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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런 황토물이 흐르는 하천 옆을 지나가는 농로.
 누런 황토물이 흐르는 하천 옆을 지나가는 농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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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에는 무엇보다 확 트인 들판 한가운데에 서서 바람에 출렁이는 벼이삭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삶의 여유가 있다. 드넓게 펼쳐진 평야를 가로지르는 농로만큼 평화로운 길도 드물다. 이 길에는 확실히 평화가 넘친다. 때로는 이 같은 풍경이 매일같이 전쟁을 치르듯이 살아가는 도시인들에게 큰 위안이 될 수도 있다.

비가 온 직후라 날이 무척 청명하다. 오전 내내 빗속을 헤맨 게 언제 적 일이었는지 다 가물가물할 정도다. 날이 갠 이후로 들판 농로를 오가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난다. 산책을 나온 사람들도 있고, 하천가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김포 들판. 비바람에 참혹하게 찢긴 비닐하우스.
 김포 들판. 비바람에 참혹하게 찢긴 비닐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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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곤파스가 지나간 흔적. 논바닥에 가로누운 벼.
 태풍 곤파스가 지나간 흔적. 논바닥에 가로누운 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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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평야에도 태풍 곤파스가 미친 영향이 꽤 크다. 이곳 저곳 논바닥에 가로누운 벼이삭이 눈에 띈다. 하천 주변으로는 쓰러진 나무들을 치우는 작업이 한창이다. 유난히 가지가 많은 아름드리 나무들이 더 큰 희생을 치렀다. 한전 직원들은 전봇대에 올라가 전선을 정비하느라 바쁘다. 평야라고 늘 한적하고 조용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돌아오는 길에 개화동 상사마을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했다. 뭐지 싶었다. 저녁밥을 짓는 연기도 아니고, 화재가 난 것도 아니고, 뭔가 이상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골목 안쪽에 연기가 가득하다. 곧이어 소독약 냄새가 진동한다. 그 연기 속에서 소독차가 튀어나오더니, 그 뒤를 따라 사내 아이 하나가 따라 나온다. 그런데 그 녀석이 나를 보더니 약간 들뜬 목소리로 대뜸 이렇게 묻는다. "아저씨, 저 차 따라갈 수 있어요?"

상사마을 풍경. 마을 지붕 위로 소독 연기가 뿌옇게 올라오고 있다.
 상사마을 풍경. 마을 지붕 위로 소독 연기가 뿌옇게 올라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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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했다. 내가 왜 저 소독차를 따라가야 하지? 처음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나중에 생각했다. 녀석은 외로웠던 거다. 혼자서 소독차 뒤를 따라 다니다, 마침 연기 뽀얀 길 위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저와 함께 달릴 수 있겠냐고 물었던 게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내가 동심을 너무 몰랐다. 빗속에, 그것도 물웅덩이 논길을 하루종일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닐 정도면, 철이 든 정도로 봐서 그 녀석이나 나나 별반 다를 게 없는데 말이다.


태그:#김포평야, #김포공항, #김포시, #자전거여행, #농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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