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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햇살에 알알이 영글어 가는 벼는 농민들에게 더이상 풍요의 대상이 아닌 한숨과 탄식의 대상이다.
▲ 가을햇살에 영글어가는 벼이삭 가을햇살에 알알이 영글어 가는 벼는 농민들에게 더이상 풍요의 대상이 아닌 한숨과 탄식의 대상이다.
ⓒ 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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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9월 중순으로 접어드니 그 무덥던 여름의 아우성이 한 발치 물러섰다. 유난히 무덥고 비가 잦던 여름이었는데 시간의 흐름은 어쩌질 못하는 모양이다. 강둑 버드나무에서는 아직도 매미들이 지난 여름 다하지 못한 사랑을 위해 목청을 돋운다. 더 늦기 전에 그네들의 사랑이 이루어지길 빌어본다.

들녘마다 바둑판처럼 펼쳐져 녹음을 자랑하던 벼 포기도 그 색깔이 바래 노랗게 변해가고 있다. 강풍과 폭우를 견디며 낱알을 살찌우고자 온 정성을 쏟은 다음 기력이 쇠하니까 제 스스로 노랗게 변해가는 것이려니 생각된다. 우리가 결실이라고 말하지만 기실 벼에게는 성장하여 죽어가는 생명의 순환과정인 것이다.

예전에는 모를 심고 난 후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여든여덟(八十八)번 들어야 쌀(米)이 된다고 했다. 그만큼 손이 많이 가고 어려운 것이 벼농사였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인력과 하늘에만 기대어 농사를 짓던 시대에는 적기에 물꼬를 막아주거나 터주고, 잡초를 매주어야 하는 부지런함 없이는 소출을 기대하기가 어려웠을 터이다.

최근 들어 농사기술이 발달하고 수리시설이 잘 갖춰져 웬만한 가뭄이나 홍수에는 끄떡없이 견뎌낸다. 더욱이 우량종자의 개발과 비료 및 농약 등의 성능이 좋아 수확량은 날로 증가하고 있다. 기계화 영농으로 그만큼 벼농사도 쉬워져 심고 거두는데 노동력이 절감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농부들이 벼농사를 선호하지만, 대부분의 농부들은 쌀값이 떨어져도 고령화되어 쉬이 다른 작물을 심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쌀이 과잉 생산되어 가격이 폭락하고, 급기야는 저장할 창고마저 없어 정부에서는 남는 쌀의 처분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쌀이 언제부터 이렇게 천대를 받았는지, 조상들이 보면 격세지감을 느낄 일이다. 쌀은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주된 식량으로 활용해 왔으며, 그런 점에서 벼농사는 단순히 식량공급을 넘어서 우리의 전통문화 형성에 깊은 고리를 맺고 다양한 공익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벼논은 6~9월 우기에 홍수를 조절해 주는가 하면, 기온이 높은 여름철에는 산소탱크로서 대기를 냉각시키고 공기를 맑게 해준다. 이와 더불어 논에 가두어진 물이 정화되어 지하로 침투함으로써 수자원을 확보하게 되고, 벼를 재배하는 논 그 자체가 토양의 침식을 막아준다. 이러한 수질 및 대기정화기능 이외에도 생물다양성을 보존하고 철새와 야생동물에게 먹이를 제공하는 생태계의 중요한 서식처일 뿐 아니라, 재배에서 수확까지 벼농사로 얻게 되는 경관적 가치는 참으로 크다고 할 것이다.

이런 중요한 벼농사가 위기에 처해있다. 생산량이 늘어난 것도 문제지만, 다양한 먹을거리의 공급과 식생활의 변화로 쌀 소비량이 급속히 줄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업계에서는 빵, 막걸리 등 쌀을 이용한 다양한 가공식품 개발에 주력하고 있으며, 정부에서는 보조금을 지원하면서까지 영농조건이 불리한 논은 다른 용도로 전환시키고, 벼 아닌 다른 작물을 재배하도록 권장하고 있으나 효과가 미미한 모양이다.

연간 벼 보관료만도 금융비용과 감가상각을 포함해서 4,500억 원에 이른다고 하니 국가적으로는 큰 손실이고,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최근 정부에서는 대북 쌀 지원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각 지방자치단체에서도 남북협력사업을 통해 식량지원을 추진하고 있으며, 일부 민간단체에서는 통일부로부터 대북 쌀 지원승인을 받아놓은 상태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이 올 안에 이루어져 보관창고를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다.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매스컴을 통해 전쟁과 기아에 허덕이는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제3세계 국민들의 처참한 실상을 접하면서도 남의 일처럼 지나친다. 보관료 부담이 큰 잉여분의 쌀을 이들 국가에 인도적 차원에서 지원하는 것도 쌀 문제 해결의 방법이 될 것이며, 연말연시 불우이웃돕기 명목으로 그들을 위해 쌀 한주먹씩 모아 보내는 것도 한 방편이다.

이것이 국제교역관계에서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만 된다면 남는 쌀로 세계 각지의 굶주리는 사람들을 돕고, 재고 쌀 문제도 해결하는 한편, 우리의 국격은 그만큼 향상되리라 생각된다.


태그:#벼농사, #쌀, #대북식량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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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물처럼, 바람처럼, 시(詩)처럼 / essayist, reader, trave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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