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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만약 제가 분신시도를 안 했다면 여긴(뒤에 있는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점을 가리키며) 그 이튿날 바로 오픈했을 겁니다."

 

이윤근(61) 서울 남서부슈퍼마켓 협동조합 조합장은 지난 9월 7일 새벽을 이렇게 회상했다. 지난 15일,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서울 염창점 입점예정지 앞에서 <오마이뉴스> 기자와 만난 이 조합장은 "제가 여기서 최종적인 결단을 내리기 전에는 이걸(홈플러스 익스프레스 입점을) 막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 슈퍼에서 팔던 라이터 기름을 승합차와 제 몸에 뿌리고 불을 질렀다"고 말했다.

 

"우리 슈퍼에서 팔던 라이터 기름을 승합차와 제 몸에 뿌리고..."

 

대표적인 '기업형 슈퍼마켓(SSM)' 가운데 하나인 홈플러스 익스프레스의 입점을 막기 위해, 점포 앞에 간이천막을 쳐놓고 '24시간 농성'을 하고 있는 이 조합장 뒤로는 '홈플러스 위장입점 저지농성'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이 조합장을 비롯한 조합원 20여 명은 지난 7일 이후 번갈아가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혹시 있을 지도 모를 홈플러스 측의 '기습입점'을 막기 위해서다.

 

이 조합장은 길 맞은편에 있는 슈퍼를 가리키며 "이거 하나 생기면 저거 바로 없어지고 옆에 과일가게, 정육점 다 없어진다"며 "SSM이 들어오면 나머지 슈퍼들은 다 죽는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곳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염창점은 지난해 8월 서울시가 중소상인들의 '사업조정신청'을 받아들여 '사업일시정지권고'를 내린 점포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10년 8월 25일 경, 홈플러스 측은 이 점포를 직영점이 아닌 '가맹점'으로 바꿔 입점준비를 시작했다. 이는 홈플러스 측이 "가맹점이 사업조정제도의 조정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악용했다"는 것이 중소상인들의 설명이다. 한 마디로 "위장가맹점"이라는 것이다.

 

이 조합장 옆에 앉아있던 조합원 류갑희(51)씨는 "대기업들이 할 수 있는 편법과 치사한 방법을 모두 다 동원해서 (골목상권에) 들어온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류씨는 염창동에서 8년째 슈퍼를 운영하고 있다.

 

이 때문에 서울시는 지난 1일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염창점 점주를 상대로 이 점포가 "사업조정을 회피할 목적으로 실질적으로 직영형태를 취하면서 외형만 가맹사업으로 위장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관련서류를 제출할 것을 요구한 상태다. 또한 "제출된 서류의 검토결과 대기업의 실질적인 지배관계 여부를 확인할 때까지는 가맹점의 입점을 일시 중지할 것"을 요청했다.

 

"SSM 문제 해결할 수 있다면 내 한 몸 버리려 했는데..." 

 

이러한 서울시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홈플러스 측의 '입점준비'는 계속해서 진행됐다.

 

이윤근 조합장은 "29일 우리가 농성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입점 준비가 30%정도 진행됐었는데, (홈플러스 측이) 우리가 농성하다 지쳐 쓰러져 잠들면 그 틈을 타서 새벽 1시, 2시에 내부공사를 하고 (점포 안에) 물건을 들여놨다"고 말했다. 그러는 사이 입점준비는 어느새 90%정도 진행됐다.

 

지난 7일 상황도 비슷했다. 오전 1시경, 홈플러스 안으로 냉장고 등 집기가 들어가는 걸 본 이 조합장이 '결단'을 내린 그 날이다.

 

홈플러스 앞 인도에 차를 세운 이 조합장은 자신의 승합차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차 내부와 자신의 몸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였다. 이를 본 경찰이 이 조합장을 즉시 차에서 끌어냈지만, 현재 이 조합장의 차 안은 일부 부품이 불에 타 녹아내리는 등 그날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다행히 이 조합장은 손목에 난 상처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부상을 입지 않았다. 현재 그는 불구속 입건 상태다.   

 

"원래 목적은 정말 내가 하나 없어짐으로써 우리나라 유통구조가 이렇게만 가지 않는다면, 정말 나는 내 한 몸 버리려고 했어요. 정말로.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분신이) 미수에 그쳤지요. 차에서 끌려 나와서도 제가 차 위에 올라가 호주머니에 들어있던 휘발유를 몸에 뿌리고 분신하려 했어요. 이 역시 경찰이 저지하는 바람에 미수에 그쳤지만."

 

"이 나이에 가게 아니면 할 게 없어요, 실업자 되는 겁니다"

 

사실 홈플러스 염창점이 입점해도 이 조합장에게는 직접적인 피해가 없다. 이 조합장은 염창동이 아닌 방화동에서 17년째 슈퍼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조합장 역시 방화동에 들어선 SSM 때문에 피해를 입고 있긴 하지만 직접 타격을 입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이 조합장은 SSM이 국내에 처음 등장했던 2006년을 시작으로 'SSM 반대'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지난달에는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화곡점 입점저지를 위해 삭발과 단식을 감행하기도 했다.

 

이 조합장은 "내가 직격탄을 안 맞아서 그렇지 우리 조합원들 대부분이 SSM 때문에 직격탄을 맞은 사람 그래서 슈퍼를 그만둔 사람, 그만둘 사람들"이라며 "한 단체의 장을 맞고 있는 사람으로서 우리 조합원들이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고 제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며 자신이 SSM 반대에 앞장서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이 조합장은 옆에 앉아있던 류갑희씨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분은 이 점포가 오픈 하는 동시에 바로 문 닫아야 한다. 이 나이에 뭘 하겠어요. 가게 아니면 할 게 없어요. 실업자 되는 겁니다."

 

그러자 류씨가 착잡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염창동에 롯데슈퍼(롯데쇼핑 SSM)가 입점했는데 거리가 우리(슈퍼)하고는 떨어져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별 지장이 없었는데 주변에 있는 상인들이 완전히 망했어요. 문 닫은 데도 몇 군데 되고 난리도 아니에요. 장사를 하는 게 하는 게 아니에요.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지. 저도 이거 오픈하면 실질적으로 매출이 반 정도로 떨어질 걸로 봐요. 적자가 나면 폐업이 되고, 폐업이 되면 이 나이에 뭐하겠어요."

 

SSM 진출하면서 주변 중소상인 매출 28% 감소, 손님은 절반으로 뚝

 

이 조합장과 류씨의 주장은 '기우'가 아니다. 지난 8월 중소기업청이 발표한 '대형마트·SSM 진출에 따른 주변 중소상인 피해현황' 보고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대형마트·SSM가 진출하기 전 3년간과, 진출 이후 3년간의 매출액을 비교해본 결과 매출액이 28%나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이러한 매출감소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감소폭이 점점 더 커졌다. 대형마트·SSM 진출 전 3년간의 평균매출에 비해, 대형마트·SSM이 들어선 해에는 13.4%가 감소한 반면 1년 후에는 23.9%, 2년 후에는 28.1%, 3년 후에는 무려 32.3%나 감소하는 등 그 피해가 누적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조합장이 "SSM 문제의 심각성을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SSM으로 인해 주변 상가가 바로 문을 닫는 게 아니라 서서히 고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매출액뿐만 아니라 고객 수 역시 시간이 갈수록 그 감소폭이 커졌다. 대형마트·SSM 진출 3년 전에는 82명이었던 하루 평균 고객 수는 대형마트·SSM 진출 3년 후에는 47명으로, 절반가까이 뚝 떨어졌다.

 

이러한 매출감소는 슈퍼·정육점·과일가게·반찬가게 등 주변상권 전체에 나타났다. 또한 매장면적이 작으면 작을수록 매출감소도 컸다. 영세 상인일수록 '직격탄'을 맞게 되는 것이다. 이 조합장은 "저소득층 상인들의 좁은 생활터전 조차도 대기업이 빼앗아가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개탄했다.

 

이처럼 SSM으로 인한 피해는 커지고 있지만, 이에 대한 '규제'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SSM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지난 14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박대해 한나라당 의원이 서울시로부터 제출받은 '서울시 SSM 설립현황'에 따르면, 2006년 서울시 종로에 홈플러스 익스프레스가 들어선 것을 시작으로 2010년 6월 현재까지 서울에만 117개의 SSM이 오픈했다. SSM 설립은 해마다 늘어나 올해 1월~8월에만 42개의 SSM이 서울에 생겼다.

 

"정부도 언론도 중소상인 죽어가는 모습 뒷짐지고 보고있어"

 

중소상인들이 'SSM규제법'의 조속한 통과를 요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대기업이 운영하는 SSM 직영점뿐만 아니라 가맹점 역시 사업조정대상에 포함시키는 상생협력촉진법(상생법)과 전통시장 반경 500m이내에 SSM을 열려면 지자체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유통법)이 'SSM 규제법'의 주요 골자다.  

 

현재 이 두 법안은 지난 4월 국회지식경제위원회를 통과한 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중이다. 정부·여당이 '한-EU FTA' 체결에 장애가 될 수 있다며 '상생법'의 통과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기자가 이윤근 조합장을 만난 지난 15일, 김종훈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정례브리핑을 통해 "유통법과 상생법이 (정기국회에서) 통과되면 대한민국 전 국토의 유통산업을 규제로 묶이게 된다"며 이들 법안통과에 찬성할 수 없다는 입장을 재차 밝히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 조합장은 "SSM 규제법이 4월에 (법사위에서) 통과만 됐어도 이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울분을 터트렸다. 류갑희씨는 "대통령이 친서민 정책을 이야기하는데,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면 이러한 상황을 알아야 하는데 너무 모르는 것 같다"며 "분통이 터진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조합장 역시 "친서민 정책이니, 공정사회 구현이니 하고 있는데 정 반대로 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가족들이 활동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 조합장은 "딸이 울면서 하지 말라고 그러더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장사하느라, 농성하느라 어제도 3시간 밖에 못 잤단다. 이 조합장에게 '만약 입점저지에 실패하면 어떻게 할 계획이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이 조합장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만히 있어서 (매출이 감소해) 죽으나, 입점저지를 막기 위해서 죽으나 죽는 건 마찬가지니까, 우리 중소상인들은 SSM 입점 저지를 위해 죽을 수 있다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정부나 지자체에서 중소상인들의 이런 절박한 심정을 이해를 하고, 법의 테두리 안에서 뿐만이 아니라 대기업 측에다가 압력을 넣든지 동의를 얻든지 해서 (이 문제를) 풀어나갔으면 해요. 지금은 정부도, 언론도 중소상인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뒷짐 지고 쳐다보고만 있잖아요."

 

한편, 추석을 불과 이틀 앞둔 지난 20일 울산에서는 중소상인 차아무개씨가 자신의 슈퍼마켓 탑차에 불을 질렀다. SSM 입점을 반대하는 집회 도중 이었다. SSM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또 다른 이윤근 조합장, 또 다른 차아무개씨는 계속해서 생겨날지도 모른다.


태그:#SSM,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기업형 슈퍼마켓, #이윤근 조합장 , #SSM 규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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