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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선이 지나는 완사역에 무궁화호 완행열차가 들어온다. 완사역은 지난 6월1일부터 무인화된 역이다. 다만 김정현 명예역장이 지키고 있어 덜 외롭다.
 경전선이 지나는 완사역에 무궁화호 완행열차가 들어온다. 완사역은 지난 6월1일부터 무인화된 역이다. 다만 김정현 명예역장이 지키고 있어 덜 외롭다.
ⓒ 하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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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가 뚫리고 자동차가 널리 보급되기 전까지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 도시와 도시를 이어줬던 주요 매개체는 기차였다. 내 고향 사천에도 진삼선 기찻길이 있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기차운행이 중단돼, 당시 내가 기차를 타봤는지조차 기억이 아련하다. 다만 학교를 오가며 짧은 기찻길 구간을 걸었던 기억은 생생하다.

기차와 기찻길! 내 기억 속에서만 멀어진 걸까. 모르긴 해도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기차와 기찻길은 멀어져 왔으리라. 그 이유는 어쩌면 간단하다. 속도 경쟁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고속열차(KTX)가 등장해 그 명성을 조금은 되찾는 분위기다. 역시 '최대 시속 350km'라는 속도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여겨진다.

이 속도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그럼에도 꿋꿋이 버티는 완행열차가 있다. 학생들의 통학, 근로자들의 통근, 그리고 간이역 주변 마을사람들의 도시 나들이 정도가 이 열차를 애용하는 사람들의 쓰임새다. 물론 주말에는 관광객들이 더 많이 이용한다.

'인공호수 속 섬' 같은 완사역에 자리잡은 28세 젊은 청년

7월1일부터 완사역 명예역장을 맡고 있는 김정현(28) 씨.
 7월1일부터 완사역 명예역장을 맡고 있는 김정현(28) 씨.
ⓒ 하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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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 이상 진삼선을 오가는 완행열차는 볼 수 없지만 경전선에선 아직 이 귀한(?) 완행열차를 볼 수 있다. 이 열차는 무궁화호로, 상행과 하행 다섯 번씩 하루에 열 번 지나다닌다. 그리고 사천시를 통과하는 기찻길 중 유일하게 멈춰 서는 간이역이 있으니 바로 곤명면에 있는 완사역이다. 물론 다솔사역도 사천 곤명에 있는 역이지만 이용객이 줄었다는 이유로 몇 해 전부터 멈춰 서지 않는다.

그런데 완사역, 이 역 이용객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당연히 한국철도공사(=코레일)가 가만 두지 않았다. 지난 6월 1일부터 완사역을 무인화 해버린 것이다. 이 말은 역에 근무하는 직원 즉 역무원을 없앴다는 얘기다. 그래서인지 국도2호선을 지나다 완사역을 바라볼 때면 왠지 '인공호수 속 섬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 완사역에 명예역장이 근무한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지난 18일, 완행열차에서 내릴 추석 귀성객을 사진에 담겠다는 생각으로 들른 완사역에서 뜻밖에 20대의 젊은 명예완사역장을 만날 수 있었다.

완사역 화단. 김정현 명예역장이 제일 공 들인 것 중 하나다.
 완사역 화단. 김정현 명예역장이 제일 공 들인 것 중 하나다.
ⓒ 하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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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역장 김정현씨. 올해 28세로, 부산대에서 기록관리협동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대학원생이다. 그가 초대 명예완사역장으로 부임한 것은 지난 7월 1일이다. 돈을 받거나 하는 일도 아닌데 경쟁률이 4대1이었단다. 비록 나이는 젊지만, 대학 1년생일 때부터 간이역에 관심을 가져온 그의 열정이 통했던 모양이다.

명예역장. 그야말로 명예직이다. 철도동호회원이나 지역민 가운데 무인역에 애정이 많고 철도에 대한 이해가 높은 지원자를 심사해 뽑는다. 명예역장에게 주어지는 것은 제복 한 벌과 명찰 그리고 명함.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이 맡은 역을 주기적으로 방문해 청소도 하고 이용객들의 불편사항을 점검한다.

"무인화 정책 후 황폐해진 간이역, 안타까워"

김정현 명예역장이 완사역에 들러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자신의 근무시간을 알리는 일이다.
 김정현 명예역장이 완사역에 들러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자신의 근무시간을 알리는 일이다.
ⓒ 하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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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사역 명예역장인 김씨는 무척 성실해 보였다. 그가 역을 방문하는 날이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자신의 다음 방문일정을 게시판을 통해 알리는 일이다. 행여 업무와 관련해 만나고 싶어 할지 모를 그 누군가를 위한 배려다. 그 다음 청소를 하고, 자신이 심어 키운 옥수수와 금잔화를 살핀다. 명예역장으로 부임한 뒤, 풀밭으로 변해 있던 기찻길 옆 화단을 다시 가꾼 것이 늘 뿌듯하다.

그러고는 책을 읽거나 논문 준비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어떨 땐 역 주변을 다니며 카메라에 풍경을 담기도 한다. 그리고 열차가 도착할 시간이 가까워지면 마음이 바빠진다. 선로 가까이 사람이 다가가 있진 않은지, 혹시 열차가 도착예정시간을 넘겨 지연되지는 않는지 일일이 확인한다. 기차에 오르고 내리는 사람을 챙기는 것 또한 그의 몫이다.

대뜸 그에게 물었다. 젊은 청춘에 이것저것 할 일이 많을 텐데, 왜 굳이 명예역장을 맡게 됐느냐고. 그것도 부산에서 이곳 사천까지 먼 길을 오가며.

"처음 완사역에 들렀던 게 2005년일 겁니다. 그리고 올해 4월에도 한 번 들렀죠. 그때 완사역 직원들이 곧 철수하게 될 거란 얘기를 들었는데, 느낌이 이상했죠. 대부분 간이역이 직원 철수 후에 황폐화 되는 걸 많이 봤거든요.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명예역장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내가 가꿔보자' 이런 생각이 들어 곧장 지원했습니다."

"지금은 간이역 기록만...체계적으로 정리하고파"

김 씨가 직접 제작한 완사역 방문 기념 스템프.
 김 씨가 직접 제작한 완사역 방문 기념 스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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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김씨는 보통 사람보다 기차와 기차역에 쏟는 관심과 애정이 달랐다. 대학1년생이던 2002년, 우연한 기차여행 중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옛 대구선 반야월역을 지나며 간이역에 관한 묘한 매력을 느꼈다. 이때부터 간간이 간이역을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군 복무를 끝낸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간이역을 찾아다녔다.

"처음엔 안 그랬는데 나중엔 막연한 의무감에 사로잡혔습니다. 누군가는 기록으로 꼭 남겨야 한다는… 하지만 나로서도 역부족입니다. 그저 사진으로만 담고 있을 뿐 체계적으로 정리하진 못하고 있죠."

그의 명예역장 임기는 2년이다. 졸업 논문을 쓰고, 직장을 구하다 보면 훌쩍 가버릴 시간이다. 그래서 자신이 기록한 또 앞으로 기록해야 할 간이역을 어떻게 정리할지 아직은 막막하다. 하지만 꼭 해보고 싶은 게 그의 꿈이다.

이 기차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이 완사역과 사천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 기차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이 완사역과 사천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하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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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완행열차를 이용한 관광'에까지 이르렀다. 그가 두 달 남짓 명예역장으로 있으며 느낀 점이, '완사역 주변에는 다양한 관광자원이 있음에도 열차를 이용해 관광객을 끌어들이려는 노력은 부족해 보인다'는 것이었단다. 무엇보다 버스와 연계되지 않아 인근 금성녹차단지나 다솔사 등으로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게 현실이라는 것이다.

듣고 보니 '참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열차를 이용한 테마여행이 점점 인기를 끌고 있는 요즘 아니던가. 완사역 주변에는 녹차단지와 다솔사가 아니어도, 통일딸기재배지(본촌마을)가 있고 각종체험마을이 즐비하다. 나아가 5일 마다 서는 완사장은 단지 이름만 유지하는 재래시장이 아니라 제법 활력이 넘친다. 그 외에도 볼거리 이야깃거리가 많은 게 곤명, 곤양이요 완사역이다.

완사역 전경. 누군가 반가운 손님이 꼭 올 것만 같다.
 완사역 전경. 누군가 반가운 손님이 꼭 올 것만 같다.
ⓒ 하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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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완사역을 통해 고향을 찾거나 장을 보고 들어오는 사람을 만나려던 내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 대신 완사역에 두 번 다녀간 것이 전부인 인연으로, 명예역장을 묵묵히 맡고 있는 반듯한 청년을 만나는 복을 누렸다.

김정현 명예역장. 자신의 주말시간 일부를 쪼개 완사역에 나눠주는 듯 보이지만 속내는 그 이상이다. 단지 이름만 달고 있을 뿐인 무수히 많은 '명예'직을 그는 거부한다. 나아가 명예완사역장을 넘어 지역사회와 연결시켜 고민할 줄 아는 그가 참 고맙다.

완사역은 사천에 있는 유일한 간이역이다. 다솔사역은 몇 해 전 사실상 문을 닫았다.
 완사역은 사천에 있는 유일한 간이역이다. 다솔사역은 몇 해 전 사실상 문을 닫았다.
ⓒ 하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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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뉴스사천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간이역, #완사역, #명예역장, #김정현, #뉴스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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