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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다녀온 후, 1년 만에 여행 이야기를 정리했습니다. 모두 5회에 걸쳐 기사를 올릴 예정입니다. 부족하지만, 소중히 정리해 올립니다. 앞으로 올릴 여행기의 목차와 아내와 함께 다녔던 곳은 기사 아래에 있습니다. - 기자 주

길 위에 선 아내.
 길 위에 선 아내.
ⓒ 이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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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설쳤다. 정확히는 거의 잠들지 못했다. 오래 떠날 여행이 설렜나보다. 여행 전날은 늘 그랬던 것 같다. 첫 여행지로 전남 장성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지도를 펼쳐보니 서울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전남 지역이었던 게 유일한 이유였다. 백양사역에 내리니 오전 10시쯤이었다.

늦은 아침을 해결하고 본격적으로 걸었다. 9월이라지만 더위는 여전히 머리 위에 앉아 있다. 슬슬 햇볕이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백양사역 앞 몇 개의 노점은 조용하다. 평일 오전의 노점은 장사를 시작하기 위한 준비일 뿐이다. 백양사로 향하는 1번 국도에서 본 들녘은 온통 초록색이다. 9월 초의 햇볕은 고추를 말리기에도 제격이다. 국도 가장자리에 깔아놓은 고추가 젊은 부부 여행객을 맞는다. 느릿느릿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노인은 신기한 눈빛으로 우릴 본다. 이 더위에 국도를 걷는 우리의 모습이 이상할 수도 있다.

길을 걷고 채 30여 분도 지나지 않아 온몸이 땀으로 젖고, 슬슬 어깨가 아파온다. 짐을 가볍게 싼다고 했음에도 욕심을 버리지 못한 탓일까. 하긴 이렇게 오래 뙤약볕을 받으며 걸었던 일이 있었던가. 어깨에서 시작한 통증이 팔과 몸통, 허리로 이어져 다리까지 내려간다. 길을 걷다 장성호가 보이는 나무 계단에 아무렇게나 누워 낮잠을 청했다. 몸을 움직여 땀을 흘리니 낮잠도 꿀맛이다.

길을 나서니, 이렇게 아무데서나 누워 청한 낮잠도 평화롭기만 하다.
 길을 나서니, 이렇게 아무데서나 누워 청한 낮잠도 평화롭기만 하다.
ⓒ 이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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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에게 걷기 여행을 하겠노라고 큰소리를 치고 내려온 터였다. 걷는 일에 집중하고 생각은 많이 하지 않겠노라 결심했지만, 정작 걷기 시작하면 그러지 못할 거라는 예상 정도는 했다. 정말로 걷는 일을 내가 좋아하기나 한 건지 여행을 떠난 후 이틀도 되지 않아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걸으면서 하는 생각이라고는 이런 식이다.

'다음에는 어디서 쉴까.'
'지금 쉬자고 하면 아내는 또 내게 핀잔을 주겠지?'
'달리는 저 차가 우릴 덮치지나 않을까.'
'아, 덥다. 정말로 덥다.'

심지어는

'카메라를 왼쪽으로 멜까? 오른쪽으로 멜까?'

걷기란 이렇게 단순해지는 일이다. 단순해지기 위해 걷고, 걸으면 단순해진다. 이런 단순한 사실도 도시에서는 깨닫지 못한다. 많이 움직이지 않는 도시 생활이란 몸이 피곤해도 쉬 잠들지 못하는 일상만을 허락한다. 몸과 마음이 피곤해 집에 들어가는 날이면 오히려 잠들지 못하고 새벽까지 뒤척이던 날이 많았다.

결국 첫날 나와 아내는 짐을 다시 정리했다. 가볍게 챙긴다고 했는데도 필요와 불필요 사이에서 고민한 물건이 많이 나왔다. 비가 얼마나 온다고 우산까지 챙겼을까. 비가 오면 피하면 될 것을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몰랐던 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챙겼던 필요 없는 물건은 우편으로 서울 부모님 댁으로 보냈다.

우체국 저울의 눈금만큼 욕심을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그만큼의 욕심을 어깨에 메고 걸었으니 몸이 경고 신호를 보낸 것이다. 그 신호를 무시하지 않은 건 잘한 짓이었다. 어쩌면 일상에서도 욕심을 버리지 못했으니 마음이 그만큼 무거웠던 게 당연하다. 땀을 쏟고 걸었던 여행의 첫날,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종일 걷다 바다에 도착하니 노을이 우리를 환영한다.
 종일 걷다 바다에 도착하니 노을이 우리를 환영한다.
ⓒ 이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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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구불구불한 이 땅의 길

우연히 영광 백수해안도로란 곳을 발견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을 뽑는 공모전에서 아홉 번째로 아름다운 길로 선정된 길이란다. 이왕에 걸을 거, 여길 가보자! 이런 아내의 제안에 맞장구를 쳐줄 때만해도 그 길의 고됨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영광에서 버스를 타고 법성으로 향했다. 법성읍 버스터미널에 내리니 벌써 해가 머리 꼭대기에 올라 있다. 전남 영광군에 있는 백수해안도로는 해안을 끼고 있는 국도다. 백수해안도로의 공식적인 거리는 17킬로미터 정도다. 우리는 법성에서 출발했으니 훨씬 더 긴 길을 걸은 셈이 된다. 실은 이런 사실도 나중에 알았지만 말이다.

길이란 건 원래가 변화무쌍하다. 도시의 길과 시골의 길은 확실히 다르다. 도시의 길이란 자로 잰 듯 반듯하다. 자로 잰 것처럼 반듯한 길을 내기 위해선 자연을 거슬러야 한다. 산이 있으면 깎거나 뚫어야 하고, 강이 있으면 메우거나 다리를 놓는다. 하지만 시골길은 자연을 해치지 않고 인간에게 발걸음을 허락하는 곳이 많다.

길은 구불거리고, 그 옆으로 바다는 파도를 치고 있었다.
 길은 구불거리고, 그 옆으로 바다는 파도를 치고 있었다.
ⓒ 이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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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백수해안도로가 자연을 전혀 해치지 않은 그런 길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 길 역시 산에 아스팔트를 깔고, 도로를 내기 위해 바다 쪽 경사를 깎아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 부부에게만은 해안을 따라 구불거리며 이어지는 길의 모양이 직선으로 난 고속도로보다 아름답게 보였다. 백수해안도로는 산을 많이 해치지 않고, 산등성을 타고 올랐다. 또한 이 길은 바다가 깎은 경사를 많이 다치게 하지 않고 마치 뱀의 곡선처럼 구불거리고 있었다.

때론 길을 걷는 여행자에게 자신의 모습을 함부로 보여줄 수 없다는 듯 가파른 경사만을 허락하지만, 이내 수고했다며 등을 도닥여주는 듯 시원하게 펼쳐진 내리막길을 선물했다. 직선이 아닌 구불거리는 길이라 지루하지 않았다. 구불거리는 길을 따라 걸으면 매번 새로운 풍경이 눈앞에 들어온다. 한 번에 모든 풍경을 보여주진 않지만 그래서 더욱 기대가 되고 재미있다. 저쯤의 모퉁이를 돌면 새로운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서해 바다의 풍광을 온전히 볼 수 있다는 것은 이 길의 가장 큰 매력이다. 문명을 완전히 거부할 수 없다면 이 정도의 길에 아름답다는 수식을 선사해도 괜찮겠다.

구불거리는 저 길을 걸었다.
 구불거리는 저 길을 걸었다.
ⓒ 이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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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며 느낀 행복

아스팔트로 된 길이라 걷는 일이 생각보다 고되다. 한발을 내딛을 때마다 발끝에서 무릎으로 이어지는 작은 충격이 더해져 몸을 힘들게 한다. 많이 걷겠다고 다짐한 여행인 이상 이런 고통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다. 몸이 편한 여행을 원했다면 백수해안도로를 차로 달리면 그만이다. 차로 달렸다면 느린 속도라고 해도 1시간도 채 안 될 거리다.

길에 쏟는 속도는 길을 걸으며 얻을 수 있는 기쁨과 반비례한다. 차로 이 길을 달렸다면 분명 몸은 편하고 시간은 단축이 되었겠지만, 걸으면서 보거나 만지면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은 한줌의 모래알 정도였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길을 걷는 일이 항상 거친 파도 같은 변화와 재미를 선물하는 것도 아니다.

길에서 만나는 사건이라곤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나는 소 한 마리, 또는 아무데나 똥이나 싸지른 염소 몇 마리를 만나는 일이 전부다. 때론 주책없이 국도를 횡으로 건너고 있는 뱀을 발견한 아내의 짧은 비명에 놀라기도 한다. 몸이 힘들어 잠시 차 없는 국도변에 드러눕는 자유가 걷는 행위가 우리에게 준 유일한 선물이다. 그러다 잠시 들른 국도변 구멍가게에서 먹는 컵라면 한 그릇과 캔맥주 한 모금에 우린 행복해 한다.

행복이라는 모호한 명제는 이렇듯 불현듯 나타나 소리 없이 사라진다. 허기를 달래는 라면 한 젓가락에 행복을 느낄 수 있지만 우리는 이런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지나치고 만다.
걸으면서 나와 아내는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 갑자기 옆구리에 다가와 달콤하게 간질이고 사라지는 행복이야말로 우리를 지탱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 작은 힘이 모이고 모여 다시 걷고,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 준다. 그래서 이 길이 나는 참으로 고맙다.

점심쯤 시작한 길이 해가 떨어진 후까지 이어졌다. 해가 뜨고 지는 건 태양계가 생긴 이래 억겁의 시간 동안 똑같이 벌어진 일임에도 볼 때마다 감동스러운 것은 그 장면이 주는 위대함 때문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절대 만들 수 없는 장면. 신만이 창조해낼 수 있는 해가 바다 저쪽으로 넘어가는 진리. 서해안 길을 걸으니 해가 바다 너머로 사라지는 장면을 온전히 볼 수 있었다. 마침 날씨도 좋아 초저녁 하늘에 걸린 노을도 아내의 얼굴마냥 예쁘기만 하다.

등짝보다 더 큰 배낭을 메고, 함께 걸었다.
 등짝보다 더 큰 배낭을 메고, 함께 걸었다.
ⓒ 이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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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랗게 변한 들판에서.
 노랗게 변한 들판에서.
ⓒ 이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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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의 여행 안내서
■ 목차

― 1. 여행이 시작되기 전
"우리 잠시 어디로든 떠나자. 한 달이나, 두 달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모함, 또는 용기
여행도 일상이 될 수 있을까

― 2. 단지 44일 동안①
'카메라를 왼쪽으로 멜까? 오른쪽으로 멜까?'
길, 구불구불한 이 땅의 길
걸으며 느낀 행복

― 3. 단지 44일 동안②
길에서 사람을 만났네
여행을 해도 부부는 싸운다
여행도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니!

― 4. 단지 44일 동안③
섬과 노을
사소하지만, 매우 중요한 우리 여행의 노하우
축축한 마음이 햇빛에 마르던 날
그곳에서의 시간, 오늘이 며칠이지?

― 5. 여행 후
여행의 끝에서
여행의 후유증

■ 참고<지난 여행 일정>

* 1차(9. 1.∼9. 28.)
서울→장성(9. 1.∼2.) → 광주(9. 2.∼3.)→영광(9. 3.∼4.)→백수해안도로(9. 4.∼5.)→백바위해수욕장(9. 5.∼6.)→나주(9. 6.∼7.)→목포(9. 7.∼8.)→우이도((9. 8.∼10.)→목포(9. 10.∼12.)→영암(9. 12.∼14.)→해남(9. 14.∼15.)→완도(9. 15.∼16.)→강진·화순(9. 16.∼17.)→순천(9. 17.∼19.)→고흥 거금도(9. 19.∼20.)→고흥 녹동(9. 20.∼21.)→청산도(9. 21.∼24.)→보길도(9. 24.∼28.)→완도→목포→서울(9. 28.)

* 2차(10. 5.∼10. 20.)
서울→부산(10. 5.∼10.)→통영(10. 10.∼12.)→전주(10. 12.∼13.)→군산(10. 13이∼16.)→고창(10. 16.∼17일.)→부안(10. 17.∼18일.)→전주(10. 18.∼20.)→서울(10. 20.)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저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timerain95)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부부의 걷기 여행, #전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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