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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파릇, 할 때였다. 세상은 분홍빛이다 못해 눈이 부셨다. 그럼에도 미래는 불투명했다. 투명하지 못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두려움을 동반한다. 그래도 두려움은 봉의산 너머에 있었다. 산 너머에 있을 존재 따위 걱정하지 않았다. 또 그만큼 어리석었다.

열 몇 살에 첫사랑과 찾은 춘천이었다. 서울서 당일로 찾을 수 있는 곳이란 많지 않을 때였다. '당연히' 기차를 탔고, 춘천의 여기와 저기를 서성거렸다. 미리 낭만적인 곳을 알려줄 '정보의 바다'는 없었다. 강변을 걷거나, 닭갈비를 먹으며 맛도 모르는 소주를 털어 넣었다. 집에 돌아가 들키면 불벼락이 떨어질 게 분명해 취하지는 않았다. 기차라도 끊겨 하룻밤의 '사고'를 기대하기엔 나는 순진했다. 저녁 즈음 다시 청량리로 돌아왔다. 청량리역에서 신도림역까지는 참으로 멀었다.

다시 춘천을 찾은 건 스물이 되었을 때다. 열 몇 살에서 스물이 된다는 것은 찬란한 일이다. 고만고만한 성적에 내가 갈 수 있는 학교라고는 'in 서울'에는 없었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지방대학 몇 곳을 고르고 골라 지원한 학교가 춘천에 있었다. 은근히 나는, 춘천으로 가기를 원했다. 집에서 다닐 수 있는 학교를 동시에 합격했음에도 고집을 부렸다.

나의 고집에 어린 아들을 처음으로 품에서 떠나보내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린 나의 어미는 몰래 눈물을 훔쳤다. 철딱서니 없던 아들은 어미 앞에서 자취에 필요한 물품이나 신나게 메모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몰래 흘리는 눈물은 그러고 군대를 갔을 때 다시 확인했다. 그때만큼은 철딱서니 없게 행동하지 않았으니, 지금와 생각해도 다행스런 일이다.

춘천 소양강변
 춘천 소양강변
ⓒ 이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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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채 녹기 전에 자취방을 잡았다. 공동화장실과 욕실이 있는 곳이었다. 그런 불편함 따위는 차라리 행복했다. 책상 하나와 이불을 펴면 공간이 꽉 차는 방이었다. 춘천은 조용하고, 추웠다. 나중 일이지만, 5월에도 함박눈을 보았으니, 그때의 황망함이라니. 골목의 담장은 낮았고, 시간은 느렸다. 억세거나 악다구니란 단어 따위는 없는 도시 같았다. 훗날 이런 사실이 내가 춘천을 사랑하게 된 이유다. 또는 이런 사실이 누군가는 춘천을 싫어하는 이유가 되었다.

캠퍼스의 3월은 꿈틀거렸다. 오늘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심정으로 반짝거리는 눈빛을 하고는 교정을 누볐다. 처음 만난 동기들과의 어색함 같은 건 소주 몇 잔이면 둘도 없는 벗으로 바뀌었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마지막에 기를 쓰고 나온 '희망'처럼 기어이 '고삐리' 때 꿈꾸었던 모든 짓거리들을 삽시간에 경험하고야 말겠다는 작정이라도 한 듯 행동했다.

비가 그친 춘천의 하늘, 안개가 덮고 있다.
▲ 춘천 소양강 비가 그친 춘천의 하늘, 안개가 덮고 있다.
ⓒ 이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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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도 않을 책을 빌리기 위해 도서관을 서성거리거나, 마치 조국이라도 구할 것처럼 집회에 나가 선배들의 구호를 따라했다. 동기 몇과는 마치 조직이라도 이룬 것처럼 매일 무리지어 다녔으며, 그 비좁은 방에 옹기종기 모여 밤을 새우기 위해 술을 마시거나, 술을 마시기 위해 밤을 새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새내기' 생활은 길지 않았으니, 문제는 서툰 연애와 이별 때문이었다.

'여자에게 차이고 군대 간다는 못난 놈'이란 비아냥까지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휘발유에 불이 붙듯 사랑했으니, 떠나는 것도 급했다. 복도에서 서툴렀던 '그' 연애의 상대라도 만나는 날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게 진심으로 불편했고,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때의 비아냥을 감수했던 게 차라리 현명한 일이었다.

시간이란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날아갔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군 생활도 마치고, 다시 춘천으로 복귀했다. 역시 변함없는 얼굴로 이제는 복학생이 되어 나타난 나를 맞는 춘천은 참으로 이뻤다. 새내기 때 춘천을 찾을 때와는 결은 다르지만, 여전히 춘천행 기차를 타는 일은 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애써 숨기는 일이었다.

다시 자취방을 구하고, 다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남아 있던 '그때'의 서툰 연애 상대를 다시 만나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 같은 건 다행히도 없었다. 그럼에도 어색함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그런 어색함일랑은 다른 사랑으로 애써 덮을 수 있었다. 다시 시작한 사랑도 서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때처럼 도망가지는 않았다. 그렇게 찬란했던 몇 년 동안의 청춘을 춘천에서 보냈다.

춘천 신숭겸 묘역.
 춘천 신숭겸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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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 튕겨져 나온다는 것보다 춘천을 떠난다는 사실이 더욱 두려웠다. 졸업을 하고도 춘천에 남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춘천에는 나의 밥벌이는 없었다. 같은 과 선후배들과 모여 살던 집에서 나의 짐을 정리하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서울로 이사를 오는 날은 겨울비가 내렸다. 춘천을 처음 찾을 때처럼 추운 날씨였다. 마음은 더욱 추웠다.

졸업을 하고도 2∼3주에 한 번은 춘천을 다시 찾았다. 마약을 끊지 못한 '약쟁이' 같았다. 졸업생 신분으로 춘천을 찾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할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알량한 몇 푼의 월급으로 후배들을 만나 술 몇 잔 사면서 '가오'를 잡는 게 전부였다. 그러고 다시 일요일이면 서울행 기차를 타야만 했다. 다시 일주일, 또는 이주일쯤을 우울증에 걸린 환자마냥 지내야 했다. 삶의 근거지를 서울로 옮겼음에도 영혼의 근거지는 여전히 춘천이었다. 그렇게 반 년쯤 보낸 것 같다.

그렇게 반 년쯤 지나서야 '약'을 끊을 수 있었다. 춘천행 기차를 타는 일이 점차 뜸해졌다. 그러고는 지금의 아내를 만나 연애를 하면서 춘천을 몇 번 다시 찾았다. 이제 그때만큼 춘천행 기차를 자주 타진 않지만, 내게 춘천은 여전히 가슴 뛰는 곳임에 틀림없다. 그러고 밥벌이 전선에서 지겨운 싸움을 이어나갈수록 춘천을 찾는 일은 줄어들었다.

안개 낀 춘천.
 안개 낀 춘천.
ⓒ 이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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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그랬던 춘천이다. 그리고 그 춘천을 사진을 함께 찍는 이들과 다시 찾았다. 춘천을 가자는 건 나의 고집 때문이었다. 사진을 함께 찍는 이들에게 '내 사랑'을 몰래 보여주고 싶었다. 아무도 내가 춘천을 그리 사랑한다는 사실을 몰라도 상관없었다. 함께 간 이들 곁에서 혼자 몰래 옛사랑의 안부나 묻고 오면 그만인 일이었으니 말이다.

전날 밤까지 비가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춘천을 한 번도 가지 못한 이가 있는가. 그렇다면 새벽녘에 비가 그친 날 춘천을 찾아라. 새벽녘 비가 그친 날 춘천행 기차를 타는 일은 행운이다. 곡선과 직선이 지루하지 않게 이어진 춘천 기찻길은 소양강이 따뜻하게 감싸고 있다.

비가 그친 날이면 그 따뜻한 소양강에 물안개가 포장된다. 뿌연 물안개를 뚫고 가는 기차는 마치 다른 세상으로 날 인도하는 것만 같다. 이쪽에서 본 저쪽은 안개 건너편이다. 거기 무엇이 있는지 보이질 않는다. 그렇다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거기 안개 끝에는 춘천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이다.

춘천 소양강
 춘천 소양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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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춘천에서 하룻밤을 머물다 돌아왔다. 내가 춘천을 사랑한 이유는 촌스러워서다. 쌍꺼풀 따윈 없는 여인에게서 느끼는 애정 같은 거다. 욕정을 담은 눈빛이 아니라 쑥스럽게 고개 숙인 귀밑머리 사이로 비친 바알간 뺨 때문이었다.

단지 이틀을 머물렀다. 헌데 춘천 곳곳이 파이고, 생채기가 나 있어 마음이 아팠다. 외지에서 들어온 자본은 춘천을 아프게 만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춘천 입구쯤에는 거대한 고가도로가 공룡처럼 서 있고, 소양강 주변은 파고, 깎고, 덧칠하기에 바빴다. 마치 촌스럽던 춘천의 얼굴을 성형수술이라도 해서 도시 미인으로 만들려는 작정 같았다. 성형수술을 하려는 사람들 또한 이유가 있어 그리하겠지만, 오랜만에 찾은 나의 마음은 불편하기만 했다.

춘천 소양강.
 춘천 소양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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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춘천에 대한 애정까지 불편해진 건 아니다. 다음에도 춘천에 간다면 마음은 설렐 것이 분명하다. 다만, 더욱 변해 있을 춘천의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돌아올 것을 생각하니 괜한 걱정이 벌써 꿈틀거린다. 경춘선 기찻길도 곧 없어진다고 하니, 이 또한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마음으로 얼마 전 춘천을 다녀왔다.

구봉산 전망대에서 본 춘천 풍경.
 구봉산 전망대에서 본 춘천 풍경.
ⓒ 이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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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행 기차
 춘천행 기차
ⓒ 이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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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저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timerain95)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춘천, #경춘선, #소양강,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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