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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은 자연의 이치를 십분 활용한다. 사진에 기둥은 잘못 세워진 것이 아니라 초석의 상부 형태에 따라 기둥도 같은 형태로 만들어 사용하는 기법인 그랭이 작업을 한 후 사용한 모습이다.
▲ 그랭이 한옥은 자연의 이치를 십분 활용한다. 사진에 기둥은 잘못 세워진 것이 아니라 초석의 상부 형태에 따라 기둥도 같은 형태로 만들어 사용하는 기법인 그랭이 작업을 한 후 사용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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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답사는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우리들 대부분 깊이 생각해 본 일이 없는 주제이다. 내 경우도 관광명소로 알려진 많은 곳을 다녀왔지만 다녀오고 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두 아련한 추억 속으로 사라져 그 곳을 다녀왔는지 조차 아리송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 조상들은 건축문화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문화재를 통해서만 우리의 과거 건축문화를 알 수 있다. 살아있는 기록이다. 존재하는 것은 실제이며 진실이다. 나는 이제 우리 건축 문화에 관심을 갖고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안목을 기르는 길로 접어들었다.

지난 1일 오전 8시에 지용한옥학교 측에서 강릉 문화재 답사를 위해 준비한 버스에 올랐다. 교과과정에 문화재답사가 전 학기에 2회, 후 학기에 2회 모두 4회 포함되어 있다. 1일은 그 중 첫 번째 일정으로 강릉지역에 있는 문화재 6곳, 강릉 객사문, 강릉향교, 경포대, 해운정, 선교장, 오죽헌을 답사했다. 

교장선생님이신 목수(선생님 호) 신영훈님께서 줄탁동기(啐啄同機)의 탁을 맡으셨다. 학생들(병아리에 비유)이 세상으로 나오려고 알 깨는 일을 밖에서 도와주는 어미닭의 역할이다. 선생님 설명을 들으면 한옥 곳곳에 스며있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한결같아 전혀 흥미를 느낄 수 없었던 한옥의 부분부분이 분해되어 각 건물이 갖고 있는 특징들이 눈에 들어온다.

[강릉지역 문화재1] 강릉 객사문

강릉 객사문은 국보 51호로 지정된 고려시대 건물이다. 강릉지역으로 출장 온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된 100여 칸으로 추정되는 임영관(臨瀛館)의 출입문이다. 임영관 본 건물은 1927년 일제 강점기에 헐려 지금 남아 있지 않다. 임영관의 객사문과 칠사당만이 남아있다. 칠사당은 강릉 도호부사가 호구, 농사, 병무, 교육 세금 재판, 비리 단속에 관한 일 등 7가지 정사를 관장했던 건물이다. 객사문과 더불어 고려시대의 건축문화를 알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객사문의 대들보의 결구 모습을 칠사당으로 들어가면서 찍은 모습
▲ 강릉객사문 객사문의 대들보의 결구 모습을 칠사당으로 들어가면서 찍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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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사당에서 박으로 나오면서 대들보와 주변 부재들의 가구모양을 찍은 사진
▲ 강릉객사문 칠사당에서 박으로 나오면서 대들보와 주변 부재들의 가구모양을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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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사문의 건축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비교적 작고, 양식은 단층 맞배지붕인 주심포집이다. 기단은 앞면이 조금 높고 정면에 돌계단을 두었으며, 초석은 몇 가지 형태의 돌을 모아서 앉혔다. 기둥은 앞·뒷줄이 둥근 배흘림(중간이 아래위보다 굵은 기둥)기둥이고 가운데 기둥은 네모로 만들어 여기에 출입문을 달았다.

기둥머리에는 2출목의 공포를 올렸고, 공포 첫 출목의 첨차가 건물 안쪽에서 창방이 된다. 마룻보 중앙에는 두꺼운 사다리꼴 대공을 올려 그것이 마룻도리를 지탱하게 한다.

칠사당은 낡은 부분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최초의 모습을 왜곡시켜 전체적인 조화를 잃었으나 관청의 위용을 볼 수 있는 건물이다.

강릉도호부사가 정사를 보았던 관가건물
▲ 강릉 임영관의 부속건물 칠사당 현판 강릉도호부사가 정사를 보았던 관가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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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같이 한층높게 달아낸 누마루 원형을 변경하여 입구로 통하는 마루를 뜯어내고 을씨년스런 사다리를 놓아 전체 균형미를 잃었다.
▲ 칠사당의 누마루 다락같이 한층높게 달아낸 누마루 원형을 변경하여 입구로 통하는 마루를 뜯어내고 을씨년스런 사다리를 놓아 전체 균형미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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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 좌측에 다락같이 한층 높게 만든 누마루를 달아낸 'ㄱ'자 형태의 건물로 정면 7칸, 측면 3칸 규모이다. 측면 한 칸은 달아 냈고 오른쪽 뒷편에도 방 2칸과 마루바닥에 붙여 툇마루를 만들었다. 지붕 부분은 창방과 직교하여 보를 받치며 소 혓바닥 모양의 2익공 공포로 가구를 짰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이었다.

[강릉지역 문화재2] 강릉향교

향교는 조선시대 성균관의 하급기관인 지방 교육기관이다. 선철(先哲)·선현(先賢)들의 제사와 후학 양성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대도호부나 목에는 각각 90명, 군에는 50명, 현에는 30명의 학생을 교육시켰으며 종 6품의 교수와 정 9품의 훈도가 교육을 담당하였다. 수용하는 학생수에 따라 규모는 다르나 형태는 서울의 분묘와 대동소이했다. 강학공간인 명륜당과 문묘공간인 대성전 건물배치에 따라 크게 전학후묘, 전묘후학 형태로 구분하였다.

1894년 과거제도가 폐지되기 전까지 관직 등용문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은 경우가 많다. 강릉향교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99호이다. 고려시대인 15세기에 창건된 유서 깊은 곳이다. 지형의 경사가 심해 석축을 쌓고 계단으로 연결하였다. 건물의 배치는 명륜당이 앞에 있는 전학후묘 형태이다.

학생들의 성리학 교육을 담당하던 곳
▲ 향교 명륜당 학생들의 성리학 교육을 담당하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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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등 옛성현들과 저명한 학자들의 유패는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공간
▲ 강릉향교 대성전 공자 등 옛성현들과 저명한 학자들의 유패는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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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당은 도리 방향으로 11칸, 보 방향으로 2칸으로 구성된 도리방향으로 긴 건물이다. 막돌 바른 층 쌓기로 기단을 축조하였다. 초석으로 자연석을 사용하였다. 기둥은 원주이며 보아지의 형태는 익공이다. 도리 줄이 5개인 오량가 형태이며 지붕은 홑처마, 맞배지붕 형태이다. 

대성전은 도리 방향으로 5칸, 보 방향으로 3칸 건물이다. 기단은 길고 큰 돌을 두 단으로 쌓고 앞면을 다듬은 돌로 마감하였다. 기둥은 모두 원주이며 배흘림(가운데 부분을 불룩하게 깎아 시각을 보정하는 기술)기법을 사용하였다.

공포형식은 1출목으로 전형적인 주심포식이다. 주두 위에서 살미와 첨차가 결구되어 살미를 받치고 있다. 가구는 1고주 4량가이다. 건물 중앙에서는 고주 위에서 대들보와 툇보가 맞보 형식으로 결구되나 측면에서는 2개의 고주를 사용하여 대들보 없이 툇보로 연결하였다. 지붕은 홑처마 맞배지붕이며 측면에 풍판을 달아 건물의 부재들을 보호 하였다.

[강릉지역 문화재3] 경포호와 경포대

관동 팔경 중의 하나인 경포호는 지방기념물이며 강릉의 문화와 생활의 중심에 자리한다. 원래 경포호는 안현천과 경포천의 물이 흘러 들었으나 하천 정비 사업 이후, 경포천 물만 경포호로 흘러 들었다가 다시 동해로 빠져나가는 석호 형태이다. 주변에 선교장, 해운정, 경포대 등 빼어난 건물들이 많은 것으로 과거 경포호의 큰 규모와 빼어난 경관을 대변한다.

관동팔경 중 하나이며 지방기념물이다. 강릉의 문화와 생활 중심공간이다. 경포호를 중심으로 경포대를 비롯하여 유명한 정자와 누각, 전통한옥가옥 들이 존재한다.
▲ 경포호 관동팔경 중 하나이며 지방기념물이다. 강릉의 문화와 생활 중심공간이다. 경포호를 중심으로 경포대를 비롯하여 유명한 정자와 누각, 전통한옥가옥 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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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호수와 주변의 넓은 들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 이이 선생이 10살때 지었다는 '경포대부를 비롯하여 숙종이 지은 시조, 강르부사 조하마의 상량문 등의 글이 적힌 평판들이 결려있다.
▲ 경포대 경포호수와 주변의 넓은 들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 이이 선생이 10살때 지었다는 '경포대부를 비롯하여 숙종이 지은 시조, 강르부사 조하마의 상량문 등의 글이 적힌 평판들이 결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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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대는 경포호수와 주변의 넓은 들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이다. 최근에는 강릉지방의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 장소로 사용된다. 경포호수를 바라볼 수 있게 시각의 높낮이를 감안하여 지어졌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5칸이며 겹처마와 팔작지붕 형태이며 보머리 장식은 익공형태이다. 2고주 7량 가구이다.

경포대 내부에는 율곡 이이 선생이 10살 때 지었다는 '경포대부'를 비롯하여 숙종의 어제시 및 문장가인 강릉부사 조하마의 상량문 등 여러 문사들의 글이 걸려 있었다. 60평생 학문을 하였다는 나에게도 흰색은 글자이고, 검은 바탕은 나무이다.

우리나라 교육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답답해진다. 내 것을 잃고 어디 가서 나를 찾겠다는 것인지, 우리도 그렇지만 우리의 후손들을 도대체 어디로 안내할 것인지 모르겠다. 지금부터라도 우리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뜨려고 한문을 공부하려 했더니 적게 잡아도 5년 정도가 걸린단다. 우리의 극단적 근시안 교육문화가 한탄스러울 뿐이다.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때 늦은 점심식사를 하러 향토음식점으로 향했다. 두부에 막걸리 한잔은 환상적인 조화를 이뤘지만 무거운 마음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다.


태그:#지용한옥학교, #문화재답사, #강릉객사문, #강릉향교, #경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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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연구단지에 30년 동안 근무 후 은퇴하여 지리산골로 귀농한 전직 연구원입니다. 귀촌을 위해 은퇴시기를 중심으로 10년 전부터 준비했고, 은퇴하고 귀촌하여 2020년까지 귀촌생활의 정착을 위해 산전수전과 같이 딩굴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10년 동안은 귀촌생활의 의미를 객관적인 견지에서 바라보며 그 느낌을 공유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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