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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그렇듯이, 권력의 부침도 흔히 등산에 비유된다. 지난 군사정권 시절 정치활동이 규제된 정치인들이 유난히 산악회 활동을 열심히 한 것도 어쩌면 권력의 생리를 등산에서 체험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정상'에 오르길 원한다. 그러나 정상에 오르는 길은 험난하고 위험이 따른다. 때로는 예기치 못한 기상 악화로 목숨을 잃기도 한다. 그러니 정상 정복에는 강인한 체력과 권력의지는 물론이고, 천운도 따라야 한다.

 

물론, 정상에 오르는 과정이 어렵고 힘들수록 정상에서 느끼는 성취감은 배가된다. 정상에서 느끼는 환희와 희열은 정상에 오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그러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 정상의 환희와 박수는 잠시뿐, 남은 것은 등산보다 몇 배 더 위험한 난관이 도사린 하산길이다.

 

등산보다 하산이 몇 배 더 위험하다

 

하산 때 무릎과 발목에 전해지는 압력은 보통 체중의 3배나 된다. 배낭 무게를 더하면 중압감은 체중의 5배까지도 늘어난다. 따라서 스틱을 써서 하중을 분산시키고 무릎 보호대와 깔창으로 충격을 완화시켜주는 것이 필요하다.

 

하산이 등산보다 몇 배 더 위험하다는 것은 통계로도 입증된다. 최근 5년간 국립공원내 안전사고 현황에 따르면, 안전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곳은 북한산과 설악산 그리고 지리산이다. 주말 등산객이 가장 많이 찾는 북한산에서는 '추락' 사고가, 종주 산행 등산객이 많은 설악산과 지리산에서는 '탈진' 사고가 주로 일어났다.

 

추락 사고는 오르막보다 내리막에서 주로 발생한다. 갑작스런 기상 악화 같은 자연적 요인 때문이기도 하지만, 방심이나 판단 미숙, 과신과 소아적 영웅심, 등산기술 부족 같은 인위적 요인이 사고의 원인이다. 실제로 돌과 바위보다 비나 물에 젖은 나무나 낙엽에 미끄러져 추락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 추락은 대부분 사망이나 신체장애로 이어진다.

 

탈진 사고는 주로 과신과 만용에서 비롯된다. 산을 잘 탄다고 자신하는 사람일수록 탈진 사고 비율이 높다. 하산을 마칠 때까지는 체력 소모량이 70∼80% 수준을 넘지 않도록 체력을 안배해야 하는데 무리한 산행을 강행할 경우에는 종종 탈진 상태에 빠진다. 탈진 상태에서 악천우를 만나면 저체온증으로 목숨을 잃기도 한다

 

하산과 '양지탕 고사' 그리고 권력 말기증후군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 반환점'을 돈 것은 지난 8월이다. 그는 당시 임기 반환점을 맞이해 참모들에게 "반환점이라는 것은 목적지를 다 가고 난 뒤 돌아오는 것을 말하는데, 대통령 임기는 앞으로 쭉 가는 것 아니냐"며 "다른 (적절한) 표현이 없느냐"고 했다. 참모들은 '국정 운영의 연속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하지만, 어쩌면 임기말이 다가오는 데 따른 불안과 아쉬움의 표출인지도 모른다.

 

그가 설령 '집권 반환점'이라는 표현을 거부하더라도, 국민의 눈에 비친 대통령은 지금, 등산에 비유하면 하산중이다. 그것도 도처에 지뢰밭이 깔린 위험한 내리막길이다. 그래서일까? 최근 자신의 본심을 억제하지 못한고 조급증과 불안 초조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경우가 잦다. 대통령 본인은 이 표현 역시 거부하겠지만, 일종의 '권력 말기증후군'이다.

 

권력의 말기증후군에 대해서는 이미 집권당 최고위원이 '양지탕 고사'를 빌려 경고한 바 있다. 양지탕은 한나라당이 지난 8일 예산안을 날치기 처리한 뒤 폭탄주를 마시며 자축파티를 벌인 국회의사당 인근 음식점이다. 홍준표 한나라당 최고위원은 13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양지탕 축배'에 대해 이렇게 경고했다.

 

"지난 8일 본회의장에서 의장석 몸싸움을 보면서 저는 96년 12월 25일 노동법 기습처리를 생각했다. 당시 우리는 승리했다고 양지탕에 가서 거사를 축하하고 축배를 들었다. 96년 12월 25일 아침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YS정권의 몰락의 신호탄이었고 바로 한보사건이 터지면서 YS정권은 몰락하고 IMF 초래되면서 우리는 50년 보수정권을 진보진영에게 넘겨줬다."

 

또 다른 권력 말기증후군 '영남 독식인사'

 

홍 최고위원의 지적대로 김영삼 대통령은 대통령선거 1년 전에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날치기 처리한 뒤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영남 출신인 홍 최고가 놓친 또 하나의 김영삼 정권 권력 말기증후군이 있다. 바로 '영남 독식' 인사다.

 

경남고 출신인 YS는 95년 9월 고교 후배인 김기수씨를 검찰총장에 임명함으로써 영남 편중 인사에 방점을 찍었다. 대통령 스스로 안우만 법무장관, 박일룡 경찰청장, 추경석 국세청장, 배재욱 대통령 사정비서관에 이어 검찰총장까지 권력과 사정(司正)의 중추를 당시 '성골'로 통한 경남고 출신으로 채움으로써 '동창회 정권'이라는 비난과 몰락을 자초했다.

 

YS가 특히 사정과 법조의 핵심라인을 직계 후배들로 채운 의도는 뻔한 것이었다. 임기 막판까지 레임덕을 막고 권력을 유지하려면 믿고 맡길 사람은 고향 후배밖에 없다는 불안심리와 초조감 때문이었다. YS는 임기말에 이처럼 '권력의 그물'을 물샐 틈 없이 후배들로 채웠음에도 불구하고 아들 김현철씨가 감옥 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또 이들의 상당수는 '북풍'(北風)과 '세풍'(稅風) 등에 연루돼 사법처리 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도 15년 만에 다시 권력 말기증후군을 떠올리게 하는 '영남 독식' 인사가 재현되었다. 포항 동지상고 출신인 이 대통령이 취임 6개월 만에 사실상 경질된 황의돈 육군참모총장 후임에 모교 출신의 김상기 3군사령관을 임명한 것이다. 이로써 3군 참모총장 가운데 2명은 현 정권의 실세그룹인 이른바 '영포라인'(영일·포항)으로 채워졌다. 요직에 후배나 고향 사람을 심어놓지 않으면 불안한 심리적 불안정은 대표적 말기증후군이다.

 

더구나 경남 진해 출신의 해군참모총장까지 포함하면 육해공군 참모총장이 모두 영남 출신이다. 이런 '싹쓸이 독식' 인사는 영남 출신 군부가 득세한 군사정권에서도 드문 일이다(17일 <한겨레>가 1993년 이후 임명된 육군총장 13명과 공군총장 11명, 해군총장 9명의 재임기간과 출신지역을 뽑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영남이든 호남이든 특정 지역 출신이 육해공군 총장을 싹쓸이한 적은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대통령의 '인지 장애'는 권력 말기증후군의 '중증'

 

권력 말기증후군의 '막장'은 이런 인사를 '가장 공정한 인사'라고 자평하는 대통령의 '인지 장애'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16일 지역편중 논란을 빚은 군 장성 인사와 관련해 "이번 군 인사는 군대다운 군대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반영해 국방장관이 가장 공정하게 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쯤 되면 권력 말기증후군 중에서도 '중증'이다.

 

권력 말기증후군이 중증에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징후는 최근 들어 눈에 띄게 늘었다. 대통령이 자신의 '본심'을 억제하지 못하고 외부로 표출시키는 경우가 잦은 것이 그 대표적 사례다. 그 때문에 참모들은 대통령의 억제할 수 없는 '본심'을 해명하느라 영일이 없다. '이번 군 인사는 가장 공정했다'는 것은 사실 그 이전 인사는 모두 불공정했단 무참한 말이다.

 

이 대통령이 15일 공정거래위원회의 새해 업무보고 자리에서 최근 논란을 일으킨 롯데마트의 '통큰 치킨' 문제와 관련 "나도 2주에 한 번 정도는 치킨을 먹는데, 치킨 값이 조금 비싸지 않느냐"라고 말한 것도 그런 경우다. 롯데는 그렇지 않아도 이 정권 들어서 '가장 특혜'(제2 롯데월드) 의혹을 받은 재벌기업이다. 대통령이 청와대로 치킨을 배달시켜 먹는다는 것도 믿기 힘들지만, 이런 말을 해서라도 재벌 편을 들어야 마음이 놓일 만큼 조급한 정서불안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여론의 반발이 뻔한 데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여의도 핵주먹' 김성회 의원에게 '격려전화'를 한 것은 마찬가지다. 몸을 던져 자신에게 충성한 부하의 등을 두드려주지 않으면 부하들이 자신을 배신할 것만 같은 두려움이나 조급증의 발로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바늘허리 매어 못 쓰는 법이다. 또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처럼, 하산길에 있는 권력일수록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 다행히 대통령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홍준표 최고위원이 권력 말기증후군을 '경고'만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최고위원회의에서 "이 시점에서 전열을 재정비해서 이 정권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고 정권재창출로 나갈 때라고 본다"면서 이런 '제안'도 했다.

 

"이제부터라도 이명박 정부가 성공을 하고 다시 96년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부 전에 여당을 재편하고 전열을 재정비할 때라고 생각한다. 사태가 더 악화되기 전에 신발 끈을 다시 고쳐 매야할 때라고 생각한다."

 

등산을 시작할 때 사람들은 신발 끈을 질끈 동여맸다가 발이 피곤하면 느슨하게 풀곤 한다. 그러나 산을 오를 때는 발목 관절이 자유롭게 움직여야 하므로 오히려 발목을 느슨하게 해주고 하산할 때는 등산화 끈을 전체적으로 단단하게 묶어 발목을 잘 고정시켜야 한다. 하산할 때는 다리에 피로가 누적된 상태여서 발목을 잡아주지 않으면 발목을 삐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권력 말기증후군에서 벗어나 신발 끈을 동여맬 때다.


태그:#말기증후군, #인지 장애, #영남 독식 , #핵주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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