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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에 빠지다

 

지난해 봄 소설가 김원일 선생을 당신 창작실에서 만나 뵙고자 양재역에서 내려 헤매는데 머리가 하얗게 센 진짜 '백수(白首)'인 김 선생이 나를 먼저 알아보고 손을 내밀었다.

 

"여전히 모자를 쓰고 다니시는군요."

 

김 선생은 내가 모자를 쓴 이미지로 각인되었기에 아마도 지하철에서 쏟아지는 많은 사람 가운데 쉽게 찾으신 모양이었다. 나는 외출 때마다 늘 모자를 쓰고 다녔기에 한두 번 만난 사람은 곧 모자 쓴 내 모습을 연상하나 보다.

 

내가 외출 때마다 모자를 쓰게 된 사연은 이렇다. 1990년대 초, 교직에 있을 때 교내 백일장을 가능한 환경이 좋은 곳에서 열고자 장소 물색 제1후보지였던 경복궁에 사전답사로 몇 선생님과 함께 갔다. 그때 한 선생님이 열심히 셔터를 눌렀는데 며칠이 지난 다음 내 책상 위에 그날 스냅 사진이 놓여 있었다.

 

두어 장 되는 사진 가운데 한 장에서 나는 내 눈을 의심할 만큼 놀랐고, 동시에 큰 충격에 빠졌다. 경회루를 바라보는 내 뒷모습에서 머리 정수리가 백두산 정상처럼 머리카락이 없거나 듬성듬성한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날 퇴근 때부터 버스를 타도 가능한 뒷자리에 앉았고, 가능한 언저리를 두리번거리지 않았다.

 

모자를 쓰게 된 사연

 

그 며칠 후 퇴근길에 모자 가게를 들러 큰돈을 주고 가죽으로 된 헌팅캡 모자를 사고는 그 순간부터 줄기차게 쓰고 다녔다.

 

막상 모자를 쓰고 다니니까 좋은 점이 많았다. 우선 내 민둥머리 정수리를 덮을 수 있었고, 겨울철에는 머리가 보온되는 게 여간 따뜻하지 않았다.

 

강원 산골로 내려온 뒤에는 남의 집 방문 때 두어 번 방문 위턱에 크게 부딪쳤는데 그때마다 모자를 썼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몇 바늘 꿰어야 하는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그 다음은 내가 멋을 부릴 공간으로, 그리고 내 이미지의 트레이드 마크로 삼고 싶었다. 박정희 대통령 하면 선글라스요, 처칠하면 시거나 파이프를 연상케 하듯이, 나는 모자를 택했다. 그래서 집 대문만 벗어나면 모자를 줄곧 썼고, 가능한 벗지 않았다. 해외 여행길에 쇼핑할 기회가 있으면 모자가게를  들러 마음에 드는 걸 찾았다.

 

나는 옷이나 소지품은 비싼 것을 산 적이 별로 없지만 이전에는 만년필에, 모자를 쓰고 부터는 모자를 사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 내가 철마다 바꿔 쓰는 모자가 예닐곱 개 된다. 그 가운데는 뉴욕 맨해튼에서 산 모자도, 볼티모어 바닷가 모자가게에서 산 것도 있다.

 

내가 모자를 골라 쓸 때는 계절 별, 그날 행선지 별로 다르다. 내 모자는 겨울용, 여름용, 봄가을용으로 두세 개씩 갖춰져 있다.

 

산책은 건강 유지 비결

 

양의사, 한의사로부터 건강 유지 비결에 걷는 것이 가장 좋다는 충고를 듣고 퇴직 후 거의 매일 산책을 하고 있다. 산책하는 동안은 인생길을 되새기는 시간이요, 글감이나 영감을 떠올리기에 아주 좋은 시간이다.

 

서울을 떠나 6년 가까이 강원도 횡성 안흥 말무더미산골에 살며 내 나름대로 개발한 산책길은 세 갈래 길로 첫째 코스는 주천강 강둑을 한 바퀴 도는 길이요, 둘째 코스는 내 집에서 송한리 가는 산길이요, 셋째는 말무더미 동네를 한 바퀴 도는 길이었다.

 

그날 산책길은 그야말로 그날 기분과 날씨에 발길 내닫는 대로 다녔다. 좀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는 주천강 강둑길을 택했는데 한 바퀴 돌면 한 시간 30분 거리로 강둑길이 융단을 밟듯이 기분이 좋았다. 둘째 송한리 가는 길은 가장 많이 다녔던 길로, 도중에 잎갈나무 숲길이 경치도 좋고, 공기도 상쾌했다. 셋째는 말무더미마을 오솔길로 밤나무 숲이 있어 주로 봄철에 밤꽃이 필 때나 밤알이 떨어지는 가을에 지나다녔다. 밤꽃 냄새를 맡고자 함이요, 알밤을 한두 개 주워 껍질을 벗겨 씹는 즐거움이 있었다.

 

원주로 이사 온 뒤 한동안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단골로 정한 산책길은 치악산 구룡사 가는 숲길이었다. 집 동네에서 41번 시내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린 다음 구룡사 숲길을 걸으면 아름다운 숲과 계곡 그리고 새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고, 금세 맑은 공기로 몸과 마음이 가뿐해진다.

 

며칠 전, 산책길을 나서는데 바깥 날씨가 영하 10도 이하로 예사롭지가 않았다. 이런 날은 오리털파카에 체크무늬 헌팅캡을 쓰는 게 좋다. 버스에 내려 구룡사 길을 오르는데 귓바퀴가 시리도록 눈바람이 찼다. 곧장 모자를 벗어 귓바퀴가리개를 내리고 다시 모자를 쓰니까 곧 귀가 따뜻해졌다.

 

찬 공기로 코에서는 콧물이 흘렀지만 간장까지 시원하고 상큼한 게 여간 기분이 상쾌하지 않았다. 갑자기 나에게 모자를 선물한 후배 선생이 고맙고 그리웠다.

 

혹이나 손전화의 전화번호부를 확인했으나 없었다. 산책을 마친 뒤 예삿날처럼 목욕탕에 가 온탕을 즐긴 다음, 집에 돌아와 새로 만든 수첩에서 선생의 전화번호를 찾아 다이얼을 눌렀다.

 

"고객님, 이 전화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한 다음…"

 

마침내 통화하다

 

폴더를 닫고 헤아려 보니 김 선생님과 전화 통화를 한지 서너 해가 지난 듯했다. 밤 시간인 데다가 방학 중이라 학교로도 전화번호를 알아볼 수도 없었다. 그때 문득 그 선생님의 대학지도교수였던 김영숙 교장 선생님이 떠올랐다. 그분은 1975년 당시 이대사범대학영어교육과 교수 겸 이대부속중고등학교장을 겸임했다. 그때 나를 이대부고 교사로 채용해 주신 분이다.

 

내 예상대로 김 교장 선생님은 김은희 선생님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다. 그 까닭을 묻기에 모자 때문이라고 했더니 그 얘기가 아름답고 재미있다면서 선뜻 가르쳐 주었다. 전화번호를 확인하자 내가 새 수첩에 옮겨 적는 과정에서 오기를 한 것이었다.

 

곧 김 선생님에게 전화를 하면서 오늘 치악산 구룡사 산책길에 선생님이 나에게 준 귀마개가 있는 모자를 썼더니 귀가 따뜻해서 뒤늦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 전화번호를 잊은 사연과 김영숙 교장 선생님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군말을 하였다. 그랬더니 언제 이야기를 아직도 하느냐는 얘기와 함께, 새해도 되었으니 당신 선생님에게 인사도 드릴 겸 가까운 시일 내 세 사람이 밥 한 끼 나누자고 제의했다. 나는 흔쾌히 수락하면서 시간 장소를 위임하고 전화를 끊었더니 곧 답신이 왔다. 1월 6일 명동 어귀 한 밥집으로 약속했다고 알려주었다.

 

약속 전날 점심을 먹으며 아내에게 다음 날 점심준비는 하지 말라고 일렀다(매주 목요일은 아내가 출강하는 날로 미리 내 점심은 준비해두기에).

 

"내일 밥값은 당신이 내세요."

"그럼, 지난날 모자 선물 받은 데 대한 감사인사 끝에 마련한 자리인데 아무렴."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그런데 그날 밤 김은희 선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 내일 점심값은 저에게 양보해 주세요. 아무래도 선생님이 내실 것 같은 예감에 미리 부탁드립니다. 사실 저 오랜만에 선생님 만나는데 요즘 좀 바쁘게 지낸 탓으로 선생님에게 드릴 선물을 미처 준비치 못했거든요. 선생님은 저희를 만나면 꼭 뭔가 주셔요. 그래서 제가 내일 점심을 사는 게 예의일 것 같아요."

"아니에요. 제가 모자 선물에 대한 감사로 만나게 된 건데 당연히 내가 사야지요."

 

이튿날 약속장소에 그 모자를 쓰고 갔더니 두 분이 먼저 자리 잡고 있었다. 김 교장 선생님은 내 모자가 참 잘 어울린다고 하시면서 헤밍웨이 원작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의 유래를 들려주셨다.

 

"원작의 제목 'For whom the bell tolls'는 영국의 시인 던(Donne, John)의 산문시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느냐의 종은 조종(弔鐘)으로, 설사 낯 모른 사람의 죽음일지라도 바로 그대, 곧 나를 위하여 울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은 그물코처럼 이어진 것을 새삼 느낀다. 모자 때문에 세 사람이 만나게 된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씀했다.

 

그날 선생님이 입고 온 분홍색 스웨터가 어찌나 화사하고 은발과 잘 어울리는지 노년의 원숙 완숙한 아름다움을 본다고 덕담을 하고는, 카메라를 준비치 않은 게 유감이라고 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나이는 일흔을 넘겼지만 마음은 아직 20대라고, 특별히 젊은 남자를 만나기에 좀 신경을 썼다"고 수줍은 듯 말씀하셨다. 그래서 저는 60대의 늙은 남자로 곧 70을 바라본다고 하니까 그래도 나에게는 젊은 남자라고 하여 세 함께 크게 웃었다. 그리고는 나와 김 선생에게 준비해 온 새해 선물을 전했다.

 

내 젊은 날의 객기

 

사실 나에게 김 교장 선생님은 잊을 수 없는 분이다. 내가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경기도 여주의 한 중학교에서 교단에 선 뒤 한 학기를 마치고 서울 오산중학교로 갔다.
 

거기서 3년을 보낸 뒤 마침 모교에 빈자리가 있기에 다시 옮겼다. 그런데 참을성이 없는데다가 모나고 용렬했던 나는 모교에서 일 년을 근무하고는 다시 오산중학교로 갔다.

 

아무튼 그 객기로 나는 그 당시 몹시 괴로웠다. 모교에서는 졸업생이 일 년 만에 하필이면 전임교에 갔다고 나의 처사가 경솔했다고 비난했고, 전임교의 일부 교사들은 하필이면 떠난 학교에 다시 찾아온 것을 경계하는 눈치였다.

 

인생이란 지나고 보면 별일이 아닐지라도 젊은 나이에 양쪽에서 비난과 경계의 눈초리를 그때 나는 감당키 몹시 힘들었다. 

 

이런 내 사정을 아는 한 선배가 마침 당신 학교(이대부고)에 빈자리가 났다면서 그곳으로 가면 나의 고뇌가 모두 다 풀린다고 조언해 주었다. 그러면서 이력서를 쓸 때, 내가 모교에 간 것은 빼버리라고 권하기에 우선 가고 보자는 심정으로 선배 말을 따랐다. 선배와 함께 학교에다 이력서를 제출하고 돌아오는데, 또 다시 내 마음속에 "이게 아니다"라는 갈등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채용후 나중에 이력서를 정직하게 쓰지 않은 게 문제가 된다면 더 큰 수렁에 빠질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나는 집 대문 앞에서 발길을 돌려 혼자 이대부고를 찾았다. 이력서를 전해 준 전병진 교감 선생님을 만나 이실직고하고는 그 자리에서 바른 대로 다시 이력서를 쓴 뒤 제출했다. 교감 선생님은 새 이력서를 받고 전 이력서를 돌려주면서 교장 선생님에게 상의 드린 뒤 채용 여부를 알려주겠다고 하셨다.

 

내 객기를 장점으로 받아주시다

 

며칠 후 선배를 통해 학교로 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전 교감 선생님은 악수를 청했다.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 가운데 하필이면 우리가 만났습니다. 모교에 갔다가 일 년 만에 뛰쳐나와 전임교로 간 일 등, 교장 선생님과 충분히 상의했습니다. 교장 선생님도 전 재직교로 선생님을 알아보신 걸로 압니다. 결론은 명문 오산학교에서 떠난 사람을 다시 받는 일은 매우 드문 일로, 아무나 다시 받아주지 않을 겁니다. 저나 교장 선생님은 그 점을 높이 샀습니다."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답에 감격했다. 그래서 나는 그 순간 내가 이 학교에서 벙어리 삼년, 귀머거리 삼년, 장님 삼년 등, 최소한 20년은 버티자고 다짐했다. 그런 탓인지 나는 이대부고 한 학교에서만 28년간 근무한 뒤 퇴직했다.

 

그 학교에서 교장은 사범대학 교수가 보직으로 내려오기에 김 교장 선생님과는 불과 한 학기밖에 함께 근무치 못했다. 하지만 한 대학캠퍼스에서 생활했던 관계로 구내식당이나 등하교 길에 드문드문 만날 수 있었다.

 

퇴임 후 어느 날 전화통화에서 이제는 지난날의 자리에서 떠나 말벗으로 만나자고 하여, 마침 그 선배와 함께 서너 차례 만났다. 만날 때마다 선생은 예이츠나 키츠의 시를 번역해 와 들려주는 등,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다. 내가 쓴 글 가운데 "네 얼굴에 책임을 져라"는 글은 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가 글감이었다.

 

"두 분이 점심값을 서로 내겠다고 다투는 걸 보고서 흐뭇했습니다. 제가 교통정리를 할 게요. 이번에는 김 선생이 내시고, 다음에는 박 선생, 그 다음은 제 차례입니다."

 

나는 그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다음 만남의 장소와 때를 그 자리에서 잡았다. 4월 하순 토요일 점심은 횡성의 한 막국수 집에서 먹고, 가까운 자작나무숲 미술관에 가서 철쭉꽃을 구경한 다음 거기서 커피를 마시자고.

 

 

"벌써부터 그날이 기다려지네요."

"너무 길게 잡은 건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날을 '기다리는 기쁨'이 있습니다. 남은 날은 그 기쁨에 젖어 기다리며 살겠습니다."


태그:#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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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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