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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으로 기억된다. 평생 연극을 볼 거라고는 아예 생각을 못했던 시기, 아는 후배의 꼬드김에 못 이겨 조그만 극단(지금의 '십년후')의 <세상에서 제일 못생긴 사나이>를 보게 됐다. 연극 속 주인공의 애달픈 심경과 자학하듯 내뱉는 현실적 연기에 큰 충격을 받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극단의 창단멤버로 18년째 활동 중인 이경미(37)씨를 1월 28일 오전 11시, 극단 십년후 연습실에서 만났다. 이씨는 그때 기자가 본 연극을 떠올리며 주인공 역할을 했던 객원배우 정지순씨가 지금은 방송프로그램인 '막돼먹은 영애씨'에서 '개지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들려줬다.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 심장을 울리다

 

1994년 처음 배우의 길에 들어서 이제 어느덧 중년급 연기자가 된, 그리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면서 극단의 어머니 같은 존재로 부각된 이경미씨는 자신이 이렇게 힘들고 배고픈 직업을 선택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학교 다닐 적에는 공부도 웬만큼 해서 영어로 말하기 대회에도 나가며 남에게 화술로 전달하는 모습이 스스로 보기 좋았던 것 같아요. 그러다 중학교 때 우연히 보게 된 '아가씨와 건달들' 공연을 보고 무의식적인 전율을 느껴 고등학교(서인천고)에 올라가 연극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죠. 어떤 극단에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 '음악을 달라'고 하는 둥 제가 생각해도 참 당돌한 학생이었어요. 아마 이런 당돌함 때문에 연극에 대한 자신감이 더욱 생겼던 것 같기도 하고요(웃음)"

 

이경미씨가 말하는 그의 20대는 그야말로 독야청청의 시대였다. 대학을 미련 없이 포기하고 고시공부에 매진하다 전봇대에 붙어 있는 '직장인 연극반 모집' 공고에 무작정 극단을 찾아가 취미로 연극을 시작했다. 그해가 1994년 여름이었다.

 

"전문배우가 아닌 순수 아마추어로서 화술, 가창, 연기 등의 훈련을 받으며 무조건 배운다는 자세로 동료 배우들과 열정을 다져갔어요. 그러다 어느 연극 동아리의 뮤지컬 배우를 뽑는다는 지인의 권고를 듣고, 동인천 일대를 수소문해 포스터를 찾아냈죠. 이후 극단에 전화를 걸어 지금의 극단 '미추' 대표인 김종원씨를 만나 '십년후'라는 극단과 인연이 됩니다. 막 창단돼 배우를 모집하고 있는 최원영 '십년후' 대표와는 그때부터 만나 지금까지 한 길을 걸으며 숙명적인 업을 이어가고 있지요."

 

이씨는 이후 95년 창단 공연 <진흙 인간>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을 다져간다. 극단 초기 젊은 배우 10여 명과 함께 아무런 배경도, 지원도 없었지만 연극을 한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는 행복했다. 물론 여러 가지 상황 등으로 이씨 외에 다른 초기 멤버들은 연극계를 떠나갔지만, 어차피 선택한 길을 가겠다는 도전정신이 그에게 또 다른 기회를 만들어준 것이다.

 

물었다. 혹시, 배우의 한 사람으로서 티브이에 나오는 스타들에 대한 동경이나 부러움은 없었냐고. 그는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들은 그들의 길이 있고, 나에겐 나의 길이 따로 있는 법이죠. 이경미라는 배우를 평가할 때 남들과는 다른 출중한 외모나 또는 뚜렷한 개성이 있다고는 생각을 안 했어요. 가끔 대학로 연극 무대에 대한 목마름은 있었지만, 방송으로 유명세를 타고 싶은 욕망은 없었어요. 공인이라는 타이틀의 피곤함도 싫었지만, 저는 정말로 '십년후'라는 조직에 속한 가족들이 누구보다 소중했어요. 그저 이곳에서 충실히 (실력을) 다져가면서 배우로서의 평가를 어느 정도 받고 싶었을 뿐이었죠"

 

작품이 곧 인생 그 자체가 돼버린 숙명

 

94년 창단한 극단 '십년후'는 많은 어려움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지금은 부평아트센터 상주단체이자 인천지역의 대표 예술단체로 거듭나고 있다. 이경미씨 또한, 취미로 시작한 배우의 길이 어느덧 인생의 한 축이 돼, '십년후'와 함께 사랑을 교감해가고 있다.

 

이씨의 인생 이력은 배우의 길처럼 독특하다. 2001년 '결혼할까요(원제: 시집가는 날)'라는 작품 이후 결혼했고, 2003년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에 출연한 후 딸을 낳았다. 그리고 2004년 단군신화를 모티브로 한 '박달나무 정원'에서 '웅녀'역을 맡으면서 한 아이의 엄마이자 극단 '십년후'를 사랑으로 보듬어가는 어머니로서의 역할에도 인정받게 된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듯, 2008년엔 연극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어머니'로 우현예술상까지 받았다.

 

그가 제일 아끼고 기억에 남는 작품은 뭘까? 잠시 화제를 돌리려고 물어봤다.

 

"극단 후배가 똑같이 물어봐서 기자님이 물어볼 줄 알고 미리 생각해 봤는데요(웃음). (한참을 생각하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듯, 다 내 자식 같은 작품들이어서 딱히 고를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첫 작품은 의미가 있어 가슴에 남고, 못했던 작품은 그것대로 발전의 기회가 되어 생각이 나고, 그리고 잘된 작품은 그 나름대로 만족감이 커 오래도록 기억이 나네요. 뭐, 그래도 굳이 뽑는다면 '박달나무 정원'이랄까요"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세상은 달라진다

 

그는 사회활동도 잊지 않고 꾸준히 하고 있다. 극단 근처에 있는 한 사찰에 나가 '재능기부(연극 교육)'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주부연극아카데미에도 출강하면서 연극을 통한 행복 만들기에 함께 하고 있다.

 

이경미씨는 결국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 겸손을 배우며 '내가 왜 가야하는지 혹은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라는 물음에 답을 찾고 있다고 했다. 어차피 갈 길은 하나이기에 에둘러 가는 것은 시간낭비일 뿐이라며.

 

"제일 좋은 것도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고, 제일 어려운 것도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죠. 처음부터 이 길을 함께 했던 최원영 대표님이 무조건적인 헌신과 사랑을 나눌 때마다 안쓰러움과 미안함이 먼저 앞섰지만, 어느 새부터 제가 최 대표님의 철학을 새기고 있는 것 같아 조금씩 그 분의 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웃음)."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마지막 말을 건넸다.

 

"(잠시 숨을 고르다가) 어차피 사랑이라는 건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내 전부를 다 열어주는 것이잖아요. 매번 구성원이 바뀌니까 어떻게 풀어 가는가가 관건인데, 결국 갈등과 아픔, 고민, 다양성의 문제 또한 사랑 그 자체라고 생각하면 쉽게 해결되죠. 세상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듯이, 결국 나, 너,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 작은 고통을 감수하는 것 아니겠어요. 저에게 마지막 바람이 있다면 극단 모토인 '사랑하며 살겠습니다'처럼 언제나 모든 사람들과 사랑하며 살고 싶은 마음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부평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배우 이경미, #극단 십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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