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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정월 대보름날 한 시민이 군산 시청 주차장에서 연을 날리고 있습니다. 거북선을 형상화한 건물이 이채롭습니다.
 작년 정월 대보름날 한 시민이 군산 시청 주차장에서 연을 날리고 있습니다. 거북선을 형상화한 건물이 이채롭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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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아침에 온 가족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밥상에 둘러앉아 밥도 먹고 이야기꽃을 피우며 부모에게 세배하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풍요롭다. 한 세대(30년) 전만 해도 흔한 광경이었는데 옛날이야기가 된 것 같아 참으로 유감이다.

설날이 언제 어떻게 전통 명절로 정착되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우리는 음력 1월 1일을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찢어지게 가난했던 보릿고개를 넘기면서도 고향을 찾아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다니는 등 민족의 명절로 지켜왔다.

한때는 친일했던 대통령이 '절약'과 '이중과세'를 명분으로 설날 아침에 공무원들을 출근시키면서 양력설을 쇠라고 강권했다. 그럼에도 설날이 가까워지면 고향을 찾는 민족의 대이동은 멈추지 않았다.

우리 민족의 정서를 무너뜨리려는 음모의 세월이었다. 옛날로 돌아갈 수도, 돌아갈 필요도 없겠지만, 어렵게 지켜온 설날이 국적 없는 상업주의에 밀려 전통과 풍습이 아련한 추억 속에서만 머무는 것이 못내 아쉽다.

일제강점기에는 섣달그믐 일주일 전부터 떡 방앗간을 열지 못하게 하였고, 군사독재 시절에는 설날을 공휴일에서 제외했다. 그러나 고향의 하늘과 땅으로 이루어진 몸이 부모를 찾아뵙는데 그 누가 막을 수 있었겠는가. 참으로 자랑스럽고 대단한 민족성이다.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에서는 설날을 아래와 같이 그리고 있다.
 
설날에 세배함은 인정 많고 좋은 풍속이니/ 새 옷 차려입고 친척 이웃 서로 찾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삼삼오오 다닐 적에/ 와삭 버석 울긋불긋 옷차림이 화려하다/ 사내아이 연날리기 계집아이 널뛰기요/ 윷놀이 내기하니 소년들 놀이로다/ 사당에 세배하니 떡국에 술 과일이구나. (농가월령가 <정월령>에서)

어머니와 누님들의 설 준비

아내와 제수씨가 조카며느리와 설 음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2010년 2월)
 아내와 제수씨가 조카며느리와 설 음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2010년 2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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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은 무엇보다 풍성한 음식이 으뜸일 것이다. 설이 다가오면 음식을 장만하느라 손길이 바쁘게 오갔고 고소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외숙모와 '난순네 엄니'는 떡과 부침개를, 어머니는 엿기름을 띄워 밤을 새워가며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식혜를 만들었다.

적당히 말린 가래떡 써는 일도 큰일이었다. 떡국을 하기 위해서였는데, 알맞게 굳은 가래떡을 나무 도마에 올려놓고 한석봉 어머니가 떡을 썰듯 가지런히 너무 두텁지 않게 썰었다. 바싹 말린 가래떡을 화로에 구워 조청을 찍어 먹으면 꿀맛이었다. 

시루떡을 앉힐 때는 무를 썰어서 시루 바닥의 동그란 구멍부터 막았다. 그리고 방앗간에서 빻아온 떡가루와 콩고물이나 팥고물 등을 번갈아 층층이 쌓았다. 다음엔 시루를 가마솥에 올려놓고 김이 새지 못하도록 빙 둘러 시루 빈을 붙이는 것으로 마감하였다.

떡시루에서 김이 모락모락 날 때까지 잘 마른 솔잎으로 불을 지피면 가슴까지 따뜻하게 하는 불꽃이 너울대며 타올랐다. 밖에 함박눈이라도 내려주면 그야말로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는데, 방구들이 뜨끈뜨끈해서 밖에 나가도 섣달그믐의 찬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어머니와 누님들 손때 뭍은 재봉틀. 이웃집에 초상나면 빌려갔기 때문에 동네 재봉틀이었지요.
 어머니와 누님들 손때 뭍은 재봉틀. 이웃집에 초상나면 빌려갔기 때문에 동네 재봉틀이었지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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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을 앞두고 어머니는 시장에서 옷감을 떠나가 풀 먹이고, 말리고, 다듬이질했다. 우리 옷은 사거나 맞췄지만, 아버지와 누님 옷은 직접 만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누님과 어머니가 마주앉아 하는 다듬이질 소리는 경쾌한 음악처럼 참 듣기 좋았다. 

그 옛날 사용하던 재봉틀이 지금도 형님댁에 보관되어 있는데, 옛날 옷감은 요즘처럼 질이 좋지 않아 고운 빛깔을 내기 위해 삶았다가 빨랫줄에 널어 햇볕에 말리고, 다시 잘 접어서 질근질근 온종일 밟거나 다듬이로 다듬었다.

한 땀 한 땀 지어가는 옷으로 정성이 스며들었다. 화로에 쑤셔놓았던 인두를 꺼내 헝겊에 쓱쓱 문지르고, 소매 깃이나 동정을 맵시 있게 다듬던 모습, 가위로 잘라낸 헝겊 쪼가리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안방 풍경이 빛바랜 영상으로 비쳐진다. 

모든 준비가 끝난 섣달그믐이 가장 가슴이 설렜다. 밤하늘의 별들은 아름답게 소곤대고 있는데도 어머니가 준비해준 새 옷과 신불을 머리맡에 두고 행여나 설날 비가 내리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뱃돈 한번 주지 않았던 부모

작년(2010년) 설날 형님댁 차례상 모습.
 작년(2010년) 설날 형님댁 차례상 모습.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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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은 온 가족이 차례를 지내고 장수를 기원한다는 의미가 담긴 떡국으로 시작했다. 소고기와 계란 부침을 가늘게 썰어 넣은 하얀 떡국 위에 솔가지 잔불에 살짝 구워낸 김을 바삭바삭 부숴 넣으면 색과 맛의 조화가 그만이었다. 

지금이야 나이 먹는 게 끔찍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떡국을 먹어야 나이가 드는 줄 알고 얼른 어른이 되고 싶어 한꺼번에 세 그릇을 먹기도 했다. 어른이 뭐가 그리 좋다고, 지금 생각해도 우습기만 하다.

작년 설날 아침을 먹고 부모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세배하는 조카손자 손녀들.
 작년 설날 아침을 먹고 부모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세배하는 조카손자 손녀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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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국을 먹고 아버지 어머니에게 세배를 올렸다. 그러나 부모님은 세뱃돈을 주지 않았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옷과 밥이면 족하다는 거였다. 다른 부모들은 다 주던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동네 점방에서 세뱃돈 까먹는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세배 다닐 이웃이 많았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고 부모가 가라고 지명하는 집만 다녀야 했다. 이곳저곳을 다녀야 세뱃돈도 많이 받을 수 있는데 불만이 아닐 수 없었다. 훗날 왜 그렇게 막았느냐고 물었더니 실수하지 않을까 조심하느라 그랬다고 했다.

옛날의 설날 동네 풍경

설날 아침, 신작로에 나가면 색동저고리 차림의 아이들이 부모 손을 잡고 세배 다니느라 분주하게 오갔다. 사람들은 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덕담을 주고받으며 새해 인사를 나눴다. 젊은 부모 손을 잡고 세배 다니는 아이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그때가 새롭다.

다른 아이들은 싼 '고리 땡' 바지도 어머니가 사준 거라며 자랑하면서 입고 다녔다. 그런데 새 옷차림으로 나가기가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처럼 무섭고 창피했다. 해서 어머니가 '양키시장'에서 맞춰준 새 옷을 구겨 입고서야 대문을 나섰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온다.

대목을 만난 만화방은 아이들로 북적였고, 점방에서는 딱지가 불티나게 팔렸다. 동그란 종이를 떼면 뒤에 적힌 번호대로 가져가는 풍선 떼기, 어쩌다 큰 풍선이라도 떼게 되면 올림픽 경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아이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은 화약 딱총이었다. 오돌오돌한 종이를 찢어 화약가루를 넣고 방아쇠를 당겼을 때 '빵!' 하고 터지는 소리 크기로 상대방을 제압했다. 딱총은 작으면서 화약을 너무 많이 넣어 손을 다치는 아이도 있었다. 여자아이들은 널뛰기,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삔 치기 등을 하였다.

특히 '다마'(유리구슬) 따먹기, 땅바닥에 다섯 개의 홈을 파놓고 하던 '뎅까'(구슬 놀이), 고무줄놀이를 하며 불렀던 노래 등은 왜놈들이 남기고 간 놀이문화의 잔재로 여겨진다.

팽이치기, 제기차기, 땅따먹기(사금파리 놀이), 연날리기, 꽁꽁 언 논바닥에서 썰매 타기, 양지에서 모닥불 피우기, 설 특선 영화구경 등 하루가 행복했다. 가난했지만, 어머니의 정성이 담긴 설빔과 음식, 돌맹이와 얼음도 놀이기구가 되었던 그때가 그립다. 

설이 다가오면 지푸라기에 재를 묻혀 놋그릇을 반들반들하게 닦던 시절로 다시 돌아갈 필요는 없겠지만, 뭔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자꾸 되돌아보게 된다. 사람냄새 나는 설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설날, 떡국, #세배, #전통민속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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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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