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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
 박용만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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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외무총장으로 선임될 만큼 신망을 얻었으나 무력항쟁 기반 조성을 위해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국치(國恥) 100년에 즈음하여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코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북경 이화원 내 기린 동상
 북경 이화원 내 기린 동상
ⓒ Zhangzhe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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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심과 재심, 그리고 상고심에서 이해명은 박용만을 살해한 것은 그가 매당(賣黨)행위를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상고심 마지막 재판에서 판사가 "당신이 명령을 받아 그를 죽이려든 것은 길림에서 총살된 7인 때문인가?" 묻자, "그렇소." 대답한다. 이것은 그간의 주장이 스스로의 확신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판사의 예기치 않은 질문에 답변의 일관성을 놓친 것이다. 독립군 7인을 밀고해서 살해된 것은 박용만과 전혀 연관시킬 수 없는 사건이다.

님 웨일즈(Nym Wales)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김산(金山)은 증인으로 법정에 나왔다. 유금한(劉金漢)이라는 별명을 갖고서였다.

재판관 심문 : 당신은 독립당의 북경주재 대표인가?
김산 답변   : 그렇소
: 이해명이 박용만을 죽인 데 대해 알고 있었나?
: 알고 있소.
: 박은 독립당인가?
: 그러하오. 그러나 박은 민국 13년(1924년) 후로는 독립당이 아닙니다.
: 박에 반당행위가 있었는가?
: 있었다 뿐입니까? 많소. 약간의 증거는 법정에 제출하기 불편합니다만 민국 14년
      (1925년)에 하나의 간행물은 박용만을 추방하라 그 놈을 개를 죽이듯 죽여 없애라고
      하였소. 그 해에 박은 아직까지도 진대화(밀정 김달하)와 왕래하면서 제국주의를 위
      해 봉사하고 있었소.

김산의 증언을 분석하면 그 역시 박용만의 매당행위가 1924년 일본 영사관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다녀온 것과 또 같은 해 풍옥상의 밀사로 조선에 잠입했던 것만을 가리키고 있다. 이건 그 이후 다른 변절행위가 없었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1925년 밀정 김달하와 왕래했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는 그해 3월 30일 처형당함으로써 벌써 그 이전부터 왕래가 없었다. 그리고 이미 언급했지만 안창호나 김창숙도 김달하와 교류했으나 그 때문에 누명이 되지는 않았다.        

단산시보(檀山時報)는 1925년 5월 23일 하와이에서 창간된 교민지로 월 2회 발행됐다. 박용만 지지 성향의 단산시보 5월 30일자에는 '김달하(金達河)의 사(死)'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김달하는 위에서 김산이 말한 대로 박용만이 왕래를 했다는 밀정 진대화이다.

"김달하라는 자는 중국전통동원세계 때부터 북경에 건너와서 중국에 귀화한 사람으로 십여 년 동안이나 중국정계에서 종사하던 바 독립운동이 일어난 후에 왜적과 밀통해 독립사업을 방해할 뿐 아니라 중국의 내정까지 적에게 밀통해 주었었는데 거 3월 삼십일 하오 8시 경에 모험단원 4, 5인이 김가의 집에 들어가서 가족 십칠팔 명을 전부 결박하고 김가만 데리고 협방에 들어가서 교살한 후 종적이 없어진 바 그 집 식구들이 두 시간 후에야 비로소 김가의 교살됨을 발견하고 중국경찰서에 고발해 중국 경관이 범인을 체포코자 활동하는 바 북경에 거류하는 우리 동포는 이 사건으로 많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김가의 불의 무모함을 통쾌히 벌했다 한다더라."

이 기사는 '북경에 거류하는 우리 동포는...'이라고 하는 걸 봐서 북경에서 작성됐으며 작성자는 박용만으로 알려졌다. 기사를 작성할 때 '김가의 불의 무모함을 통쾌히 벌했다 한다더라'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밀정 노릇을 한 적이 있는 사람의 양심에선 나올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일본을 자주 드나들고 일본의 고위관리들과 상대했던 여운형이 변절자가 아니듯 그와 그릇이 비슷한 박용만 역시 하찮은 밀정 김달하와 한 통속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호놀룰루에 있는 다이아몬드 헤드 분화구
 호놀룰루에 있는 다이아몬드 헤드 분화구
ⓒ Prove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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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태평양년회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1925년 7월 8일 박용만은 하와이에 상륙했다. 나흘 만에 열린 환영회에는 3백여 명의 동포들이 모여들었다. 박용만이 6년 전 중국으로 떠나기 전 조직했던 '조선독립단' 단원들과 그의 지지자들이었다. 호놀룰루는 물론 단원들이 있는 여러 섬들을 찾아다니며 그는 연설회를 가졌다. '조선독립단'의 강령과 행동수칙들을 소리 높여 외쳤다.

"우리는 오천년의 오랜 역사를 가진 조국을 사랑함과 동시에 오늘의 현상에 대해 통한해 마지않는다. 고로 광복사업은 일생이 아닌 영원한 목적으로 하고 소위 내정자치나 위임통치와 같은 완전하지 않은 주권은 단연코 그것을 희망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완전한 독립을 회복함에 있고, 그것을 위해서는 군사행동을 감행하는 것을 사양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조선의 영토와 인구가 한 나라로서 독립주권을 영구히 보전하기에 곤란함을 알기에 우리 민족을 종조(宗祖)의 영토인 만주, 시베리아, 몽고 등 각지에 번식시켜 근거를 갖게 하고 세력을 확장해 반도 독립을 위해 직간접으로 운동을 하게하고 점차 서로 조선민족과 국가의 견실을 기하여 만대불쇠의 독립국을 건설하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와 같이 섬약한 민족이 생존하는 소이를 탐구함에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기초가 됨을 확신한다. 이에 우리는 양 극단의 제국주의와 공산주의 등에 대해서는 절대 반대하는 것이다."

하와이에 와서도 그는 독립단의 가까운 동지들에게 진해와 나진 등 일본해군기지를 정탐했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다녀올 때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와 접촉한 사실도 공개했다. 또한 풍옥상의 밀사로 서울에 가 조선호텔에서 묵은 사실도 알려줬다. 그러한 행동들이 변절로 비쳐졌다면 하와이의 동지들이나 지지자들은 그 자리에서그를 내치고 말았을 것 아닌가. 또한 북경에 둔전사업을 계속 추진하라고 3만 불이라는 거액의 헌금을 약정하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 아닌가.

더욱이 박용만 역시 "광복사업은 일생이 아닌 영원한 목적으로 해야 한다"고 그들 앞에서 당당하게 외치지 못했을 것 아닌가.

만주에 한인들을 결집해서 새로운 완충국을 세워보려는 가능성을 찾기 위해 미군 사령관에게 진정서를 제출할 때도 그는 동지들의 이해와 협조를 받았다.

"제국주의와 공산주의 등에 대해서는 절대 반대하는 것이다"라고 굳이 드러낸 것은 그가 몇 번에 걸쳐 소비에트 정권에 대해 실망과 배신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공산주의 소련의 팽창은 제국주의 일본의 통치 못지않게 우려되기 때문에 일본과 협력을 해서라도 막아야 하며 공산주의 동향에 관한 정보를 일본영사관에게 제공하는 '매당(賣黨)'행위도 불가피했다는 사실도 고백했으리라. 

'조선독립단'의 강령에 대해 박용만은 그의 주장을 이어갔다.

"우리는 정치적 혁명에 성공한 후에는 경제적 혁명에 착수하고 전 영토를 인구에 비례해 분산제도(分産制度)'를 실행하기로 한다. 우리는 조선민족이 영구히 독립성을 양성하는 바로써 인생의 노력과 시간과 금전을 낭비하게 하는 것과 같은 일이 없도록 하게 하기 위해 국문개혁을 주장하고 우리의 국문 자모음을 속히 영문 또는 불문과 같은 모양인 가로쓰기로 개선하고, 또한 국세를 연구해 점차 순연한 조선문화를 건설하기로 한다. (후략) "

박용만은 정치적 목표가 실현된 후의 경제적 문화적 목표가 무엇이라는 것을 제시했다. 문화의 주춧돌인 한글의 개선에도 포부를 밝힌다. 전 영토를 인구에 비례해 분산제도를 실행하기로 한다는 경제적 혁명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자세치 않다. 대지주나 대자본가에 부가 너무 집중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조국의 미래를 그처럼 옹골지게 접근하려 했던 그의 자세를 보면 조국에 등을 돌렸다는 어떤 기미도 찾을 수 없지 않은가.

북경 교외의 만리장성
 북경 교외의 만리장성
ⓒ J.S. Bur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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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1911년 10월 25일자 <신한민보>'에 박용만은 '형가와 같고 자방과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말인가.(果無荊軻一人乎 又無子房一人乎 )'라는 논설문을 실었다. 형가와 자방(장자방)은 진시황을 암살하려다 실패했던 사람들이다. 형가는 잡혀 죽고 자방은 초가 멸망된 후 유방을 도와 항우를 물리치고 한(漢)나라를 세운 책사였다. 박용만은 형가나 자방이 걸어갔던 길을 자신도 걸어가겠다는 단호한 각오를 일찌감치 세워두었다. 일본 천왕의 암살을 선동하고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도 거기에 있으며 나라의 원수를 없앤 다음 새 나라를 세우는 데 자신의 신명을 바치겠다는 거였다.

"이 글을 쓰는 자는 일찍이 글을 배우고 칼을 배우며 일평생 노정기(路程記)를 이미 예비한 바라. (중략) 만일 자기 일신을 버려 만승천자를 취하지 못할 때에는 응당 이 글을 쓰는 자의 용렬한 주의를 취해 십년을 교육하고 십년을 재물 모아 천만 명의 힘을 합한 후에 한번 노기를 드러낼 것이다. 두 가지 길이 원래 다 용이치 않거니 그 어려운 것을 피해 아무 것도 생각지 않으면 이는 오늘 조선 사나이의 천직을 버리는 것이니 우리는 결단코 청천백일을 쓰고 원수와 함께 살기를 꾀하지 말지라. 오호라! 가을바람이 소소함이여! 장사의 머리털이 관을 찌르도다. 칼을 어루만지며 길게 노래함이여, 남은 회포가 끊기지 않도다."

그렇다. 일찌감치 그는 일평생 노정기를 미리 써둔 사람이었다. 또한 '광복사업은 일생이 아닌 영원한 목적으로 하고...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완전한 독립을 회복함에 있고, 그것을 위해서는 군사행동을 감행하는 것을 사양하지 않는다'고 '대조선독립단'의 강령을 스스로 작성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인격에 변절의 혐의를 두는 것은 잎사귀 하나로 나무를 판단하려는 어리석음이 아니겠는가.*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cafe.daum.net/woosung18810702)
김도훈 저 '미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 박용만'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이영신 저 '서왈보 이야기'
조규태 - 박용만의 중국에서의 민족운동
배경식 - 임시정부 외무총장 박용만 암살사건. 공개처형인가, 암살인가?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집필에 도움 주신 분들-
한애라, 서정자, 신원호, 박도, 유민철, 정대화, 오은택, 이정묵, 이지운, 이미경(존칭 생략)


태그:#박용만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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