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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정상을 향해 구불거리고 쌓은 석주관성. 사적 제385호이다
▲ 석주관성 산 정상을 향해 구불거리고 쌓은 석주관성. 사적 제385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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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생각하는 성이란 높이가 있고, 견고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바꾸어 놀만한 성이 있다. 바로 사적 제385호로 지정이 된 '석주관성'이다.지난 2월 28일 찾아간 석주관성은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산65번지 일대에 있는 산성이다. 산성이라고 하면 사방에 문을 내고 장대가 있으며, 쇠판을 붙인 문이 견고하게 자리를 잡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이 석주관성은 그런 성에 대한 상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얼핏 성이라기보다는 그저 적의 공격을 피할 수 있도록 조성한 돌담 정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사적인 석주관성은 석주관을 지키는 성이었다. 석주관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지리산의 요새이다. 이 석주관성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구례에서 섬진강을 끼고 하동 방향으로 10km 정도를 가면 발견할 수가 있다.

성의 높이는 불과 1~1m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 석주관성 성의 높이는 불과 1~1m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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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쌓은 길목의 요충지 석주관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에는 사적 제106호인 '칠의사 묘' 가 있다. 이 일곱 명의 충절의사를 배향한 칠의사 안으로 들어가면 우측 건물 뒤편에 일각문이 나온다. 일각문을 빠져 나가면 우측으로 산길을 보이는데, 20여m를 가면 석축산성이 보인다. 이 산성은 하동으로 나가는 도로의 좌측에 높이 약 10m의 낭떠러지가 나오며, 이곳이 석주관이다.

석주관은 삼한시대에는 마한과 진한의 경계였으며,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의 경계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군사상 중요한 요충지였고, 고려 때에 들어서는 남해에서 침입한 왜구를 막기 위해, 성을 쌓은 곳이기도 하다. 석주관은 북쪽과 남쪽이 지리산과 백운산의 험한 산줄기가 이어지고, 그 사이를 섬진강이 흐르고 있는 천혜의 요충지이다.

석주관은 호남지역에 현존하는 유일한 관문으로, 고려 후기인 13세기에서 조선조 임진왜란을 거친 16세기까지의 성을 쌓은 기법 등을 연구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다. 이곳 석주관은 진주와 하동을 거친 적이 구례와 남원으로 이동을 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하기에 이 석주관은 군사적 요충지로 상당히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섬진강 가에서 산 위로 오르는 석주관성
▲ 석주관성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섬진강 가에서 산 위로 오르는 석주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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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로는 끝이 섬진강으로 향하고 있다. 그 끝에 돌로 쌓은 관문인 석주관이 있었다
▲ 석주관성 아래로는 끝이 섬진강으로 향하고 있다. 그 끝에 돌로 쌓은 관문인 석주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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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때 접전지인 석주관성

석주관이 처음으로 설치가 된 것은 고려 때이다. 고려 말에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이곳에 진을 설치하였는데, 임진왜란 당시 조선 선조 25년인 1592년에 고려 때의 진성 위에, 전라방어사 곽영이 호남의 왜구를 막기 위해서 이 석주관성을 쌓았다고 한다. 곽영은 구례 현감인 이원춘에게 석주관 방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때의 석주관성의 형태는 성이라기보다는 전란을 맞아 급하게 쌓은 방어벽 수준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석주관성은 돌로 축성을 한 곳, 흙으로 쌓은 곳, 돌과 흙을 섞어 쌓은 곳 등이 있다고 한다. 남아있는 석주관성을 보면 경사진 산허리의 정상부를 따라 축조되었는데, 성곽의 총 길이는 약 736m에 석축의 높이는 100~150cm 정도이다. 성곽의 아래 폭은 1.4~1.5m, 위쪽은 50~90cm정도이다.

석축에 일정한 간격으로 단을 두고, 단과 단 사이에 성의 여장에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도록 갈라놓은 타구가 있다. 적의 공격 시에 효과적으로 대응을 하기 위해서이다. 조선 선조 31년인 1598년 정유재란 당시, 왜군은 호남지방을 목표로 하여 이곳 석주관을 집중 공격하였다. 구례현감 이원춘은 적을 맞아 석주관에서 방어를 하다가, 끝내 관성을 적에게 내어주고 남원성으로 후퇴를 하였다.

막돌로 쌓은 석주관성은 성이라기 보다는 방어벽과 같은 형태이다
▲ 석주관성 막돌로 쌓은 석주관성은 성이라기 보다는 방어벽과 같은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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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관 만호 이원춘이 남원성에서 적과 싸우다가 최후를 맞이하자, 왕득인이 의병을 일으켜 석주관을 사수하고 나섰다. 왕득인은 진주에서 올라오는 적과 대항하여, 필사적으로 석주관을 방어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숨지고 말았다. 그 후에도 많은 의병들이 석주관을 사수하려고 힘을 합쳐 처절한 혈전을 전개하였으나, 석주관은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석주관성을 돌아보다

칠의사에 들렸다가 일각문을 통해 산길로 들어섰다. 바로 앞에 길게 산등성이를 항해 치닫고 있는 석주관성이 보인다. 그러나 성이라고 하기에는 나무 낮다. 석주관성은 최근에 다시  복원을 하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옛 흔적을 복원을 한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많은 문화재의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석주관성의 복원에 담긴 뜻은 남다를 것이란 생각이다.

낮은 석주관성. 이 낮은 석주관성을 방패로 삼아 밀려드는 적을 막기 위해 사력을 다했을 병사들과 의병들. 누가 그들을 시켜서가 아니다. 스스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이곳에서 피를 흘렸을 것이다. 그 마음 하나만 배워간다고 해도,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시로 쌓은 성곽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동과 진주를 거친 왜병과 접전을 벌인 성이다. 죽음으로 성을 사수하려던 의벼과 승병들이 무수히 피를 흘린 곳이기도 하다
▲ 석주관성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시로 쌓은 성곽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동과 진주를 거친 왜병과 접전을 벌인 성이다. 죽음으로 성을 사수하려던 의벼과 승병들이 무수히 피를 흘린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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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편을 바라다본다. 낮게 쌓여진 석주관성이 섬진강을 향해 내려가고 있다. 아마 저 끝에 돌로 쌓은 석주관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사람들의 기억에서 조차 가물거리는 옛 이야기 하나가, 오늘 이 낮은 관성에서 새롭게 피어난다. 이런 석주관성을 교육의 장으로 삼아야 할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뒤돌아선다. 어디선가 석주관을 지키기 위해 목이 터져라 부르짖는 의병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태그:#석주관, #관성, #사적, #구례, #정유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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