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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증권사 객장에서 개인투자자들이 주식시세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다(자료사진)
 한 증권사 객장에서 개인투자자들이 주식시세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다(자료사진)
ⓒ 선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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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주차장은 이미 출근시간이 지났건만 서 있는 차들로 빼곡하다. 치솟는 기름 값에 발이 묶인 차들인 모양이다. 나도 오늘은 저들처럼 차를 세워 두고 걸어 보기로 했다. 하지만 걸어보기로 한 속내 저 밑바닥에는 천천히 생각할 시간을 좀 갖고 싶어 그랬다는 걸 이미 내 자신은 알고 있다. 이제 막 벚꽃이 피기 시작하는 비엔날레 공원 앞을 지나가는데 그만 맥이 탁 풀린다. 겉보기엔 그저 아무 일 없이 흘러가는 시간인 것 같은데도 어느 날 복병처럼 나타나는 이런 일들을 어떻게 풀어내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정확한 날짜는 기억할 수 없지만 모처럼 하루 일을 쉬고 있던 날이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낮잠을 자다가 이상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저기 사모님, 여기 광주은행 ㅇㅇ지점 ㅇㅇ대리인데요, 어떤 남자분이 사모님 댁을 담보로 대출 신청을 하고 싶다고 왔는데 어떡할까요?"
"잉? 그럴리가요. 그 남자 좀 바꿔 주세요."

그런데 수화기를 건네 받고 "여보세요?"하는 남자는 다름 아닌 내 남편이었다. "당신 거기서 뭐해?"라고 묻는 내게 남편은 "집에 가서 얘기해" 하고선 아주 점잖게 전화를 끊는다. 남편이 퇴근해 돌아올 때까지는 그냥 별일 아니겠지 생각했는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편의 표정이 영 껄적지근했다.

"무슨 일이야?"

다른 집은 어떤지 모르지만 우리 부부는 그다지 많은 말을 하고 살진 않는다. 시시콜콜 간섭도 안 하는 편이다. 그냥 적당히 알아서 살아 봅시다, 그러는 편이다. 평소대로 내가 한 말은 겨우 무슨 일이야? 한마디였다. 그런데 내 간단한 물음에 대한 남편의 대답은 그리 간단치가 않았다.

코앞으로 다가온 대출금 상환일... 부채갚을 돈으로 주식한 남편

주식 시장의 모습을 담고 있는 드라마 <마이더스>
 주식 시장의 모습을 담고 있는 드라마 <마이더스>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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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남편은 잠깐 사업을 하면서 소상공인 창업대출을 받았었다. 책상물림인 남편에겐 사업이 맞지 않아 얼마 후 정리를 해버렸지만 대출 받은 돈은 고스란히 은행에 빚으로 남아 있었다. 2년 전, 대출금 갚을 방법을 찾다 남편 급여는 자동이체로 적금 통장에 넣고 생활비는 어떻게든 내 급여로 살아보자는 결론에 다달았다. 그렇게 남편의 급여를 자동이체해 목돈 만드는 적금으로 넣었고 그간 순전히 내 돈으로 생활을 해왔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이제 대출금 상환일이 되어 남편한테 적금 들었던 걸 가져 오라고 했는데 남편은 그동안 정말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처음 월급 서너 달은 적금을 잘 넣다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들던 적금을 깨버리고 곧바로 주식투자를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그럭저럭 재미가 있었는지 개인연금 만기된 것에까지 손을 대고 이것저것 수중에 있는 돈은 다 주식투자에 써버리고 말았다. 대출금 상환일은 다가오는데 주식은 오르질 않아 팔 수도 없어 결국 은행에 대출을 받으러 갔다는 얘기였다.

"아이고 하느님, 머 저런 잉간이 다 있다요"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런데 그 많은 돈으로 주식을 하면서도 집에 돌아 와 있을 때 남편의 모습은 정말로 한 가지도 달라 보이는 게 없었다. 언제나 똑같은 얼굴로 밥 먹고 웃고 잠자고. 어느 한 구석 곤두박질 치는 주식을 끌어 안고 마음고생하고 있다는 표시도 내지 않았다. 은행 대리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우리 남편은 평소와 똑같은 일상생활을 잘도 영위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속앓이를 하고 있는 부분은 어떻게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사람이 여유자금도 아닌 가족의 생계문제가 달린 돈으로 주식투자 할 생각을 했는지에 있다. 그렇게 난감한 일을 벌여 놓고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잠이 왔을까 싶어 가끔씩 물끄러미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때가 있다.

주변에 생전 안 하던 아쉬운 소리를 해서 마련한 돈으로 대출금을 상환하러 갔더니 은행 대리의 말이 더 기가 막혔다. 언제든지 돈이 생길 때마다 갚아도 되는 거였단다. 세상에나, 은행에서 적어 준 대출금 상환 날짜에만 갚아야 되는 줄 알고 적금 넣을 생각만 했다는 게 그렇게 속상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한 보름쯤 남편은 제법 우울한 얼굴로 출·퇴근을 하더니 이즈음은 아무일 없었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내 자신이었다. 아무리 없었던 일로 만들어 보려 해도 도무지 없었던 일로 묻히지가 않고 자꾸 새삼스럽기만 하다는 것이다.

남편만 보면 답답해지는 가슴... 주식 얘기가 내 발등 찍을 줄이야

이제 생각지도 않게 날아가 버린 돈 문제의 충격에서는 얼마쯤 벗어나 있는 상태지만 거실에 앉아 아주 평화로운 얼굴로 텔레비전를 보고 있다 간간이 웃음소리까지 내는 남편을 보고 있자면 그냥 할 말이 없어져 버린다. 그런데도 나는 아이들이랑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이런 저런 궁리를 하고 있는 걸 보면 눈앞의 현실이 거 참, 징글맞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도 답답한 마음에 여기 저기 길바닥을 헤매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가슴 속은 솜뭉치로 틀어 막아 놓은 것처럼 숨이 안 쉬어진다.

일을 하고 있는 낮 시간 동안에는 잠깐 잊었다가 밤이 되어 불을 끄고 누우면 캄캄한 벽들이 일제히 일어서며 숨을 조인다. 잠들기를 포기하고 일어나 나와 베란다에 서면 저만치 도시의 밤 불빛이 환하다. 답답한 마음에 전화기를 들고 서울 사는 동생한테 전화를 했더니 아주 간단하게 한마디 한다.

"내 친구 남편은 주식 투자 실패해서 주민등록까지 말소하고 자기 엄마랑 아주 사라졌대. 형부는 사라진 건 아니니깐 그냥 한 번만 봐 주고 살어라."
"그래 누가 안 산다고 했냐? 숨이 안 쉬어진다고 했지. 써글년."

전화를 끊고 생각하니 이 모든 게 아직도 남의 일 같기만 하다. 주식투자 얘기가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으니 말이다.


태그:#남편 , #대출, #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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