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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증권사 객장에서 개인투자자들이 주식시세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다(자료사진) |
ⓒ 선대식 | 관련사진보기 |
아파트 주차장은 이미 출근시간이 지났건만 서 있는 차들로 빼곡하다. 치솟는 기름 값에 발이 묶인 차들인 모양이다. 나도 오늘은 저들처럼 차를 세워 두고 걸어 보기로 했다. 하지만 걸어보기로 한 속내 저 밑바닥에는 천천히 생각할 시간을 좀 갖고 싶어 그랬다는 걸 이미 내 자신은 알고 있다. 이제 막 벚꽃이 피기 시작하는 비엔날레 공원 앞을 지나가는데 그만 맥이 탁 풀린다. 겉보기엔 그저 아무 일 없이 흘러가는 시간인 것 같은데도 어느 날 복병처럼 나타나는 이런 일들을 어떻게 풀어내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정확한 날짜는 기억할 수 없지만 모처럼 하루 일을 쉬고 있던 날이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낮잠을 자다가 이상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
저기 사모님, 여기 광주은행 ㅇㅇ지점 ㅇㅇ대리인데요, 어떤 남자분이 사모님 댁을 담보로 대출 신청을 하고 싶다고 왔는데 어떡할까요?""잉? 그럴리가요. 그 남자 좀 바꿔 주세요."그런데 수화기를 건네 받고 "여보세요?"하는 남자는 다름 아닌 내 남편이었다. "당신 거기서 뭐해?"라고 묻는 내게 남편은 "집에 가서 얘기해" 하고선 아주 점잖게 전화를 끊는다. 남편이 퇴근해 돌아올 때까지는 그냥 별일 아니겠지 생각했는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편의 표정이 영 껄적지근했다.
"무슨 일이야?"다른 집은 어떤지 모르지만 우리 부부는 그다지 많은 말을 하고 살진 않는다. 시시콜콜 간섭도 안 하는 편이다. 그냥 적당히 알아서 살아 봅시다, 그러는 편이다. 평소대로 내가 한 말은 겨우 무슨 일이야? 한마디였다. 그런데 내 간단한 물음에 대한 남편의 대답은 그리 간단치가 않았다.
코앞으로 다가온 대출금 상환일... 부채갚을 돈으로 주식한 남편 5년 전, 남편은 잠깐 사업을 하면서 소상공인 창업대출을 받았었다. 책상물림인 남편에겐 사업이 맞지 않아 얼마 후 정리를 해버렸지만 대출 받은 돈은 고스란히 은행에 빚으로 남아 있었다. 2년 전, 대출금 갚을 방법을 찾다 남편 급여는 자동이체로 적금 통장에 넣고 생활비는 어떻게든 내 급여로 살아보자는 결론에 다달았다. 그렇게 남편의 급여를 자동이체해 목돈 만드는 적금으로 넣었고 그간 순전히 내 돈으로 생활을 해왔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이제 대출금 상환일이 되어 남편한테 적금 들었던 걸 가져 오라고 했는데 남편은 그동안 정말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처음 월급 서너 달은 적금을 잘 넣다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들던 적금을 깨버리고 곧바로 주식투자를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그럭저럭 재미가 있었는지 개인연금 만기된 것에까지 손을 대고 이것저것 수중에 있는 돈은 다 주식투자에 써버리고 말았다. 대출금 상환일은 다가오는데 주식은 오르질 않아 팔 수도 없어 결국 은행에 대출을 받으러 갔다는 얘기였다.
"아이고 하느님, 머 저런 잉간이 다 있다요"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런데 그 많은 돈으로 주식을 하면서도 집에 돌아 와 있을 때 남편의 모습은 정말로 한 가지도 달라 보이는 게 없었다. 언제나 똑같은 얼굴로 밥 먹고 웃고 잠자고. 어느 한 구석 곤두박질 치는 주식을 끌어 안고 마음고생하고 있다는 표시도 내지 않았다. 은행 대리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우리 남편은 평소와 똑같은 일상생활을 잘도 영위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속앓이를 하고 있는 부분은 어떻게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사람이 여유자금도 아닌 가족의 생계문제가 달린 돈으로 주식투자 할 생각을 했는지에 있다. 그렇게 난감한 일을 벌여 놓고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잠이 왔을까 싶어 가끔씩 물끄러미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때가 있다.
주변에 생전 안 하던 아쉬운 소리를 해서 마련한 돈으로 대출금을 상환하러 갔더니 은행 대리의 말이 더 기가 막혔다. 언제든지 돈이 생길 때마다 갚아도 되는 거였단다. 세상에나, 은행에서 적어 준 대출금 상환 날짜에만 갚아야 되는 줄 알고 적금 넣을 생각만 했다는 게 그렇게 속상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한 보름쯤 남편은 제법 우울한 얼굴로 출·퇴근을 하더니 이즈음은 아무일 없었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내 자신이었다. 아무리 없었던 일로 만들어 보려 해도 도무지 없었던 일로 묻히지가 않고 자꾸 새삼스럽기만 하다는 것이다.
남편만 보면 답답해지는 가슴... 주식 얘기가 내 발등 찍을 줄이야이제 생각지도 않게 날아가 버린 돈 문제의 충격에서는 얼마쯤 벗어나 있는 상태지만 거실에 앉아 아주 평화로운 얼굴로 텔레비전를 보고 있다 간간이 웃음소리까지 내는 남편을 보고 있자면 그냥 할 말이 없어져 버린다. 그런데도 나는 아이들이랑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이런 저런 궁리를 하고 있는 걸 보면 눈앞의 현실이 거 참, 징글맞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도 답답한 마음에 여기 저기 길바닥을 헤매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가슴 속은 솜뭉치로 틀어 막아 놓은 것처럼 숨이 안 쉬어진다.
일을 하고 있는 낮 시간 동안에는 잠깐 잊었다가 밤이 되어 불을 끄고 누우면 캄캄한 벽들이 일제히 일어서며 숨을 조인다. 잠들기를 포기하고 일어나 나와 베란다에 서면 저만치 도시의 밤 불빛이 환하다. 답답한 마음에 전화기를 들고 서울 사는 동생한테 전화를 했더니 아주 간단하게 한마디 한다.
"내 친구 남편은 주식 투자 실패해서 주민등록까지 말소하고 자기 엄마랑 아주 사라졌대. 형부는 사라진 건 아니니깐 그냥 한 번만 봐 주고 살어라." "그래 누가 안 산다고 했냐? 숨이 안 쉬어진다고 했지. 써글년." 전화를 끊고 생각하니 이 모든 게 아직도 남의 일 같기만 하다. 주식투자 얘기가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