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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글

한 여학교에서 공출한 놋그릇을 한데 모아놓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942년]
 한 여학교에서 공출한 놋그릇을 한데 모아놓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942년]
ⓒ 눈빛출판사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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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2일, 서울 일대는 일본군경에게 둘러싸인 채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과 일본국 조선통감 데라우치(寺內正毅)는 '한일병합' 조약을 체결하였다. 일본은 한국인들이 이 사실을 알면 분노가 폭발할 것을 염려하여 숨겨오다가 일주일 뒤인 8월 29일에 발표했다.

이날 경복궁 근정전 정문에는 두 폭의 일장기가 내걸렸다. 이날은 우리 5천년 역사상 이민족에게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긴 가장 치욕스러운 날이었다. 이로써 우리 백성들은 나라를 잃은'망국민'으로, 나라 없는 설움과 함께 혹독하고 악랄한 일제강점기를 맞았다.

2. 일제강점기의 수난

이 강제병합 소식을 듣고 일부 지사들은 순절(殉節)하는가 하면, 조국 광복의 씨앗을 심고자 해외로 망명의 길을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백성들은 분노를 삭이며 일제가 휘두르는 총칼 아래 숨을 죽인 채 목숨을 연명했다.

일본은 몽매에도 그리던 대륙진출의 한일병합을 이룬 뒤, 곧장 토지조사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동양척식회사를 앞세워 조선의 토지를 빼앗고는 일본인들을 속속 이주시켰다. 병합 초기에는 한국인 가운데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는 것을 막고자 총독부에서는'조선인의 성명 개칭에 관한 건'을 공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1941년에는 태평양전쟁을 도발하고는, 한국인에게 선심을 쓰듯이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을 펼치면서 '내선일체(內鮮一體)'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교육을 통해 오히려 한국인의 정체성 말살에 혈안이 되었다. 그 방안으로 창씨개명을 실시하여 한국인의 성과 이름을 모두 일본식으로 바꾸게 했다.

수풍댐 건설현장의 한국인 노동자들
 수풍댐 건설현장의 한국인 노동자들
ⓒ 눈빛출판사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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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일본이 부족한 자원을 메우고자 한국인을 그들의 신민으로 만들어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군인으로, 노동자로, 심지어는 군대 위안부로 침략전쟁에 동원하고자 함이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강제 동원된 한국인 노동자는 150만 명 내외로 추산하는 바, 한국인이 가장 많이 투입된 곳은 탄광이었고, 다음은 금속광산, 토목공사장, 군수공장 순이었다.

일본은 강제 동원한 한국인 노동자들을 군대식으로 편성 통제했다. 작업장이 군사시설 공사인 경우에는 도망을 방지한다는 구실로 공사장 주변에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을 둘러치기도 하고, 공사가 끝난 뒤에는 군사기밀 누설을 방지한다는 이유로 노동자들을 집단 학살키도 했다.

한때 욱일승천하던 일본이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에 대패하면서 그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이에 일본은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고자 징병제를 한국에도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조선청년특별연성령을 공포하여 17세부터 21세에 이르는 조선 청년들을 지원병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징집해 갔다.

또 총독부는 부족한 군수물자를 메우고자 집안의 유기로 된 밥그릇은 물론 숟가락 젓가락까지 모두 공출해 갔다. 1943년은 전체 쌀 생산량의 68퍼센트인 1264만 섬을 공출로 거둬 갔다. 일본은 쌀만 공출해 간 게 아니었다. 각종 쇠붙이는 모두 공출품목이 되었다. 사찰과 교회의 종, 교량의 난간, 서양인 선교사의 동상과 기념물 등, 금속이라면 모두 철거 회수해 갔다.

강제 징용된 한국인들은 사할린, 남양군도, 중국, 동남아시아의 광산, 비행장 건설공사장 등에서 일했다. 이들은 사실상 임금을 받지 못했다. 우편저축, 은행적금, 채권 매입, 보험 등 각종 명목으로 임금을 차압당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패전하자 그 증서들은 휴지가 돼 버렸다. 그나마 징용 현장에서 목숨이라도 연명했으면 다행이었다. 징용자 가운데는 안전사고로 죽거나 다치고, 일본인 감독에게 맞아죽거나 굶어서 죽거나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사람도 많았다.

조선에서 끌려온 사람들은 일본말을 전혀 못하는 사람뿐이었습니다. … 매일 12시간씩 일하고 나면 피곤해서 뻗어버리곤 했습니다. 이 때문에 환자도 많이 나왔습니다. 일이 끝나면 "꾀병을 부려서 사보타지 한다"고 사토 헌병에게 죽을 만큼 얻어맞았습니다. 그는 조선 사람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마구 구타했습니다. 일제는 우리들에게 "급료를 주면 노름하게 되고 써버리니까, 저금해 두었다가 귀국할 때 주겠다"고 말했으나, 종전으로 한 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징용기간 동안 단지 그들에게 일만 해준 꼴이지요.
- 사할린 거주 김병룡(1927년생) 씨 증언,  박도 엮음, 눈빛출판사 <일제강점기> 684쪽

사할린 거주 김병룡(가운데 안경 쓴 이)씨 가족.
 사할린 거주 김병룡(가운데 안경 쓴 이)씨 가족.
ⓒ 눈빛출판사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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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근현대사에 대한 소고

나는 전직 고등학교 국어교사였다. 몇 년 전, 어느 하루 대학 수시 입시에 전형한 학생이 다음날 등교하였는데 표정이 밝지 않았다. 그 까닭을 묻자 입시 면접관이 '윤봉길 의사'에 대해 물었는데, 답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얘, 너 그것도 몰랐니?"라고 꾸짖으려다가 순간 그 잘못은 나에게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닫고는 입을 닫았다.

우리 기성세대들은 학생들에게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는 그들이 역사를 모른다고 꾸짖는다. 그들이 쉽게 읽을 책도 마련해 주지 않고서 역사에 대한 배움이 적다고 그들을 탓한다.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은 최근 100년 전후의 근현대사는 제대로 배울 수도 없었고, 배우지도 못했다. 솔직히 나는 내 고향 출신 임은 마을 왕산(旺山 許蔿) 집안의 찬연한 항일역사조차도 전혀 모른 채 50여 년을 살았다.

이 부끄러움이 내가 교단을 떠나 항일 역사를 더듬게 했다. 그로부터 10여 년 간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그리고 우리나라 곳곳의 근현대사 유적지를 기웃거렸다. 그리고 학자들이 애써 남긴 많은 역사책의 책장을 넘겼다.

그러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내가 근현대사 현장을 찾아간 이야기와 그 역사 현장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이를 기록한 역사를 좀 더 쉽고 현장감 있게 써서 사진과 함께 젊은 세대들에게 전해 주는 일이었다. 마치 어미닭이 모이를 찾아 이를 잘게 쪼아 병아리에게 먹여주는 그런 역할을 나는 하고 싶었다. 이렇게 하여 그동안 펴낸 책이 <항일유적답사기>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 <영웅 안중근> <일제강점기> 등이다.

일제강점기의 중학교 학생들. [1944년]
 일제강점기의 중학교 학생들. [1944년]
ⓒ 눈빛출판사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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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무리 말

내가 이들 책을 집필하면서 가슴 뭉클한 점은, 자료를 뒤적일 때마다 나라를 빼앗긴 우리 선열들이 일제강점기 35년 내내 단 하루도 일제에 항쟁치 않은 날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면서 일제강점기의 창씨개명, 일어상용, 신사참배, 강제 징용 징병, 정신대 등의 자료를 보고는 일본의 야만과 부도덕에 분노치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인천공항이나 부산 국제여객터미널부두에는 여행객들이 하루에도 수천 명씩 일본으로 드나들고 있다. 이런 국제화 시대에, 우리는 일본을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로만 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날의 한일 간의 역사를 똑바로 안다면 우리는 다시 일본에게 치욕을 당하는 시행착오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인천항 부두에 야적된 대일 반출미들 [1930년대]
 인천항 부두에 야적된 대일 반출미들 [1930년대]
ⓒ 눈빛출판사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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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역사학자는 "영국 사람은 역사를 아끼며, 프랑스 사람은 역사를 감상하고, 미국 사람은 역사를 쌓아간다"고 한다. 그들은 조상의 어둡고 부끄러운 역사도 있는 그대로 보존하면서 후손들에게 바른 역사를 일깨워준다.

현명한 백성들은 후손을 위해 역사를 올곧게 기록하고, 후손은 조상이 남긴 역사를 아끼면서 배우고 다음 세대에 바르게 전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발간 월간 '뉴스레터' 24호(2011. 4.) 권두 시론에 게재된 글임



태그:#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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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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