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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아낀다고 이 시꺼먼 양말을 기워서 신는데도 오늘 국회 온다고 만 원짜리 잠바도 사 입었는데… 왜 안 들여보내주노."

 

2일 오전 10시 30분, 장영엽(70)씨는 국회 정문 앞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들 결혼 비용을 모두 저축은행에 쏟아 부어 아들 볼 낯이 없다는 장씨. 그는 이날 부산저축은행 피해자 300여 명과 함께 국회 방문을 온 터였다. 피해자들은 본래 국회 마당에서 국회의원들과 간담회를 가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경찰들이 피해자들을 삥 둘러막아 세워 장 할머니와 함께 온 이들 대부분이 여의도 공원 앞 산업은행 건물 앞에 갇힌 상황이었다.

 

발이 묶인 산업은행 앞에서는 "와 막노, 내 돈 내놔라"라는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우리가 도둑놈인가, 우리가 무슨 죄를 졌다고 그러는데"라며 소리치던 한 할머니는 실신해 병원으로 이송되기도 했다.

 

김상철 부산저축은행 비상대책위 부위원장(가명)은 "우리는 국회에 항의 방문하러 온 게 아니다"라며 "한나라당·민주당 의원들에게 도와줘서 고맙다는 뜻으로 찾아왔는데 정부는 우리를 폭도로 몰고 있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경찰 측 관계자는 거센 항의에도 "박희태 국회의장이 G20 행사 관계로 이달 18일까지 국회에 단체 조직의 출입을 금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출입을 하려면 의장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며 "박 국회의장이 (피해자들의 방문을) 차단해 달라는 요구를 해서 영등포경찰서가 출동한 것"이라는 입장만 되풀이했다. 전체가 다 국회로 가야 한다는 비대위 측과 소수만 가야 한다는 경찰 간의 승강이 끝에 결국 대표자 5명만 국회로 향했다. 

 

피해자들 "부산 의원들 바짝 긴장해야"

 

우여곡절 끝에 국회 안으로 들어간 대표자 5명은 조경태 민주당 의원을 만날 수 있었다. 조 의원은 "서울에서 이런 일이 터지면 가만있겠나, 부산 사람만 차별받아서 되겠냐"며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라는 것을 포퓰리즘이라면 이것이야말로 역차별"이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부산 지역 의원들이 저축은행에 투자한 예금과 후순위 채권 전액을 보상하는 법안을 내놓은 것을 두고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이 이는 데 대한 반응이었다.

 

해당 법안을 대표 발의한 이진복 한나라당 의원과 박민식·김정훈 의원이 현장에 내려왔지만 굳게 닫힌 국회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비대위의 김 부위원장은 한나라당 의원을 향해 "어떻게 하는지 똑똑히 지켜볼 것"이라며 "부산도 변한다, 부산 의원들 바짝 긴장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놨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국회 사무처와 얘기해보겠다고 했지만 논의는 더디게 진행됐다. 결국 간담회 예정 시간인 오전 10시를 2시간이나 넘긴 오후 12시가 돼서야 국회 정문이 열렸다. 국회 밖에서 기다리던 피해자들도 그제야 국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들은 "누구나 방문할 수 있는 국회에 우리가 왜 한참동안 못 들어가냐"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김옥주 위원장 "억울하게 빼앗긴 재산 찾아달라"

 

이러한 승강이 끝에 시작된 간담회는 헌정기념관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는 정의화 국회부의장, 서병수, 안경률, 허원제, 장제원, 김세연, 이종혁, 유재중 한나라당 의원 등이 추가로 합류했다. 앞서 국회 앞에서부터 함께한 4명의 의원을 합하면 부산지역 의원(18명)들 중 2/3인 12명이 자리한 셈이다.

 

김옥주 부산저축은행 비상대책위 위원장은 "예금자 보호법 개정안을 내놓은 것은 반갑게 생각하지만 정부와 의원들이 짜고 고스톱 치는 게 아닌가 확인하고 싶었다"며 "이렇게 의원들이 많이 나오니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는 마음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우리는 한평생 폐지 주워가면서 피땀 흘려 모은 돈을 정당하게 예금했고 정당하게 살았다"며 "그런 돈을 억울하게 날릴 수 없기에 우리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그는 "국회의원으로서 우리 서민들의 마음을 다 풀어주고, 억울하게 빼앗긴 재산을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조경태 민주당 의원은 "서민 위한다는 정치인들은 저축은행 사태를 해결하지 못하면 사퇴해야 한다, 말로만 서민 운운하지 말라"며 "저축은행의 부실과 관리 감독의 책임은 금융위원회에 있으니 이에 따른 재산권 피해는 국가가 100% 보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 의원은 "(예금자 보호법 개정안을) 반드시 통과시켜 단 한 사람의 피해자도 나와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피해자들 사이에서는 "맞습니다, 속이 다 시원하다"는 말이 터져 나왔다.

 

피해자 증언에 눈물바다 된 간담회장

 

부산 지역의 유일한 야당의원인 조 의원이 '사퇴'를 운운하며 세게 나갔지만 여당 의원들은 한발 물러선 모습을 보였다. 청와대에서 해당 법안에 대해 "도덕적 해이를 부추길 수 있다"며 부정적 입장을 밝히고 여론도 '지역 이기주의'로 흐른 까닭이다.

 

예금자 보호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이진복 의원은 '포퓰리즘' 비판에 대해 "여기 동네 분이 몇 분이나 계시냐, 몇 표 얻으려고 법안을 발의한 게 아니다"라며 "이 법이라도 만들어서 논쟁을 이끌어 내 보상에 대해 얘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법안이 원안대로 통과되는 건 10%도 안 된다"고 덧붙였다. 법안을 발의한 취지 자체가 '법안 통과'라기보다는 논쟁을 이끌어내기 위한 방책이라는 설명이다.

 

김정훈 한나라당 의원 역시 "모든 법안이 그대로 100% 통과되는 게 아니고 논의과정에서 수정될 수 있다"고 선을 그었다. 이어 김 의원은 "보장이 되지 않는 5000만 원 초과 예금액이 2200억 원에서 2300억 원으로 그리 많지 않으니 5000만 원이 넘는 예금주 중에서 재산이 많은 이와 적은 이를 분리해서 처리하면 서민을 보호할 수 있지 않겠냐"고 말했다.

 

비대위와 여야 의원들이 서로의 입장을 확인한 간담회의 마지막은 저축은행 피해자인 박성자(65)씨의 증언으로 마무리됐다.

 

"정신연령이 6~7살인 남편은 내가 나가기만 하면 보챕니다, 압니까. 그런데도 65살 먹은 지금도 나는 파출부 다닙니다, 압니까. 오만 때 일 다 하면서 새끼들 배 안 곯릴라고 악을 쓰고 살았어요. 후순위가 뭔지도 모르고 1400만 원 끌어모아 이자 조금 더 받으면 전화세·수도세·전기세 내려 한 죄밖에 없어요.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짓밟으면 안 됩니다. 정말로 꼭 좀 도와주세요."

 

박씨의 절절한 사연에 울음바다가 된 간담회장은 착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끝이 났다.


태그:#저축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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