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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건국 100주년을 맞아, 질곡의 우리 근대사와 함께 해온 화교들, 특히 군산 화교 자녀 초등 교육의 어제와 오늘을 정리했습니다. 자료를 제공해준 군산 화교협회 '형광의'(67세) 회장에게 감사드립니다.

지금부터 70년 전(1941년), 당시 군산부 전주통(현 군산시 장미동) 17번지에 중화상회(中華商會)란 간판이 내걸린 사무실이 있었다. 1927년 설립한 '중화상회'는 화교협회(華僑協會)의 옛 이름. 회장은 무역업을 하는 중국인 록암정(鹿岩亭)이었다.

1939년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수탈의 전진기지였던 군산항은 쌀 반출과 물동량이 더욱 증가했고, 그에 따라 화교 인구도 늘어 1941년에는 1000명 가까이 되었으며 소학교에 입학할 7~8세 자녀가 50명에 달했다.

자녀들이 제때 교육을 받지 못하면 문맹자가 될 거라는 우려 속에 초등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낀 록 회장은 소학교 설립 계획을 세우고 추진위원회를 조직했다. 그 중 일어에 능통한 우강의(于江義) 위원이 일제 교육관청 직원들을 설득하여 '중국 어문강습소' 허가를 받아냈다.

1920년대 군산부 시가지. 중앙 도로 왼편이 영화동, 장미동입니다.
 1920년대 군산부 시가지. 중앙 도로 왼편이 영화동, 장미동입니다.
ⓒ 군산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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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영화동 중화기독교 군산교회 앞에는 면포, 비단, 해산물 등을 취급하는 무역회사 '유풍덕'(裕豊德), '금생동'(錦生東) 군산부 지점이 있었다. 유풍덕 경영자 주신구(周愼九)는 화교로 한때는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중국에서 활동했던 인물로 알려진다.

화교학교 설립 추진위는 본점을 서울에 두고 있는 유풍덕, 금생동 군산지점에서 각각 3500원씩 7000원을 기부받고, 군산부 중화상회에서 건물 일부를 임대받아 1941년 10월 10일(쌍십절)에 서울, 인천 다음으로 군산에 6년제 '중국 어문강습소'를 개소하였다.

화교 자녀 60여 명으로 문을 연 강습소에는 제주도, 목포, 순천, 광천, 홍성, 전주, 이리(익산) 등 외지에서 유학 온 학생 10명이 거주할 기숙사가 있었으며, 북경 청와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한 동을신(佟乙新)·화숙현(華淑賢) 부부교사가 아이들 교육을 담당했다.

교장은 록암정 회장이 겸임하였고 이사장은 평화동에서 중화음식점 태평각(太平閣)을 운영하던 임전갑(林殿甲)이 맡았다. 교장, 이사장 모두 무보수 명예직이었다. 록 회장은 바쁜 일과 중에도 직접 수업에 들어갔다. 그의 교육열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중국 어문강습소는 1942년 '군산 화교소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는다. 당시 학생 중에는 초등교육 취학연령을 넘긴 15세~20세 사이의 화교 청소년 다수가 하루에 6시간씩 수업을 받았으며, 남녀학생 성비율이 7대3 정도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교육방식은 중화민국 교육제도를 따랐다. 매년 8월 20일에 새 학년 1학기를 시작하고, 12월엔 겨울방학, 다음해 2월 15일에 2학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7월 10일은 여름방학과 동시에 졸업식을 치렀다.

당시엔 화교 학생들도 지정 교과목(중국어, 산술, 자연, 음악, 미술, 체육 등) 외에 일본인 교사에게 일본어와 일본 무용을 배웠고, 복장도 남학생은 까까머리에 국민복 형태의 검은색 교복과 교모, 여학생은 검정 주름치마에 하얀 세일러복 차림이었다.

교육열이 남달랐던 록 회장이 1942년 가을 지병 치료차 고향 중국으로 들어가자, 후임으로 영화동에서 중화음식점 평화원을 운영하던 우계청(于桂淸)이 회장과 교장을 겸임했다. 학교는 계속 번창하여 1945년 봄에는 학생 수가 120여 명에 달했다.

67년(21회) 졸업 기념. 자료가 모두 불타버려 옛 교실 풍경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사진이라고 합니다.
 67년(21회) 졸업 기념. 자료가 모두 불타버려 옛 교실 풍경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사진이라고 합니다.
ⓒ 형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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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군산에 화교들이 계속 유입되고 학생 수도 지속적으로 늘면서 1947년 새 학기를 앞둔 7월에는 전체학생이 180여 명을 웃돌고 교사도 4명이 된다. 때를 같이해서 1회 졸업생 6명을 배출하는데 모두 서울에 있는 화교중학교에 진학했다.

또한, 중화민국 대사관에서 '상회' 명칭을 '자치구'로 변경해달라는 공문이 중화상회 앞으로 내려온다. 이에 따라 군산 중화상회는 '군산 중화자치구'가 되고 화교소학교도 이사회를 조직하여 손경정(孫慶禎)이 이사장으로 선출되고 교사였던 동을신이 교장으로 승진한다.

1947년 가을에는 장미동 시대를 마감하고 중앙로 2가 중앙초등학교 남문 부근으로 이전하는데, 일본인이 사용하던 병원을 인수받아 수리해서 학교 건물로 사용하였다. 미군정청 시절이어서 이사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던 1948년에는 11명(2회)이 졸업했는데, 각 도에 화교소학교가 설립되면서 학생 수가 140명으로 줄어들었다. 같은 해 가을에는 군산 화교 교육의 선각자이자 정신적 지도자였던 록암정 회장이 지병으로 타계한다.

1949년에는 재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2월 18일 화재로 학교 건물이 전소된 것. 그러나 임전갑, 손경정의 섭외로 주한 중화민국 대사관에서 건축비 100만 원을 지원받는다. 당시 지원금은 서울에 화교 중학교를 설립할 자금이었다고.

2002년 4월 7일 화재로 사라진 명산동 본관(옛 유곽).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군산에는 비슷한 2층 건물이 많았는데요. 가장 크고 유달리 높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2002년 4월 7일 화재로 사라진 명산동 본관(옛 유곽).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군산에는 비슷한 2층 건물이 많았는데요. 가장 크고 유달리 높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형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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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있는 화교들의 성금도 이어져 1949년 11월 11일 일제강점기 고급 유곽이었던 명산동 적산가옥(대지 576평, 건물 1,2층 각 90평)으로 이전하여 새롭게 문을 연다. 유곽은 1925년경 향나무 등 고급 목제를 일본에서 가져다 지은 목조건물이었다.

1950년 7월 초순에 졸업식이 잡혀 있던 4회 졸업생들은 6월 25일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졸업장 수여를 훗날로 미뤄야 했다. 재학생들도 수업을 중단했다가 사회가 차츰 안정되어가는 1951년 봄 부산으로 피난해 있던 동을신 교장이 올라와 수업을 재개했다. 당시 전체학생은 60여 명이었다.

1952년 3월 12일 주한 중화민국 왕동원(王東原) 대사가 군산을 방문하여 이사들과 학교 발전방향을 의논하고 후원을 약속했는데, 군산 화교협회에 들어온 모금액만 900만 원 가까이 되었다. 당시 한국 정부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왕 대사는 4성 장군 출신으로 추진력이 강했던 인물로 알려진다.

1953년에는 중화요리점 빈해원을 운영하던 왕조석을 부회장으로 임전갑을 회장으로 선출했다. 1954년에는 군산 화교 100여 가구의 성금 54만4800원으로 명산동 유곽 건물을 불하받아 중화기독교 교회를 설립한 조계기(趙桂枝) 권사 앞으로 등기를 낸다. 당시 회장은 왕조석, 교장은 동을신이 맡고 있었다.

1958년에는 현재 서울에서 한의원을 경영하는 한성호(韓晟昊)가 교장을 맡아 2년 동안 재직했다. 그 후 20년은 중화요리점 중앙각(中央閣) 주인 형인진(邢仁進), 잡화상 홍풍행(鴻豊行) 주인 왕상국(王相國), 용성상회 주인 장경산(張慶山), 영화동 중화요리점 용문각 주인 여건방(呂建芳) 등이 돌아가며 교장과 회장을 맡았다.

60년대 초 체조하는 학생들. 텐트 중간에 보이는 장개석 총통 사진이 눈길을 끕니다.
 60년대 초 체조하는 학생들. 텐트 중간에 보이는 장개석 총통 사진이 눈길을 끕니다.
ⓒ 형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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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초 쌍십절(10월 10일) 운동회 모습. 왼쪽 상단으로 본관 건물이 보입니다.
 80년대 초 쌍십절(10월 10일) 운동회 모습. 왼쪽 상단으로 본관 건물이 보입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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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에는 중앙각 형인진의 둘째 아들 형광의(邢廣義)가 35세의 젊은 나이로 군산 화교회장이 되면서 화교소학교 운영권도 인수받는다. 그는 화교로는 드물게 중앙대학교와 원광대학교 약대를 졸업하고 1970년 영동에 '중국 장수당약국'을 개업해서 운영해오고 있다.

형 회장은 31년째 학교일을 맡아보고 있다. 그는 1987년 학교를 법인체로 전환하여 개인(조계기) 앞으로 되어 있던 부동산을 기증받았고, 1998년에는 중화민국 주한 대표부에서 7000만 원을 지원받아 노후된 유곽 건물 맞은편에 교사(校舍)를 신축하였다.

2001년에는 신축 교사를 2층(1,2층 각 97평)으로 중축하고, 2002년 1월 12일 자로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 자녀는 물론, 혼혈아, 외국 시민권자, 영주권 소지자 등도 입학할 수 있는 '외국인학교' 인가를 받는 등 학교 발전에 노력을 기울였다.

처음엔 인터뷰를 사양하던 형 회장도 과거사를 얘기하려니까 회한이 밀려오는 모양이었다. 그는 긍지와 보람을 느끼지만, 마음 아픈 일도 있었다며 회고했다. 가장 큰 아픔은 2002년 4월 7일 일어난 화재로 50년 가까이 교실로 사용하던 유곽 건물과 소중한 자료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는 것. 

중화요리점 중앙각(中央閣)을 운영하던 형빈의(邢彬義)를 이사장으로 추대하고 학교를 어렵게 이끌어가고 있는 형광의 회장(11회 졸업)은 올해 67세이다. 그는 총무를 두지 않고 서류를 직접 작성하고 발로 뛰니까 비용이 훨씬 절약된다며 허허 웃었다.

운동장의 돌멩이 하나에도 애착이 간다는 형 회장은 학생이 줄어 운영에 어려움이 많겠다고 하자 "화교소학교는 중국문화를 알리는 교육 공간이지 돈 버는 회사가 아닙니다"라며 어른들이 가꿔온 학교를 유지 보존하는 데 모든 걸 바치겠다는 뜻을 밝혔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군산화교소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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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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