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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구에는 국립 대구박물관이 있다. 법원과 검찰청도 있다. 경찰청도 역시 수성구에 있고, 3개의 텔레비전 방송국도 모두 수성구에 있다. 그뿐이 아니다. 어린이대공원도 수성구에 있고, 월드컵 경기장도 수성구에 있으며, 대구시교육청 역시 수성구에 있다. 심지어 대구은행 본점과 농협 본부도 수성구에 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2011년 5월 26일 개관한 대구미술관도 수성구에서 문을 열었다. 앞으로 야구장을 새로 건설하는데 그것 역시 수성구에 짓는다.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전국은 서울 중심, 서울은 강남 중심, 대구는 수성구 중심이란 말이 하고 싶은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지금 쓰는 글의 주제를 벗어난 일탈 행위 아닌가? 본론으로 돌아가자. 수성구에는 역사유적과 문화유산이 거의 없으니 대구박물관으로 가보라는 말을 해야 하지 않나.

 

대구박물관은 '국립'이다. 국립 박물관인 만큼, 방문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시시콜콜 말하지 않아도 될 법하다. 1994년에 개관한 이 박물관은 수준 높은 전시회가 늘상 열리고 있기 때문에, 상설 전시 유물을 감상하는 것 말고도 언제나 방문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물론 대구에서 출토된 구석기와 신석기 유물도 모두 이곳에 있으며, 대구의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국보'도 감상할 수 있다. 즉, 수성구 답사는 대구박물관부터 천천히 둘러본 다음, 여유있게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리는 순서가 현명하다는 말이다.

 

대구박물관에서 나와 좌회전을 하면 남부정류장 네거리에 닿는다. 여기서 우회전을 하여 계속 직진하면 경산시로 가게 된다. 그러나 지금은 대구 지역의 역사유적과 문화유산을 답사하는 중이므로, 그렇게 멀리 가서는 안 된다.
 
남부정류장 네거리에서 우회전을 한 후 곧장 유턴을 한다. 그러고는 곧장 대도로와 나란히 가는 좁은 도로로 들어간다. 100m 가량 전진하면 오른쪽에 모명재를 찾는 이들을 위한 이정표가 나타난다. '비 내리는 고모령'의 무대인 형제봉 아래로 가서 모명재를 찾으라는 것이다. 
 
모명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수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귀화를 한 두사충을 섬기는 재실이다. 그의 묘소도 모명재 바로 뒤에 있다. 보는 이의 눈을 크게 만족시켜 주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보기 드물게 특이한 유적인 만큼 한번쯤은 둘러볼 가치가 충분하다.
 

수성구에는 가볼 만한 묘소가 두 곳 있다. 한 곳은 범물동에 있고, 다른 한 곳은 수성못 바로 뒤의 산비탈에 있다. 전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서상돈 선생의 묘소이고, 후자는 수성못을 만든 것으로 전해지는 일본인 수기임태랑의 묘소이다.
 
모명재에서 대구박물관으로 되돌아와서 계속 직진하면 범물동과 월드컵경기장으로 나눠지는 삼거리에 닿는다. 서상돈 선생의 묘소는 이 삼거리를 내려다 보고 있는 천주교 묘지의 중턱에 있다. 묘지 입구로 들어가도 선생의 묘소를 찾는 데 도움을 주는 안내판 등은 없지만, 관리인에게 물으면 대뜸 답이 나온다. 아마도 묻는 이들이 더러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하지만 막상 선생의 무덤에 당도해 보면 묘역이 너무나 초라해서 일견 허탈한 기분까지 느껴진다. 당대의 부호였던 선생은 국채보상운동 등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는 물쓰듯 돈을 내놓았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무덤은 이렇듯 검소하게 남기라고 유언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면, 사람에게는 상품, 중품, 하품의 세 등급이 있다는 공자의 말씀이 참이 아닐까 여겨진다.
 
수기임태랑의 묘소는 수성못 바로 뒤에 있다. 이 묘소 역시 규모나 치장 상태가 소박하다. 수성못을 축조하여 농사에 큰 도움을 준 사람으로 기억되는 수기임태랑은 본인 스스로 사후에 대구에 묻히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무덤이 만들어졌다. 지금도 이 묘소에서는 해마다 일본과 한국에서 찾아온 이들이 정중한 묘사를 지낸다. 묘소 앞에는 관련 사진들이 작게 전시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수성구 답사에서 절대 빠뜨리면 안 될 소공원 한 군데를 강력히 추천하고자 한다. 사실 대구 시민들 중 이곳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의심스럽다. 이곳의 이름은 '이서(李漵)공원'. '이서'는 사람의 성명이니, 공원의 이름만 듣고도 이 곳이 이서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장소임을 알 수 있다.

 
이서는 정조 때 대구판관을 지낸 사람이다. 그는 해마다 홍수 때문에 큰 피해를 입는 대구 사람들을 보다 못해 사재를 털어 시가지 중심부를 흐르는 물길을 신천쪽으로 돌렸다. 수로를 변경하고 새로 제방을 쌓았던 것이다. 그 후 대구 중심부는 홍수의 범람 탓에 연중행사로 피해를 입던 악순환에서 벗어나게 된다. 
 
당연히 시민들은 그를 추앙하는 비를 세웠고, 강에도 신천(新川)이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2000년 10월, 상동교 아래에 소규모 공원을 만들면서 비도 옮겨오고 비각도 새로 짓는 등 숭모 분위기를 조성했다. 하지만 지금 그곳에 가보면 이서공원이라는 표식은 찾을 길 없고, 신천과 아무 관계도 없는 한 관변단체가 자기들의 이름과 구호를 커다랗게 새긴 돌을 입구에 덜렁 갖다놓아 공원 조성의 의미가 반감되어 버렸다. 그래도(!) 이서공원에는 꼭 가보아야 한다.
 
이서공원 맞은편의 상동 주택가 안에도 꼭 답사할 만한 곳이 숨어 있다. 수성못 간이 야구장 옆에도 있지만, 그것과는 규모로든 내용으로든 비교도 되지 않는 규모의 고인돌 유적이 정화팔레스 아파트 뒤에 부속공원처럼 조성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곳의 고인돌 유적은 청동기 시대의 대구 사람들이 신천변을 따라가며 조성된 너른 들판에 모여 살았다는 사실을 잘 증언해준다. 또한 집터와 고인돌을 복원하여 교육용으로 전시해 두었으므로 자녀와 동행한 답사 여정이라면 꼭 가볼 만하다. 
 
상동 청동기 유적지는 무덤 위에 두꺼운 강판 유리를 얹어 두었다. 낮에 보면 유리 안에는 높은 하늘과 고색창연한 무덤 유적, 그리고 현대인의 고층 아파트가 시퍼렇게 뒤엉킨 채 모여 있다. 그 광경을 보노라면, 시간이란 무엇이며 산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하는 근원적인 질문이 뇌리를 스친다. 물론 그 시각에도 창공의 흰 구름들은 정말 무심한 표정으로 흘러간다.

 

기타, 수성구의 서당과 공룡발자국 답사지 두 곳
 


태그:#2011대구방문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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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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