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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보면 쓰러져가는 움막집처럼 보이는 쌈밥 전문 식당
 멀리서 보면 쓰러져가는 움막집처럼 보이는 쌈밥 전문 식당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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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3일)였다. 전북 군산시에서 시골 분재원 취재를 마치고 버스를 타려고 나오다가 강원도의 '너와집'을 떠오르게 하는 작은 '오두막'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깨진 옹기조각을 지붕에 모자이크 하듯 얹어 장식한 이색적인 집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거북이 등을 연상시키는 지붕은 처마가 순한 파도처럼 곡선을 이루고 용마루가 살짝 굽어 설치미술 전시장에 출품된 작품 같았다. 주변이 논이어서 차에서 볼 때는 농사짓는 노부부가 사는 집으로 알았다. 그런데 간판을 보니 쌈밥 전문 음식점이었다.

식당 입구의 작약꽃.  꽃이 화사한 작약은 시골 농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화초이지요.
 식당 입구의 작약꽃. 꽃이 화사한 작약은 시골 농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화초이지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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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마 밑 대형 장독들. 건물 뒤에는 30~40년 전에 사용하던 것으로 보이는 물자세(물레방아)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처마 밑 대형 장독들. 건물 뒤에는 30~40년 전에 사용하던 것으로 보이는 물자세(물레방아)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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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개한 작약꽃이 화사한 얼굴로 인사하는 입구를 지나 마당에 들어서니 어렸을 때 부엌에서 봤던 살림살이와 농기구들을 전시해놓고 있었다. 6~7명이 둘러앉아 음료수를 마실 수 있는 작은 쉼터도 보였다. 처마 밑의 대형 항아리들과 풀무, 확독, 절구통, 홀태 등은 60년대로 추억여행을 떠나게 했다.

시골 정취를 살려 개축한 집으로 생각되어 처음엔 사진이나 몇 장면 담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농기구 몇 점 진열된 마당 풍경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구수한 흙냄새가 새어나오는 내실은 무엇을 어떻게 꾸며놓았는지 궁금증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류시화 시인의 시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고급 액자보다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았습니다.
 류시화 시인의 시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고급 액자보다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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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대문으로 된 출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니 은은한 황토냄새가 코끝에 와 닿으며 기분을 맑게 해주었다. 서까래가 지나가는 천정도, 음식 요금표가 걸린 벽도 황토여서 고향 집 안방에 들어온 것처럼 편하고 푸근했다.

통나무 기둥에 붙어 있는 빛바랜 창호지 한 장이 눈길을 끌었다. 류시화 시인의 명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시가 적혀 있었기 때문. 고급 액자에 표구해 놓은 것보다 더 서정적이고 자연미가 묻어났다.

4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 두 분이 이야기를 나누다 일어나 친절하게 인사했다. 주인을 찾으니까 잠시 외출했다며 어디에서 오셨느냐고 물었다. 찾아온 연유를 설명하고 쌈밥 1인분도 주문이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다음에는 여럿이 오셔야 한다며 활짝 웃었다.

방에서 바라본 구암동, 성산면 들녘. 누렇게 익은 보리밭인데요. 참기를 몇 방울 떨어뜨린 꽁보리밥을 고추장에 비며 열무김치를 얹어먹던 시절을 그립게 했습니다.
 방에서 바라본 구암동, 성산면 들녘. 누렇게 익은 보리밭인데요. 참기를 몇 방울 떨어뜨린 꽁보리밥을 고추장에 비며 열무김치를 얹어먹던 시절을 그립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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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주문하고 방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으니, 그 옛날 시골 양조장 주인집 안방에서 풍기던 특유의 흙냄새가 가득했다. 고장 난 공전식 전화기, 일제 10인치 TV, 재봉틀, 저울 등은 복고 분위기를 한층 띄어주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들녘풍경은 눈을 시원하게 하면서 한나절 동안 쌓인 스트레스까지 풀어주었다. '지금이 가을인가?'하고 자문도 했다.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가 10월의 황금 들녘을 떠오르게 했기 때문.

농촌을 배경으로 그린 한 폭의 수채화를 감상하는 것 같았다. 가물가물하게 보이는 오성산, 끝이 어디인지 모를 송전탑, 장항선 철길 등은 더 없는 모델이 되어주고 있었다. 들녘의 4계절 풍경이 슬라이드 필름처럼 한 장면씩 머리를 스쳐 갔다. 같은 풍경임에도 방에 앉아서 보니 운치가 더했다.

요즘이 쌈밥 제철, 점잖게 싸먹으면 맛 떨어져 

쌈밥 기본 상차림. 찬이 모두 개운하고 맛깔스러웠습니다.
 쌈밥 기본 상차림. 찬이 모두 개운하고 맛깔스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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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상단에서 시계방향으로) 열무김치, 무말랭이, 참나물, 근대나물. 쌉싸래한 나물들은 돼지고기의 느끼한 맛을 감해주었습니다.
 (왼쪽 상단에서 시계방향으로) 열무김치, 무말랭이, 참나물, 근대나물. 쌉싸래한 나물들은 돼지고기의 느끼한 맛을 감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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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녘 보리밭 삼매경에 빠져 있는데 주방장 아주머니가 들어와 밥상을 차렸다. 유연한 손놀림은 주방 경력을 말해주는 듯하였다. 나물은 금방 무쳤는지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된장찌개를 끓이고, 제육볶음을 만들 때 나오는 양념 냄새로 짐작했지만, 아주머니는 옛날 어머니 손맛을 타고난 모양이었다.

그는 밥도 두 공기를 마주 놓았다. 혼자 먹으면 복이 도망간다나 어쩐다나··· 하면서 모자라면 더 드시라고 했다. 농이 섞인 지나가는 말이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하지만 남을 배려하는 아주머니의 따뜻한 심성도 담겨 있음을 느꼈다. 고마웠다.

구수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는 된장찌개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제육볶음, 시원한 열무김치, 구미를 당기는 각종 나물, 싱싱한 조기, 튀긴 누룽지 등 부잣집 잔칫상처럼 푸짐했다. 뒤이어 상추를 비롯한 싱싱한 채소들이 바구니에 수북하게 담겨 나왔다.

쌈밥 1인분에 7000원. 반찬은 물론 쌈 싸먹을 채소 종류도 미안할 정도로 많았다. 아주머니는 반찬도 채소도 열두 가지가 기본이라고 말했다. 대신 3~4종류는 매일 번갈아 나온다고. 하루 사용할 만큼만 장을 보기 때문에 계절과 날씨에 따라 몇 가지씩 바뀔 수밖에 없다는 것.

주방장 아주머니가 싸준 쌈밥. 쌈밥에 제육볶음은 처음이었는데요. 삼겹살도 상추를 싸먹듯 음식궁합이 잘 맞는 것 같았습니다.
 주방장 아주머니가 싸준 쌈밥. 쌈밥에 제육볶음은 처음이었는데요. 삼겹살도 상추를 싸먹듯 음식궁합이 잘 맞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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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나른한 봄기운이 몸에 남아서인지 쌉싸래한 근대나물, 새콤달콤한 참나물, 담백한 호박말랭이, 꼬들꼬들한 무말랭이 등 상큼한 나물류가 입맛을 당겼다. 무엇부터 먹어야 할지 몰라 아주머니에게 부탁했다.

"채소 종류가 하도 많아서 무엇부터 싸먹어야 할지 모르겠네요. 아주머니가 시범으로 맛있게 한 번만 싸보세요." 
"아자씨도. 쌈밥은 머슴처럼 암치께나 싸 먹어야 진짜 쌈 맛이 나쥬. 폼 잡고 점잖허게 앉아서 싸 먹으믄 맛이 떨어져유. 먹는 재미도 없고···."
"쌈밥은 언제 먹어야 젤 맛있고 재밌는데요?"
"제가 장사를 혀먹을라고 허는 말이 아니라, 쌈밥은 지금이 제철이쥬. 상추, 근대, 당귀, 청겨자, 접겨자, 쌈 배추 등 쌈밥에 필요한 채소가 밭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허는 때인게요. 그려서 식단에 채소 종류도 많은 거에유." 

아주머니는 맛있게 드시라며 밖으로 나갔다. 보고 배운 대로 상추, 근대, 당귀, 쌈 배추 등에 양파와 우렁이가 들어간 쌈장과 제육볶음 한두 첨 얹으니 주먹크기의 쌈밥이 되었고, 누렇게 익은 보리밭을 바라보며 먹으니까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복고풍으로 꾸며놓은 내실 분위기는, 어렸을 때 "엄니 나 상추쌈 먹고 싶은디"라고 하면 "애들은 상추쌈 먹는 거 아니다!"라고 하던 어머니와 동네 아주머니들이 앞집 대청에서 상추쌈 먹으며 웃고 떠들던 모습들을 떠오르게 하면서 식욕을 더욱 돋워주었다.

 돼지 목살로 만들었다는 제육볶음. 하나 더 추가하면 4000원이라고 합니다. 싸지요.
 돼지 목살로 만들었다는 제육볶음. 하나 더 추가하면 4000원이라고 합니다. 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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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나오려니까 남은 음식이 아까웠다. 쌈을 몇 번 싸먹었더니 밥 한 공기는 게 눈 감추듯 사라졌는데, 반찬 몇 종류는 젓가락이 한 번도 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남은 음식 모두 싸오고 싶었다. 그러나 염치없는 아저씨가 될 것 같아 제육볶음 남은 것만 가져갈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하라며 싸주었다. 

생각지 않은 '나 홀로 외식', 그러나 후회는 없다. 꼭 둘러보고 싶은 집이었고, 음식도 맛있게 먹었으며 남은 제육볶음을 집으로 가져와 반찬을 했으니 어쩌면 이익을 본 셈이다. 쌈밥 좋아하는 아내에게는 미안해서 말도 못했다. 다음에 함께 가면서 사정을 얘기하면 이해해주겠지.

농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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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쌈밥, #오두막, #제육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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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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